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사회로의 이행과 전환을 둘러싼 담론이 성행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열린 원전 공론화위원회 시민참여단 토론회.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이행과 전환을 둘러싼 담론의 범람
격변의 시대이다. 이행(transition)과 전환(transformation)의 논리가 홍수를 이룬다.
화석연료를 적게 쓰고 지속가능한 에너지를 수급하여 핵발전의 의존에서 벗어나는 재생에너지 100퍼센트 사용을 목표로 하는 ‘탈핵에너지 전환’이 있다. 핵발전의 위험에 대한 안전성 담론에서 핵발전에서 벗어나는 에너지 전환 담론으로 방향을 튼 것이다. 양자통신과 양자컴퓨터의 부상은 기존의 통신기술 패러다임을 혁명적으로 바꿈으로써 새로운 ‘양자정보시대로의 이행’을 촉진한다. 양자컴퓨터는 기존 컴퓨터가 100만년 걸릴 계산을 10분 내에 수행함으로써 연산 속도를 획기적으로 높이고, 암호개발·새로운 반도체·신물질 개발 등이 가능해진다.
임박한 에너지 위기와 기후변화의 시대를 극복할 수 있는 전환도시 운동도 있다. 화석 연료의 소비를 줄여서 도시의 자립 기능과 공동체 복원력을 키우는 ‘지속가능한 전환 운동’이다. 여기에서 전환은 경제성장·화석연료에 바탕을 둔 경제체제에서 벗어나 신재생에너지 중심의 체제로 바꾸고, 모든 사람들에게 에너지 자립의 성취감과 공동체 회복의 기쁨을 선사하는 지속가능한 미래사회의 지향을 가리킨다.
1900년 무렵 파리 미술가가 상상한 유토피아 미래. 위키미디어 코먼스
유토피아적 상상력 부재의 시대
이러한 이행과 전환에 필요한 것이 유토피아적 상상력임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유토피아는 우리의 관심에서 멀어져 미래를 위한 인간활동의 기본 형태로 간주되지 못했다. 실증주의적 경향이 유토피아의 부재에 크게 기여하였다. 오감(五感)을 통해서 경험할 수 있는 것만이 참된 지식이고 탐구될 가치가 있다고 간주하는 생각과 태도가 실증주의적 경향이다. 실증주의적 경향이 지배적인 한국 사회에서 유토피아는 비이성적이고 헛되고 헛된 망상일 뿐이었다. 주어진 사실과 통계에 대한 분석과 설명을 넘어서는 기대·희망은 부질없는 것으로 치부되었다.
‘대안부재’ 테제(TINA: There is no Alternative)도 유토피아 실종과 깊은 관련이 있다. 영국 총리였던 마가렛 대처를 중심으로 하는 시장자유주의자들은 시장경제와 민주주의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고 주장한다. 자유경쟁·효율의 극대화·규제철폐·민영화 등을 내용으로 하는 시장경제의 신자유주의만이 사회문제를 해결하고 사회적·경제적 진보를 담보한다는 것이다. 대안부재 테제의 틀 속에서는 세계화에 기반한 자본주의 모델에 대항하는 대안적 비전이나 새로운 세계에 대한 유토피아적 담론의 싹을 배양할 수 없었다.
