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속도도 노화의 정도를 판별하는 기준 가운데 하나다. 픽사베이
노화라고 하면 머리가 희끗희끗해지거나 얼굴에 주름살이 늘어나는 노년기를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실제
인체의 각 부분은 이보다 훨씬 일찍 정점을 찍고 노화 과정에 돌입한다. 뇌의 크기는 10대에, 근육량은 20대 중반에, 골밀도는 30살 무렵에 각각 정점을 찍는다.
걷는 속도도 노화의 척도 가운데 하나다. 몸이 노화하면 자연스레 걷는 속도가 떨어지고 보폭도 좁아진다. 미국 듀크대 과학자들은 40대의 느린 걸음과 뇌 부피 및 피질 두께 감소의 상관관계를 밝혀낸 바 있다.
영국 레스터대 연구진이 걸음 속도와 세포 노화의 상관관계를 밝혀낸 연구 결과를 국제학술지 ‘커뮤니케이션스 바이올로지’에 발표했다. 연구진에 따르면 중년 성인의 경우 평소 빠르게 걷는 사람이 느리게 걷는 사람보다 생물학적 나이가 16년 더 젊다.
연구진은 영국 바이오뱅크에 등록돼 있는 40만5981명의 중년 성인(평균 56.5살)의 유전자 데이터와 이들의 손목 착용 가속도계 측정 자료, 스스로 기록한 보행 습관을 비교 분석했다. 연구에 활용한 유전자 데이터는 생물학적 노화의 지표로 쓰이는 백혈구 텔로미어의 길이(LTL)다.
염색체의 양끝부분에 있는 텔로미어(흰색). 위키미디어 코먼스
텔로미어는 염색체 끝부분에 있는 수천개의 반복되는 특정 염기서열(TTAGGG)을 말한다. 여기엔 유전자 코드가 없다. 대신 이 염기들은 염색체가 손상되지 않도록 보호해주는 역할을 한다. 신발 끈의 실이 풀어지지 않도록 끝 부분에 씌운 플라스틱 덮개에 비유할 수 있다. 오래 사용하면 신발끈 덮개가 헤지듯 텔로미어도 세포가 분열할수록 짧아지기 때문에 생물학적 나이를 판단하는 지표로 쓰인다.
분석 결과 빠르게 걷는 사람들은 텔로미어의 길이가 더 길었다. 전체적인 신체 활동량이나 다른 신체활동과의 상관성은 확인되지 않았다. 여기서 빠른 걸음은 시속 4마일(6.4km) 이상, 느린 걸음은 시속 3마일(4.8㎞) 미만을 뜻한다. 그 사이는 보통 걸음이다.
연구진의 일원인 페디 뎀프시 박사는 “걷는 속도와 신체 활동량, 그리고 텔로미어 길이의 상관성에 대한 이전의 연구들에선 결과가 일치하지 않았다”며 “이번 연구는 유전자 데이터를 통해 텔로미어 길이와 보행 속도 사이에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음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그는 “평소의 보행 속도는 만성 질환이나 노인성 질환 위험이 더 큰 사람을 식별하는 간단한 방법이 될 수 있다”며 전체적인 걸음 수를 늘리는 것 외에 시간당 걸음 수를 늘리는 것, 즉 빨리 걷는 것을 이런 위험을 줄이는 예방 또는 치료법으로 채택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레스터대 연구진은 이전 연구에서 같은 바이오뱅크 데이터를 이용해 매일 10분씩만 빠르게 걸어도 기대수명을 3년 연장할 수 있으며, 빠르게 걷는 사람은 느리게 걷는 사람보다 기대 수명이 최대 20년 더 길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연구를 이끈 톰 예이츠 교수는 “보행 속도가 강력한 건강 지표라는 건 이전 연구에서도 드러난 사실이지만 이번 연구에서는 사람들의 게놈 정보를 통해 더 빠른 걸음이 실제로 더 젊은 생물학적 나이로 이끌 수 있음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곽노필 선임기자
nop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