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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파스퇴르’ 이호왕 교수 별세…한탄바이러스 발견 “우연은 …”

등록 2022-07-06 07:00수정 2022-07-06 09:31

한탄바이러스 최초 발견해 ‘한국 파스퇴르’ 불려
“우연은 노력하는 자에게 오는 선물"
신약 1호 ‘한타백신’ 개발…미 ‘이호왕 연사’ 제정
이호왕 고려대 명예교수.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제공
이호왕 고려대 명예교수.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제공

5일 타계한 이호왕(94) 고려대 명예교수는 ‘한탄바이러스’를 세계 최초로 발견하고 백신까지 개발해 국내 신약 1호로 등록한 바이러스 연구의 대가로 ‘한국의 파스퇴르’로 불린다.

이호왕(이하 호칭 생략)은 1976년 고려대 의대 연구팀을 이끌고 신증후군출혈열(유행성출혈열) 원인을 찾던 끝에 한탄바이러스(속명(屬名) 한타바이러스)를 세계 최초로 발견했으며, 이어 1988년에는 한탄바이러스 예방백신을 개발했다. 유행성출혈열은 1941년 만주의 일본 관동군 1만2천여명이 감염돼 2천여명이 사망하고,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 3200여명이 감염돼 수백명이 사망한, 치명률 10%의 제3급 법정 감염병이다. 국내의 경우 지난해에만 270명의 환자가 발생했으며, 세계적으로 해마다 15만여명이 감염되고 있다.

2007년 10월18일 오후 경기도 포천시 영북면 자일리에서 열린 이호왕의 기념비 제막식에서 이호왕(왼쪽 두번째)과 박윤국 포천시장이 기념비 헌시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2007년 10월18일 오후 경기도 포천시 영북면 자일리에서 열린 이호왕의 기념비 제막식에서 이호왕(왼쪽 두번째)과 박윤국 포천시장이 기념비 헌시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우연은 노력하는 자에게 오는 선물"

이호왕은 2011년 <과학과 기술> 인터뷰에서 “과학자에게 우연은 없다. 우연은 노력하는 자에게 오는 선물"이라고 말했다. 이호왕은 한타바이러스를 발견하기까지 여러 차례의 ‘행운’이 따랐다고 2019년 제자 송진원 고려대 교수(대한바이러스학회장)와 함께 저술한 <한타바이러스학>(대한민국학술원 학술연구총서) 등에서 밝혀왔다.

이호왕의 고향은 함경남도 신흥이다. 1928년 4남3녀 중 3남으로 태어나 중학교 때 육상선수를 하던 그는 시골 한의사의 외동딸인 어머니의 권유에 따라 서울대 의대로 진학한다. 하지만 입학과 동시에 터진 한국전쟁으로 부모와는 생이별을 해야 했다.

부산의 ’전시연합대학’에서 스승인 기용숙 교수를 만나 미생물학으로 연구 방향을 잡은 이호왕에게 서울대 의대 미생물학교실 조교 시절 첫번째 행운이 찾아왔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1953년에 한·미원자력협정을 맺으면서 연구용원자로 1기 제공과 국내 과학자들의 미국 연수를 요구했다. 그 결과 이호왕은 서울대 의대 조교 8명과 함께 미국 미네소타대학에 유학을 가게 됐다.

시버튼 교수 밑에서 석사 과정을 시작한 그는 일본뇌염 바이러스를 세계 최초로 조직배양해 논문이 <실험생리의학협회지>에 실렸다. 연수 기간이 끝나 귀국하려 준비하던 차에 이호왕은 9명의 한국인 과학자 가운데 박사 과정 진학 기회를 얻는 2명에 뽑히는 행운을 또다시 얻었다. 이번에는 쉬러 교수 지도 아래 원숭이 조직을 이용해 일본뇌염 바이러스의 면역 기전을 밝히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논문은 미국 <면역학회지>에 실렸고, 이호왕은 국내외에서 유망한 연구자로 주목받았다.

한탄강 인근의 경기도 동두천시 송내리 논둑에서 이호왕 연구팀 연구원이 등줄쥐를 채집하고 있다. 출처=‘한타바이러스학’
한탄강 인근의 경기도 동두천시 송내리 논둑에서 이호왕 연구팀 연구원이 등줄쥐를 채집하고 있다. 출처=‘한타바이러스학’

목숨을 건 연구에도 꼭꼭 숨은 바이러스

귀국 뒤에도 일본뇌염 연구에 몰두한 그는 일본인도 받지 못한 미국국립보건원(NIH) 연구비를 신청해 6만달러를 지원받았다. 하지만 1966년 일본에서 일본뇌염 예방백신이 개발되면서 연구 동력이 떨어진 데다 미국 지원마저 끊길 처지에 놓였다. 1967년 세계 뇌염 연구 현황을 시찰할 기회를 얻어 미국 월터리드육군병원을 방문했을 때 미네소타대학원 후배인 부셔 대령한테서 유행성출열혈로 연구 방향을 바꿔보라는 권고를 받았다.

