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양과 바다에 버려진 플라스틱 쓰레기. 바다에 버려지는 것만 한 해 수백만톤이다. 샬머스공대 제공
이건 ‘순리’일까 ‘역리’일까?
세상을 순조롭게 돌아가게 하는 이치에 맞느냐를 기준으로 순리(順理)와 역리(逆理)를 구분한다. ‘하늘에 순응하는 자는 살고, 하늘을 거스르는 자는 망할 것이다’(順天者存 逆天者亡)라는 맹자의 경구에 뿌리를 둔 이 화두를 떠올리게 하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바다와 토양의 미생물들이 갈수록 주변에 넘쳐나는 플라스틱을 먹이로 삼아 살아가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연구 보고서다.
스웨덴 샬머스공대 생명과학부 과학자들이 자연에서 채취한 유전체(DNA) 표본에서 2억개 이상의 유전자를 가려낸 뒤, 여기서 10가지 유형의 플라스틱을 분해하는 3만가지 효소를 발견했다고 미국미생물학회가 발행하는 국제학술지 ‘미생물 생태학’(Microbial Ecology) 저널에 최근 발표했다. 이 연구는 미생물의 플라스틱 분해 잠재력에 관한 최초의 대규모 연구라고 영국 일간 ‘가디언’은 평가했다.
연구진에 따르면 분석 대상이 된 유기체의 4분의 1이 분해 효소를 가지고 있었으며, 효소의 수와 유형은 플라스틱의 양과 유형에 조응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연구진은 “이는 플라스틱 오염이 지구 미생물 생태계에 일정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증거”라고 밝혔다.
자연 환경으로 나온 플라스틱 쓰레기는 바다에 흘러드는 것만 해도 한 해 900만~1400만톤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가장 좋은 방법은 다시 수거해 재활용하는 것이지만 수거율은 극히 낮다. 또 플라스틱은 잘 분해되지도 않아 갈수록 자연을 오염시키고 있다. 연구진에 따르면 자연에 방치된 페트병(PET)의 예상 수명은 16~48년이다.
따라서 효소를 이용해 플라스틱을 구성 물질들로 분해한 뒤 다시 제품 원료로 쓸 수 있다면 오염도 제거하고 새로운 플라스틱 생산 수요도 크게 줄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연구는 플라스틱 쓰레기를 다시 산업화할 수 있는 돌파구를 찾는 데 도움이 될 만한 효소 후보들을 찾아낸 셈이다.
연구를 이끈 알렉세이 젤레즈니악(Aleksej Zelezniak) 교수는 ‘가디언’에 “전 세계 미생물군집의 플라스틱 분해 잠재력이 환경 플라스틱 오염과 강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여러 증거를 발견했다”고 말했다.
플라스틱 분해 미생물이 발견된 장소. Microbial Ecology 제공
플라스틱 70년간 누적되며 새 진화 경로가 된 듯
연구진은 예상치 못할 정도로 다양한 장소에 다양한 효소 미생물이 그렇게 많이 분포돼 있는 것에 놀랐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지난 70년 사이 플라스틱 생산량이 연간 200만톤에 3억8000만톤으로 급증하면서 미생물들이 주변 천지에 깔린 플라스틱을 먹고 사는 쪽으로 진화할 시간을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연구진은 우선 플라스틱 분해 능력이 이미 확인된 95가지 미생물 효소와 관련한 데이터를 수집했다. 그런 다음 전 세계 236개 지역에서 채취한 환경 DNA 표본에서 비슷한 효소를 찾았다.
분석 결과 바다 표본에서는 약 1만2천개의 새로운 효소가 발견됐다. 67개 지역의 3가지 서로 다른 수심에서 채취한 것들이다. 수심이 깊은 곳일수록 분해 효소가 더 많았다.
38개국 11개 지역의 169개 장소에서 채취한 토양 표본에서는 약 1만8천개의 플라스틱 분해 효소가 발견됐다. 토양에는 바다보다 프탈레이트가 포함된 플라스틱이 더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프탈레이트는 플라스틱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첨가하는 화학 물질이다. 연구진은 토양 표본에서 이 화학물질을 분해하는 효소가 더 많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플라스틱 쓰레기의 6분의 1이 플라스틱 병이다. 픽사베이
눈길을 끄는 건 새롭게 발견한 효소의 60% 가까이가 기존의 효소 부류와 잘 맞지 않는다는 점이다. 연구진은 “이는 이 효소들이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방식으로 플라스틱을 분해한다는 걸 시사한다”고 설명했다. 변화한 환경에 맞춰 새롭게 진화했을 수 있다는 얘기다.
플라스틱을 먹는 미생물이 있다는 것은 2016년 일본 쓰레기 매립장에서 처음 확인됐다. 당시 일본 과학자들이 발견한 미생물은 6주 안에 페트병을 완전히 분해했다.
과학자들은 이후 2018년 이 미생물이 어떤 진화 경로를 밟았는지 알아보기 위해 미생물 유전자를 조작하는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플라스틱병을 더 잘 분해하는 효소를 만드는 성과를 거뒀다. 이어 2020년엔 분해 속도가 6배 더 빠른 미생물을 만들어냈다.
프랑스 화학기업 카비오스는 지난해 플라스틱병을 몇시간만에 분해해버리는 또다른 돌연변이 효소를 만들었다. 카비오스는 5년 안에 이 효소를 플라스틱 재활용에 투입하기로 하고 펩시, 로레알 등과 제휴를 맺었다. 독일 과학자들은 폴리우레탄을 먹고 사는 박테리아를 발견했다.
샬머스공대 연구진은 이번에 새로 발견한 효소들을 대상으로 플라스틱 분해 특성과 속도를 시험할 계획이다. 젤레즈니악 교수는 “이를 통해 특정 폴리머(중합체) 유형에 맞는 표적 분해 기능을 갖고 있는 미생물 군집을 설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과학자들의 잇단 연구 성과가 산업 현장까지 이어질 경우 플라스틱 오염 문제 완화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물론 가장 좋은 방법은 플라스틱을 덜 쓰는 것이다.
플라스틱을 먹고 사는 미생물군집의 등장은 변화한 환경에 대한 적응의 결과이자, 오염된 환경이 빚어낸 부산물이기도 하다. 이 놀라운 자연의 반응은 순리일까 역리일까?
곽노필 선임기자
nop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