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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왜 6번에 붉은 인주 안 찍혔을까

등록 2020-05-05 05:00수정 2020-05-06 18:15

[홀로 선 정의당, 희망을 찾아서]
ⓛ 당내 총선 참여 7명의 진단

비례 5석·지역구 1석 겨우 생환
유권자들 “당도 사람도 괜찮지만
우리 문제 해결해줄 수 있을까…”
약자 대안세력으로 신뢰도 낮아
심상정 정의당 대표가 지난달 12일 오후 경기도 안양시 안양중앙공원에서 제21대 국회의원선거 안양 지역 후보들 지원 유세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심상정 정의당 대표가 지난달 12일 오후 경기도 안양시 안양중앙공원에서 제21대 국회의원선거 안양 지역 후보들 지원 유세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사위는 황량하고 추위는 매서웠다. 광야에 홀로 섰던 그들은 기진맥진, 겨우겨우 생환했다. 6석, 지역구 생존율 75분의 1, 정당투표 득표율 9.67%. 정의당의 21대 총선 성적표는 애초 기대치를 한참 밑돌았다. ‘악조건 속 선전’이라 위안해보지만, 차오르는 허탈감은 다스릴 도리가 없다. 정의당과 함께 21대 총선의 최전선에 섰던 7명에게 <한겨레>가 물었다. 무엇이 문제인가? 답은 몇가지로 수렴됐다. 낮은 신뢰도, 정체성 혼돈, 정면승부 회피.

■ 성적: 6석 ‘보이지 않는 것은 믿을 수 없다.’ 긴 투표용지를 읽어 내려가다 ‘6번 정의당’에 잠시 눈이 멈췄더라도 마지막 순간 붉은 인주가 찍히지 않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고 오현주(41)는 짐작한다. “당도 좋고 사람도 괜찮아. 그런데 평소에 보기 힘드니, 우리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을까 싶어.” 이번 총선 때 서울 마포을 선거구에 출마해 1만1445표(8.87%)를 얻은 오현주가 유권자들에게 자주 듣던 말이다. 그는 “문제제기는 잘했지만 삶 속에 파고들지 못했다. 필요할 때 정작 그들 옆에 없었다”고 자책했다. 힘없고 고통받는 약자들에게 ‘대안 세력’으로서 믿음을 주지 못했다는 얘기였다.

광주 광산갑에 출마한 나경채(47) 역시 같은 생각이다. 그는 “선거는 실전이다. 실전에선 ‘실험정당’이 아니라 ‘준비된 정당’으로 다가가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정의당 광주시당 위원장인 나경채는 광주의 8개 선거구 전체에 정의당 후보를 출마시키는 게 목표였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6곳에 후보를 내는 데 그친 것이다. 출마율 75%. 그래도 전국 17개 광역시·도 중 가장 높다. 이번 총선에서 정의당은 전국 253개 선거구 가운데 75곳밖에 후보자를 내지 못했다. 2004년 123곳에 후보자를 낸 민주노동당의 절반 수준이다.

정의당이 신뢰받는 대안이 되지 못한 데에는 ‘정체성’ 문제도 있다. 집권여당이 된 더불어민주당은 야당 시절 시민사회의 진보적 의제들을 지속적으로 흡수했다. 각종 무상 시리즈와 최저임금 현실화 정책 등이 대표적이다. 그 과정에서 정의당의 정체성은 흔들렸다. 나경채는 “사람들이 정의당을 민주당보다 다소 급진적인 정당으로만 인식한다. 민주당 정부가 재난지원금 70% 지급을 이야기하면 정의당은 100%를 이야기한다는 정도다. 정체성에서 질적인 차이를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라고 짚었다. 비례대표로 당선된 배진교(52) 역시 “웬만한 진보 정책들은 민주당이 다 가져가버렸다. 정의당이 새로운 진보 어젠다를 내놔야 하는데, 그게 생각만큼 쉽지 않다”고 했다. 거대 리버럴 정당의 대안으로 자리매김하지 못한 결과는 6석이라는 ‘현상 유지’의 총선 성적표로 나타났다.

■ 반성: 민주당 2중대와 조국 ‘민주당 2중대’는 정의당의 정체성 문제를 가장 아프게 꼬집는 말이다. 지난해 여름을 달군 ‘조국 사태’ 때 가장 많이 회자됐다. 서울 관악구 구의원 이기중(40)은 “진보정당이라면 민주당과 차별화하고 각을 세워야 했는데, 그 싸움을 미뤘다”고 아쉬워했다. 물론 정의당이 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을 적극 반대했다면 선거법 통과도 불투명해지고, 당원들의 대규모 이탈도 불가피했을 것이란 지적에는 그 역시 수긍한다. 그러나 거대 양당의 위성정당 창당으로 개정 선거법은 무력화됐고, 조국 사태 때 탈당하지 않은 친문재인·친조국 성향의 당원들은 정의당이 위성정당 불참을 결정하자 결국 당을 떠났다. 이기중은 “거대 양당에 실망한 무당층을 적극적으로 파고드는 정치를 했더라면 상황은 달랐을 것”이라고 했다.