이호왕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 일본 도쿄의 미육군 연구개발부에 연구계획서를 제출해 1970년부터 3년 동안 4만달러의 연구비를 받았다. 이후 연구비는 20만달러까지 늘어났다. 하지만 목숨을 걸고 연구에 매진했음에도 유행성출혈열 바이러스를 찾아내지 못했다. 들쥐 서식지와 발병지역이 일치해 들쥐를 매개체로 추정한 연구팀은 휴전선 인근 지역에서 쥐를 잡으러 다녔다. 한밤중에 손전등을 깜박거리며 들판을 돌아다니다 무장간첩으로 오인돼 경고사격을 받고 군부대에 체포되기도 했다. 이호왕을 뺀 연구원 7명이 모두 출혈열에 감염됐으며 일부는 사경을 헤매기도 했다.

서울 마포구 남아현아파트 지하상가 입구. 이곳 상가에서 잡은 집쥐에서 ’서울바이러스’가 발견됐다. 출처=’한타바이러스학’
서울 마포구 남아현아파트 지하상가 입구. 이곳 상가에서 잡은 집쥐에서 ’서울바이러스’가 발견됐다. 출처=’한타바이러스학’

한 통의 편지가 가져다 준 행운

7년 동안 들쥐를 연구했음에도 바이러스를 발견하지 못한데다 연구를 지원하던 도쿄 미육군 연구개발부가 1976년 폐쇄되면서 연구비 지급마저 중단될 위기에 놓였다. 이호왕을 비롯해 연구팀이 낙담에 빠져 있을 때 미국에서 소포가 하나 전달됐다. 미국에서 출혈열 연구를 하다 국립보건원에서 은퇴한 벨리슨 박사가 자신의 연구결과를 담은 책자였다. 젤리슨은 이호왕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출혈열의 원인이 들쥐의 폐에 기생하는 곰팡이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이호왕은 곰팡이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폐’라는 단어에 전기충격을 받은 것처럼 전율을 느꼈다. 출혈열에 걸린 환자들에서 병변이 발견된 곳은 간장, 콩팥, 비장, 심장, 뇌 등이어서 폐에는 주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연구팀은 1975년 10월 등줄쥐 2천∼3천마리를 잡아 연구한 끝에 11마리에서 바이러스 정체를 밝혀냈다. 모두 등줄쥐 폐에서 얻은 것이다. 연구팀은 반년 동안 확인 실험을 한 끝에 1976년 유행성출혈열 병원체인 ‘한탄바이러스’(Hantaan virus)를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바이러스가 휴전선 인근 한탄강이 흐르는 동두천시 송내리에서 채집한 들쥐에서 발견됐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호왕은 자신의 아호도 ‘한탄’으로 지었다. 이호왕은 “한탄에 a자가 두 개 들어간 것은 그래야 미국이나 영국 사람들이 정확하게 한탄이라고 발음했기 때문”이라고 회고했다.

1979년에는 서울 마포구의 한 아파트 경비원이 집쥐를 잡은 뒤 병원에 입원했다는 얘기를 듣고 아파트 지하상가에서 쥐를 잡아 확인한 결과 새로운 바이러스가 발견됐다. 한탄바이러스와는 성질이 달라 ‘서울바이러스’라는 새 이름을 지어주었다. 한국인이 한국에서 발견한 새로운 바이러스임이 이름에 새겨진 것이다.

유행성출혈열 예방백신 한타박스. 녹십자 제공
유행성출혈열 예방백신 한타박스. 녹십자 제공

국내 신약 1호 ‘한타백신’ 개발

이호왕은 일본뇌염 백신 개발을 일본인한테 선수를 뺏앗긴 뼈아픈 기억에 바로 유행성출혈열 백신 개발 연구에 돌입했다. 하지만 생백신은 정부의 허가 문제로 포기해야 했고, 사백신 개발도 연구비 확보가 어려웠다. 바이러스 발견에 막대한 지원을 해줬던 미국도 백신 개발마저 빼앗길 수는 없다는 분위기였다. 이호왕은 이번에는 세계보건기구(WHO)와 국내 녹십자사한테서 연구비를 지원받는 행운을 얻었다.

