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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과학 미래

과학자들을 남북으로 갈라놓은 ‘국대안 파동’

등록 2019-01-07 06:00수정 2019-01-07 11:05

[박상준의 과거창]
사회주의 성향 과학 엘리트들
‘국립 서울대’ 반대하다 월북
북한 과학기술계 기틀 다져
1946년 2월에 창간된 조선과학자동맹의 기관지 ‘과학전선’에는 최응석의 ‘조선의학건설에 관하여’라는 글이 실렸다. 여기엔 1941년 당시 식민지 조선의 의료관계자 통계가 인용되어 있는데, 의사의 수는 총 3216명이며 이 중에 조선인은 2022명이고 나머지는 일본인 1191명과 외국인 3명이다. 그리고 이와는 별도로 ‘의생醫生’이 3597인이라고 밝히고 있다. 의생은 과연 무엇일까?

구한말 이후 우리나라 의료계는 서양의학식 체제로 재편되어 갔으나 수요에 부응할 수 있는 의사 수는 많지 않았고, 그렇다고 단기간에 많이 양성해 낼 수도 없었다. 그래서 1913년에 조선총독부는 ‘의생규칙(醫生規則)’을 공포하게 된다. 20세 이상인 한국인 중에 2년 이상 의업에 종사한 사람들을 가려 뽑아 의생 면허를 내주었는데, 여기서 의업이란 바로 전통의학, 즉 한의학을 말한다. 의생들은 해방 이후에 모두 한의사가 되었으며, 우리나라에 종두법을 보급하는 등 서양 의학의 도입에 큰 역할을 한 지석영도 의사가 아니라 의생 면허 소지자였다.

최응석은 이 통계수치를 인용하면서 이런 언급을 했다. ‘의생 등 무자격자가 많아 아시아적 봉건성을 드러내고 있다.’ 당시 의생들은 일반 서민이 누릴 수 있는 의료 서비스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최응석은 이들을 무자격자로 단정하면서 전통의학 자체를 구시대적인 것으로 인식한 셈이다. 그는 국립병원과 협동조합병원을 근간으로 한 의료국영론을 주장한 인물이었는데 그 구상에는 처음부터 의생 등 전통의학의 역량은 배제하고 서양 의학 체계에서 훈련된 의사들의 양성을 전제했던 것이다.

1914년 평양에서 태어난 최응석은 1937년에 도쿄제국대학 의학부를 졸업했으며 1943년에는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4년에 일본 사회주의 활동가들과 관련된 건으로 체포되었다가 집행유예로 풀려났으며, 이듬해 귀국했다가 해방을 맞았다. 1945년 9월에 경성대학 의학부 교수가 되었고 이어서 사회주의 계열의 인사들이 모인 조선과학자동맹에 참가, 나중에는 부위원장까지 지내게 된다. 1946년 여름에 미군정청은 분야별로 흩어져있는 학교들을 통합하여 국립서울대학교를 설립한다는 이른바 ‘국대안’을 추진하기 시작했는데, 상당수 교수 및 학생들의 거센 반대에 직면한다. 이때 최응석도 부족한 의료인들의 단기 양성을 위해서는 6년제가 아닌 4년제 의학전문학교의 증설이 더 시급하다며 반대했고 당시 미군정 장관인 아서 러치를 항의 방문하는 대표단에도 참가했다.

그러나 잘 알려져 있다시피 국대안은 결국 관철되었다. 약 300명의 교수들이 학교를 떠났고, 그중에 최응석도 있었다. 그의 소식이 알려지자 곧 김일성대학 총장의 초청장이 도착해 최응석은 북으로 갔고, 김일성대학 의학부 부장 겸 병원장을 맡아 북한 사회 의료체계의 틀을 다지게 된다. 또한 북조선보건련맹 위원장, 조선의학회 중앙위 위원장 등을 지내면서 소련의 산업 및 사회의료제도를 적극적으로 참고했다고 알려진다. 나중에는 지주계급 출신이자 남로당 계열이라는 이유로 반혁명분자로 몰려 숙청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는데, 김일성이 직접 나서서 구명했다는 일화도 있다.

최응석의 삶은 해방정국에서 사회주의의 길을 간 과학자의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과학전선’ 창간호에 ‘조선공업건설의 제문제’라는 글을 실은 최성세 역시 비슷한 경우이다. 도쿄제국대학 공학부 전기과를 졸업한 그 역시 국대안 파동 때 북으로 간 뒤 북한 최초의 전동기와 수은정류기를 만들었고 수풍발전소 대보수 공사와 평양화력발전소 건설 및 운영, 북창화력발전소 건설 등 굵직한 일을 떠맡았다.

사실 일제강점기를 벗어난 직후에는 과학기술계의 주요 인사들이 대부분 남쪽에 있어서 북에서는 김일성대학을 개교하고도 일부 학과는 설립조차 곤란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국대안 파동으로 과학자 및 공학자들이 대거 월북하게 되면서 비로소 북한 과학기술계의 기틀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은 상당히 아이러니한 사실이다. 아마도 국대안 파동이 없었다면 남북한의 과학기술계 격차는 처음부터 훨씬 더 벌어졌을 것이다.

1946년에는 ‘과학전선’외에도 조선과학기술연맹에서 낸 ‘대중과학’도 창간호를 냈는데, 여기엔 좌우를 막론하고 당대의 최고 권위자들이 참여했다. 외솔 최현배와 함께 국어학계의 거두로 꼽히는 일석 이희승이 ‘과학술어와 조선어’라는 글을 실었는가 하면, 창간사를 쓴 도상록은 국대안 파동으로 북으로 간 뒤 북한 핵물리학계의 태두가 된 인물이다. 사실 ‘대중과학’은 사회평론적 성격이 강했던 ‘과학전선’이나 ‘인민과학’과는 달리 과학기술적인 내용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 진정한 과학잡지였다. 특히 온돌이나 한약 등 우리와 직접 관련이 있는 내용도 많이 다루었고 ‘조선적인 영양(營養)의 확립’이나 기술시책, 공업건설 등 해방이 된 조국의 과학기술 정책에 대한 모색도 활발히 시도한 잡지였다. 해방 이후 국대안 파동이 나기 전까지의 1년 남짓, 특히 1946년 전반기는 우리 과학기술사에서 여러모로 흥미로운 시기였던 셈이다.

박상준 (서울SF아카이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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