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NA 밀봉 장치 역할을 한 100여년 전 우표들. Forensic Science International
사라져버린 파일을 복구하는 포렌식 기술은 디지털만이 아니라 유전자에도 있다. 오래된 유물 속에 보존돼 있는 유전자를 통해 과거를 연구하는 고유전학이다. 고유전학 기법이 발달하면서 기록이 없는 선사시대의 생활상이 하나둘씩 드러나고 있다. 유전자엔 숨기거나 조작할 수 없는 진실이 담겨 있다.
스위스 법의학 유전학자들이 고유전학 기법으로 1차 세계대전 당시 우표에서 채취한 유전자를 분석해 100여년간 묻혀 있던 친자관계의 진실을 밝혀냈다.
국제학술지 ‘포렌식 사이언스 인터내셔널’(Forensic Science International) 1월호에 발표된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1887년에 태어난 한 사생아의 가족이다.
1885년 오스트리아 북부 농촌에 사는 한 대가족 집안의 청년 대장장이 사베르는 더 넓은 세상을 찾아 집을 떠났다. 한 가톨릭 유대인의 대장간에 일자리를 얻은 사베르는 주인의 딸 디나(17)와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안 디나의 아버지는 그를 내쫓았다.
사베르와 디나 두 사람의 기구한 운명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사베르가 떠나자 디나도 그를 찾아 집을 나왔다. 머물 곳이 없던 디나는 유대인 공장주인 론(30)의 집에 가정 도우미로 들어갔다. 디나에게 반한 론은 디나에게 접근했다. 이때가 1886년 9월이었다. 디나는 9개월 후 아이 렌을 낳았다. 렌은 유대교 의식과 함께 가톨릭 교회 세례를 받았다.
그 사이 경제 기반을 다진 사베르는 디나를 찾아 재회했고 둘은 1889년 2월 결혼했다. 사베르는 아이 렌(당시 한살 반)도 자신의 아이로 받아들였다. 이후 사베르와 디나는 아들 아를을 포함해 세 명의 자녀를 더 낳았다.
세월이 흘러 고향으로 돌아온 사베르는 공장을 차렸다. 의붓아들 렌이 공업학교를 졸업할 즈음 론과 사베르 사이에 렌의 진로를 둘러싸고 갈등이 빚어졌다.
론은 렌이 대학에 진학해 더 공부할 것을 바랬다. 반면 사베르는 렌에게는 대장장이가 더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렌은 결국 대장장이가 됐다.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렌과 이부형제 아를은 전장에 투입됐다.
둘은 다행히 살아남았다. 하지만 이후 오스트리아가 나치 치하에 들어가면서 유대인인 렌은 극심한 공포 속에서 지내야 했다. 렌은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유대인 가계라는 걸 비밀에 붙였다. 그는 임종을 맞아서야 자신이 유대인라는 걸 자식에게 털어놨다.
사베르와 디나의 가족 가계도. 회색은 타액 DNA 표본을 채취한 사람, 파란색은 우표에서 DNA를 회수한 사람. 동그라미는 여성, 네모는 남성이다. Forensic Science International
2017년 5월 스위스 취리히대 법의학 유전학자 코르둘라 하스(Cordula Haas) 교수에게 렌과 아를의 손자들이 찾아왔다. 이들은 자손들의 뺨에서 채취한 침을 묻힌 면봉을 하스 교수에게 건네며, 론이 렌의 친부인지 확인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계 혈통을 찾아낼 수 없었다. 하스 교수는 과거 이들이 보낸 엽서의 우표에 묻은 침에 그들의 DNA가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후손들은 1922년 론이 친구에게 보낸 엽서, 1차대전 때인 1917년과 그 이후 렌이 집으로 보낸 엽서, 1922년 아를이 출장 때 집으로 보낸 엽서를 가져왔다. 하스 교수는 사베르의 형제 요세프의 손자인 제프가 1988년 보낸 두개의 편지봉투도 확보했다
연구진은 렌이 보낸 엽서와 이복형제 아를이 보낸 엽서에 붙여져 있는 우표에서 각각 DNA를 채취했다.
우표에서 디엔에이를 검출할 수 있었던 건 침이 엽서에 단단히 밀착돼 갇히면서 외부 환경에 의해 변질되거나 오염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연구진은 우선 자외선 살균처리 등으로 우표 표면을 깨끗이 청소했다. 그런 다음 뜨거운 증기로 엽서에서 우표를 조심스럽게 떼냈다. 이어 우표 뒷면과 엽서 접착면을 면봉으로 문지른 뒤, 이 면봉에서 디엔에이를 추출하고 PCR(중합효소연쇄반응) 기기로 증폭해 분석에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연구진은 생존해 있는 렌의 97세 딸과 아를의 손자 3명의 침에서 추출한 디엔에이와 비교했다
왼쪽부터 론(1922), 렌(1918), 아를(1922)이 보낸 엽서. Forensic Science International
그 결과 이복형제로 여겼던 렌과 아를 두 사람의 성염색체(Y)가 같은 아버지 혈통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는 두 형제의 의 아버지가 동일인, 즉 두 사람이 친형제라는 걸 뜻한다. 렌은 유대인 론의 아들이 아니라 사베르의 아들이었다. 렌이 태어난 지 134년이 지나 비로소 친부의 진실이 밝혀진 순간이었다.
생전의 렌은 이런 사실을 모른 채, 자신을 부모 양쪽이 다 유대인인 ‘완전한 유대인’으로 알고 나치 치하에서 공포에 떨며 지내야 했다.
연구를 이끈 하스 교수는 IT미디어 <와이어드>에 렌의 자손들도 처음엔 깜짝 놀랐지만 나중엔 진실을 알게 된 것을 기뻐했다고 말했다. 하스 교수는 “만약 렌이 자신의 친부가 누구인지 알았다면 나치 치하에서 좀 더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비밀을 아는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당사자나 주변 인물들의 사생활을 침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드러난 진실로 인해 관련자들이 곤란한 처지에 놓일 수도 있다. 당사자가 죽었다고 해서 동의없이 밝혀도 되는지도 한번쯤 따져볼 문제다. 참고로 연구진은 이번 연구를 소개한 논문에서, 가족의 요청에 따라 당사자들의 이름을 모두 가명으로 처리했다.
하스 교수의 작업은 연구용이었지만 해외에선 유전자 분석을 통해 가족 역사를 찾아주는 유료 서비스 업체들도 생겨났다.
<와이어드>는 그러나 “이 서비스는 이용료가 비싸고 소중한 가족 유물을 훼손해야 하는 부담이 있는데다 유전자 검출에 성공하리라는 보장도 없어 기대만큼 반응을 얻고 있지는 못하다”고 전했다.
곽노필 선임기자
nop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