이번 총선에서 정의당 선거 전략을 컨설팅한 유승찬 스토리닷 대표는 한층 비판적이다. 그는 “정의당은 정의와 공정, 평등이란 가치를 추구하는 정당으로 인식됐다. 그러나 조국 사태 때 정의당이 보인 모호한 태도는 그 가치와 진정성에 대해 근본적 회의를 갖게 했다. 두고두고 짐이 될 것”이라고 했다. 조국 이슈에 선명하게 비판적인 목소리를 냈다면 선거 국면에서 민주당이나 민주당계 위성정당들과 확실한 차별성을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란 게 그의 생각이다.

정의당의 모호한 대처는 당의 주류인 40~50대 기성세대의 둔감함 때문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광주 동남구을에서 지역구 선거운동을 한 김다정(27)은 “당에서도 기성세대는 우리가 민감해하는 불공정 이슈 같은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우리 당 비례대표 1번 후보의 ‘대리게임’이 논란이 됐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 후보자의 행위는 ‘공정’이란 가치를 정면으로 훼손하는 것이었지만, 지도부는 사안의 심각성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고 꼬집었다.

■ 조건: 위성정당, ‘국난 극복’ 프레임 책임과 잘못이 정의당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난해 겨울, 국회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부분 도입한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가결했다. 그러나 거대 양당은 얼마 안 가 이 선거법을 ‘빈껍데기’로 만들어버렸다. 미래통합당은 그 선거법에 동의한 적이 없다는 이유로 위성정당을 만들었고, 민주당은 통합당의 반칙에 ‘눈 뜨고 당할 수 없다’며 ‘반칙 경쟁’에 뛰어들었다. 결과는 ‘양당 구도의 공고화’였다. 유승찬은 “거대 양당의 총선 지역구 득표율을 더하면 91.4%다. 4년 전 선거 때보다 15%포인트 이상 늘어난 수치다. 정의당 같은 제3세력의 기반 자체가 폐허가 된 것”이라고 했다. 위성정당에 대한 정의당의 대응이 정교하지 못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배진교는 “민주당까지 위성정당을 만들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현실 정치에서 충분히 벌어질 수 있는 일인데, 안이하게 판단했다가 허를 찔렸다”고 씁쓸해했다.

코로나19 확산이 ‘국난 극복’ 프레임을 작동시킨 것도 정의당에는 불리하게 작용했다. 나경채는 “속수무책이었다. 코로나 국난을 이겨내려면 촛불 개혁 정권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 정서가 빠르게 확산됐다. 통합당 후보의 당선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광주에서조차 ‘민주당에 전국적으로 압도적인 지지를 몰아줘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고 했다. 오현주는 “코로나로 인한 불안과 위기감이 ‘집권여당을 밀어줘야 한다’ ‘촛불 개혁이 좌초하게 만들어선 안 된다’는 정서적 흐름을 만들어낸 것 같다”고 진단했다.

■ 기대: 비례정당 불참과 엔번방 아쉬움만 있었던 건 아니다. 민주당이 주도한 비례정당 참여를 거부하면서 ‘정치적 홀로서기’의 근거를 마련한 것은 기대 밖의 성과다. 의회 내 입지는 좁아졌지만, 당의 정체성을 분명히 할 기회가 열린 셈이다. 정의당 여성본부장 조혜민(30)은 “거대 집권여당인 민주당은 21대 국회에서 중도 노선을 취할 가능성이 높다. 민주당과 차별화된 목소리로 진보의 가치를 현실 정치에 구현하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했다. 배진교는 “목소리 없는 이들의 목소리가 되는 정당, 투명인간들에게 제 모습을 찾아주는 정당, 사회적 약자들을 대변하는 정당으로 확실히 자리매김할 기회”라고 했다.

그런 점에서 총선기간 정의당의 엔(n)번방 대응은 다른 정당과 차별성을 보여줬다는 평가가 나온다. 오현주는 “민주당은 엔번방 방지법을 총선 뒤에 발의하자고 했지만, 정의당은 하루 선거운동을 중단하고 본회의를 열어 당장 통과시키자는 기조를 유지했다. 바람직한 차별화였다”고 말했다. 조혜민의 생각도 같았다. 그는 “정의당은 줄곧 엔번방 피해자인 여성 당사자 곁에 있었다. 누구의 곁에서 함께 목소리를 낼 것인지를 고민하다 보면 활로는 자연스럽게 열릴 것”이라고 했다. 당의 세력 기반을 정규직 조직 노동자층에서 비정규직과 여성, 청년 등 사회적 소수자로 옮겨가면서 노동과 환경, 복지로 의제를 확장해나가자는 제안이다.

황금비 서영지 정환봉 기자 bon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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