유토피아를 행복담론이 대체하면서 유토피아 상실의 시대는 가속화되었다. 행복 추구는 인류의 오래된 공통된 관심사이지만 오늘날 사회에서는 더욱 더 마음의 행복이 중요시되었다. 개인주의가 만연하면서 사회적 행복보다는 개인적 행복이 강조되고, 유토피아를 통한 바람직한 사회건설과 문제 해결을 위해 기존 체제에 대항하는 것은 행복과 거리가 멀었다. 유토피아는 공동체나 사회의 구원을 위한 공간인 반면 행복은 자기 만족과 개인 구원의 피난처였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공공성·정의 등에 기반한 사회적 행복을 달성하기 위해 진정한 저항, 공동체적 연대, 장기적인 목적보다는 개인의 행복을 내면화하는 것이 더 의미 있는 일이 되었다. 좋은 삶에 대한 질문이 개인 행복의 손으로 넘어가면서 유토피아가 비집고 들어갈 공간이 축소된 것이다.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표지. 위키미디어 코먼스
유토피아, 에유토피아, 그리고 디스토피아
유토피아(utopia)는 디스토피아(dystopia)와 함께 대안적 사회에 대한 대표적 미래 전망이다. 토마스 모어(T. More)가 가상사회를 나타내기 위하여 그의 책 《유토피아》(1516)에서 처음 사용한 것으로, 인간이 꿈꾸는 이상향을 의미한다. 유토피아는 문자 그대로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곳(no place)을 말하며 완벽한 사회를 뜻한다. 종교적인 측면에서는 기독교의 천국이나 불교의 극락세계와 비슷하다. 근대의 시작과 더불어 유토피아에 대한 상상력이 꽃을 피웠는데, 이상적·환상적·비현실적 미래사회에 관한 허구적 여행기 형식으로 주로 이루어졌다.
유토피아와 유사한 개념으로 에유토피아(eutopia)가 있다. 이것은 좋은 곳(good place)을 뜻하며 모어의 《유토피아》에 나오는 상상의 섬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에유토피아는 현실세계에서 성취할 수 있는 ‘행복의 땅’(happy land)을 지칭한다. 다시 말해, 에유토피아는 긍정적이고 달성 가능한 유토피아이다. 오늘날 유토피아가 이상사회를 나타내는 작품, 프로그램, 정강정책 등을 뜻하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사용되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유토피아와 에유토피아는 거의 동일한 개념으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상의 이상사회를 나타낼 때에는 유토피아가 에유토피아보다 더 일반적인 개념으로 사용된다.
지옥향을 나타내는 디스토피아는 존 스튜어트 밀(S. Mill)이 1868년 의회논쟁에서 처음 사용했던 용어로 나쁜 장소(bad place)를 나타낸다. 디스토피아는 두 가지 방식으로 정의될 수 있다. 첫째는 모든 것이 좋지 않은 조건이나 장소를 나타낸다. 두 번째는 일종의 반유토피아 형태로, 빅 브라더(Big Brother)의 감시 사회 등과 같이 인간이 인위적으로 제시한 사회를 반대하는 풍자적이고 예언적인 경고를 일컫는다. 디스토피아는 반(反)유토피아 혹은 부정적 유토피아로 불려지기도 한다. 소설인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 조지 오웰의 《1984》, 영화인 마이클 윈터바텀의 《코드 46》, 제임스 맥테이그의 《브이 포 벤데타》는 디스토피아의 전형인 완전히 통제된 사회를 그리고 있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 깃발.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 아래 서민들의 희생을 강요했다. 한겨레신문 자료사진
‘현실 도피’라는 부정적 통로 역할
유토피아는 미래의 바람직한 사회를 꿈꾸게 하기 때문에 현재 사회의 문제점을 회피하고 현실 도피적인 부정적인 기능을 했다. 박정희 정권의 “잘 살아 보세”라는 구호 아래 조국 근대화와 민족 중흥의 미래상은 노동자·농민의 희생을 강요하였고, 대다수 기층 민중들은 미래의 행복을 위하여 현재의 고통을 받아들이고 순종하게 되었다. 유토피아는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허구적·관념적 세계로의 도피처를 제공함으로써 지배구조의 문제점을 무감각하게 하는 마취제 역할을 한다.
유토피아는 평화, 안녕, 조화로운 사회를 추구하기 때문에 사회 세력 간의 권력투쟁과 갈등에 눈을 감는 경향이 있다. 유토피아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지배세력 혹은 억압세력과 투쟁이 불가피하다. 유토피아는 갈등이 없고 평화로운 세상을 원하기에 억압세력과의 투쟁은 유토피아가 추구하는 이념과 실천의 괴리를 낳는다. 그리하여 유토피아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현실정치에서 멀어지거나 지배세력의 잠정적 동조자가 되기도 한다.