연구팀은 한탄바이러스가 태어난 지 하루가 지나지 않은 흰쥐의 뇌조직에서만 대량으로 증식한다는 사실을 발견해, 이를 바탕으로 효과가 뛰어난 예방백신을 개발했다. 1988년 11월의 일로 바이러스 발견 12년 만이다. 백신의 첫 접종자는 이호왕이었다. 한달 뒤에 연구팀이, 그 뒤에는 녹십자사 사장 등이 접종을 했다. 모두에게서 항체가 발견됐지만 시판 허가를 받기에는 미흡한 임상시험이었다.

또 한번의 뜻밖의 행운이 찾아왔다. 골프장을 다녀온 한 신문기자가 출혈열에 걸려 사경을 헤맨다는 기사가 나온 뒤 골프장 직원들과 골프 애호가들이 백신을 맞으려 몰려들었다. 자연스럽게 2천여명의 임상시험이 진행됐고, 1990년 9월 ’한타박스’라는 이름으로 시중에 출시됐다. ’국내 신약 제1호’다.

한탄바이러스에 감염된 베로 세포의 형광현미경 사진. 출처=’한타바이러스학’
한탄바이러스에 감염된 베로 세포의 형광현미경 사진. 출처=’한타바이러스학’

‘한타비리대’라는 새로운 ‘과’ 신설

2019년 2월 국제바이러스분류위원회(ICTV)는 새로운 바이러스학 분류와 이름 발표하면서 한탄바이러스를 오소한타바이러스속(Orthohantavirus Genus), 한타비리대과(Hantaviridae Family)로 명명했다. 위원회는 “한탄바이러스와 유사한 바이러스 30여개가 최근 세계 여러 곳의 동물과 식물, 어류 등에서 발견됐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밝혔다. 한탄바이러스가 역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새로운 바이러스임을 인정한 것이다. 이호왕은 “1930년대부터 1975년까지 40여년 동안 수많은 학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발견하지 못했고, 우리 연구팀이 환자혈청을 이용한 새로운 방법으로 1976년 발견한 바이러스가 역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새로운 바이러스였다는 놀라운 사실을, 내 나이 90살에 이르러 처음 알게 돼 천만다행이다”라고 술회했다.

1976년 한탄바이러스가 처음 발견된 뒤 유사한 바이러스가 7개 발견돼 10년 만에 새로운 속(한타바이러스)이 생기고, 이후에도 바이러스 발견이 계속돼 37개까지 늘어나면서 새로운 과(한타비리대)까지 신설된 것이다.

2009년 10월29일 고려대 의대 앞 광장에 세워진 이호왕 흉상 제막 기념행사에 참석해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2009년 10월29일 고려대 의대 앞 광장에 세워진 이호왕 흉상 제막 기념행사에 참석해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미국 바이러스학회 ‘이호왕 연사’ 제정

미국 바이러스학회는 바이러스학 연구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과학자 등의 이름을 따서 연사를 초청한다. 1996년 열린 제15차 바이러스학회 때부터 ‘이호왕 연사’(The Ho-Wang Lee Lecturer)가 제정됐다. 국내에서는 대한바이러스학회가 1997년부터 ’한탄상’을 제정해 해마다 연구 업적이 우수한 기초의학자에게 상을 주고 있다.

이호왕은 1979년에는 북유럽에서 발생하던 유행성 신장병도 한타바이러스에 의해 일어난다는 사실을 밝혀 유명 저널 <랜싯>에 발표했으며, 1981년에는 한탄바이러스 세포 배양 연구로 <사이언스>에 논문을 게재했다. 1982년에는 서울바이러스를 발견해 <감염병학회지>에 발표를 했으며, 1985년에는 한탄바이러스의 항원성과 유전학적 연구로 또다시 <사이언스>에 논문을 실었다.

이호왕은 1979년에는 미국 최고 시민 공로 훈장을 받았으며, 1980년에는 대한민국학술원상(저작상)을, 1983년에는 미국 육군성연구업적상을 수상했다. 1987년에는 인촌상(학술부문), 1992년에는 호암상(의학부문), 1995년에는 노벨 생리의학상 다음으로 평가되는 타이의 프린스 마히돌상을 받았다. 또 과학기술훈장 창조장(2002년)과 서재필 의학상(2009년)도 수상했다. 2003년에는 과학기술부와 한국과학문화재단이 제정한 과학기술인 명예의전당에 생존인물로는 처음으로 등재됐다. 2021년엔 노벨 생리의학상 후보 물망에 올랐다.

이호왕은 미국 유학 시절 역시 서울대 병원에서 유학 와 있던 김은숙씨를 시장에서 만난 인연으로 결혼해 두 아들을 뒀다. 이성일 성균관대 시스템공학과 교수가 장남이다.

이근영 기자 ky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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