유토피아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공간을 제공하지만 정형화된 이상사회에 인간의 욕구를 강제적으로 적응시킬 가능성이 있다. 인간의 다양한 욕구를 특정한 기준 안에서 재단함으로써 사람을 사회라는 틀 속에 가두고 통제할 수 있다. 그리하여 유토피아라는 자유의 공간이 소수 특권층을 위한 공간으로 바뀌어 전체주의적 사고가 지배적일 수 있다.
유토피아는 적합한 미래상을 구성하는 데 도움을 준다. 픽사베이
유토피아 본연의 역할을 되찾아야
스웨덴 사민당의 대표 이론가인 비그포르스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사회주의 유토피아’를 비판하고, “우리는 몇 십 년, 몇 백 년 후의 파라다이스를 준비하기 위해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면서도 유토피아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독일의 사회학자 카를 만하임은 “현실과 이반된 방향 설정을 하는 것 등 모두를 유토피아적”이라고 규정했다. 유토피아란 기존 질서를 전부 혹은 부분적으로 파괴하는 “현실 초월적 방향 설정”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토피아는 미래의 사회를 예견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기존의 현실을 넘어서서 새로운 사회질서를 미리 제시할 수 있다.
유토피아는 현실 도피나 기득권 세력에 동조하는 부정적 기능을 갖고 있다. 그러나 독일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는 유토피아를 낮꿈과 밤꿈에 비유하면서 유토피아는 양면적 속성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밤꿈은 현실을 일시적으로 잊게 하는 아편과 같은 도피적 기능을, 낮꿈은 더 좋은 삶에 대한 새로운 계획과 같은 갈망의 기능을 의미한다. 갈망으로 나타나는 유토피아는 대부분 시대정신을 반영하며, 일반 대중들의 기대·욕구·희망이 녹아 있어서 더 나은 것을 소망하게끔 자극한다.
유토피아는 당시 사회의 문제를 지적하는 현실 비판적 기능을 한다. 유토피아는 사회비판을 위한 기준과 수단을 제공함으로써 현재의 문제점을 폭로한다. 또한 유토피아의 소망은 현재의 질서를 유지할 목적으로 사람들에게 강요하고 내면화시킨 허위욕구도 밝힌다. 유토피아 연구가인 헤르츨러(J.O. Hertzier)는 유토피아는 길잡이 별(guiding star)과 같아서 높은 이상적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현실을 적극적으로 비판하고 개선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고 주장한다.
유토피아는 현실을 비판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회를 변혁하려는 의지를 불러일으킨다. 유토피아적 이상을 실현하려면 변혁에 대한 희망과 실천이 따를 수밖에 없다. 유토피아는 더 좋은 사회달성이라는 욕망을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게 한다. 이데올로기가 현실을 호도한다면, 유토피아는 기존의 현실을 변혁할 수 있는 급진적 상상력을 제공하여 이행과 전환을 위한 활력을 불어넣은 역할을 한다.
오늘날 우리는 합리성과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생존가능성과 실현가능성이라는 이름으로, 구체적인 정책 입안이라는 이름으로 유토피아에 대한 신뢰가 깨어진 시대에 살고 있다. 유토피아는 바람직한 사회에 대한 상상의 원천과 원리를 제공함으로써 좋은 삶에 대한 질문을, 개인을 넘어선 공동체의 영역으로 확대할 수 있다. 공유된 유토피아는 미래의 삶의 양식뿐만 아니라 다양한 미래사회의 사회적 조건과 선택에 대한 자유를 넓힐 수 있게 한다. 다시 말해 유토피아는 급진적 사회 이행과 전환을 위한 행위 주체, 상상, 원리, 신념 등을 서로 연결시켜 한국사회에 적합한 미래상을 구성하는 데 기여한다. 유토피아가 갖는 다양한 어두운 그림자가 있다. 이러한 부정적 기능에 대한 혁파는 우리의 몫이다. 우리가 실천해서 해결해야 할 과제다.
손현주/미래학자·전북대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