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피의 회춘 효과라고 알려진 것이 사실은 젊은 피 때문이 아니라 젊은 피가 추가되면서 늙은 피의 노화 기능이 희석된 데 따른 것 아니냐는 의문이 이번 연구의 출발점이었다. 픽사베이
노화를 연구하는 과학자들 사이에서 2010년대 이후 크게 주목받은 것 가운데 하나가 젊은 피의 회춘 효과다. 당시 동물실험을 통해 이를 확인하는 연구들이 여럿 발표됐다.
예컨대 미국 피츠버그대와 스페인 발렌시아대 연구진은 지난해와 올해 각각 젊은 쥐의 혈액에 있는 세포 밖 소포체의 회춘 효과를 확인하는 실험 결과를 발표했다. 젊은 피의 혈장이나 줄기세포에서 그 원인을 찾는 연구도 있었다. 2005년 115살로 사망한 네덜란드의 한 여성 혈액에선 줄기세포가 단 2개만 남아 있었다는 연구 결과도 있었다. 이에 따라 젊은 피의 어떤 성분이 이런 효과를 내는지를 규명하는 후속 연구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젊은 피 요법은 면역반응 같은 부작용 문제와 함께 회춘을 위한 수혈이 과연 온당하느냐는 윤리적 논란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거꾸로 늙은 피를 주입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고려대 의대와 미국 버클리캘리포니아대(UC버클리) 공동연구진이 젊은 쥐에게 늙은 쥐의 피를 수혈하는 실험을 한 결과 젊은 쥐의 노화 속도가 빨라진 것으로 나타났다고 7월29일 국제학술지 ‘네이처 대사’ 온라인에 발표했다.
젊은 피를 주입했을 때와 정반대 효과가 나타난 것이다. 이는 세포 노화가 단순히 오랫동안 쓰면서 닳아 해지는 마모 현상이 아님을 시사한다.
그동안 젊은 쥐와 늙은 쥐 사이의 상호 수혈 실험에서 늙은 피를 수혈받은 젊은 쥐의 건강이 악화한다는 건 이미 확인된 사실이다. 그러나 연구의 초점은 주로 늙은 쥐의 회춘 효과에 맞춰져 있었고, 젊은 쥐에게서 일어나는 효과에 대해서는 상세한 분석이 이뤄지지 않았다.
연구진은 이번 실험에서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살펴봤다. 논문 제1저자인 전옥희 고려대 의대 교수(의생명과학)에 따르면 이번 연구의 출발점은 “그동안 젊은 피의 회춘 효과라고 알려진 것이 사실은 젊은 피 때문이 아니라 젊은 피가 추가되면서 늙은 피의 노화 기능이 희석된 데 따른 것 아니냐는 의문”이었다.
젊은 쥐에 주입한 늙은 피의 노화 효과는 간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픽사베이
연구진은 생후 석달 된 젊은 쥐에게 생후 2년이 거의 다 된 늙은 쥐의 피를 수혈했다.
2주가 지나자 젊은 쥐의 몸에서 노화 세포 수가 크게 늘어났다. 간과 신장 등 여러 기관의 세포가 손상을 입고 세포 분열을 멈췄다. 그렇다고 죽은 것도 아닌 일종의 좀비세포가 됐다. 이는 노화가 시작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특히 간과 뇌에서 이런 현상이 두드러졌다.
젊은 쥐의 근력도 늙은 쥐의 피를 수혈한 뒤 약해졌다. 나이를 많이 먹지 않았는데도 세포 노화가 진행된 것이다. 연구진은 “전체적으로 늙은 피 주입으로 인한 부정적 효과의 정도가 젊은 피 주입에서 보였던 긍정적 효과와 같거나 그 이상이었다”고 밝혔다.
원인이 뭘까? 연구진은 혈액 내 노화 세포에서 분비되는 인자들이 혈액 속을 순환하면서 젊은 쥐의 세포와 조직을 노화시키는 ‘노화 전이’를 일으키는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암 유발 물질이 혈액을 타고 전신으로 퍼지면서 암을 전이시키는 것과 같은 이치다.
노화 세포는 증식을 멈추는 대신 염증성 물질과 단백질 분해 효소 등을 분비한다. 이를 노화연관 분비표현형(SASP)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번 연구에서는 구체적으로 노화 세포에서 분비되는 어떤 물질이 노화 전이를 일으키는지는 규명하지 못했다.
나이 많은 쥐의 혈액 속에서 순환하는 각종 인자들이 어린 쥐의 혈관에 들어가면 어린 쥐의 근력 감소 등 노화가 가속화했다. 반대로 나이 많은 쥐에 노화세포를 없애는 '세놀리틱 물질' 주입하면 노화로 인한 증상을 막는 데 도움이 됐다. 전옥희 교수 제공
전 교수는 “이번 연구는 노화 과정이 단순히 생물학적 시간의 흐름에 의한 것만이 아니라 노화 전이를 통해 가속될 수 있다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그동안의 노화 치료 연구는 노화 ‘세포’ 자체를 처리하는 데 초점을 맞췄으나, 이번 연구는 노화 ‘전이’라는 메카니즘을 다룬다는 점에서 새로운 개념의 접근법이라는 것이다.
공동연구자인 콘보이 교수는 과학전문지 ‘뉴사이언티스트’에 “세포 노화는 노화 과정의 일부일 뿐”이라며 “이번 연구는 그동안의 임상시험에서 노화세포를 제거해주는 약물(세놀리틱)이 기대했던 것보다 덜 성공적이었던 이유를 설명해줌으로써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말했다.
전 교수는 “지금까지 노화 세포를 표적으로 삼아 개발한 세놀리틱 약물이 많은 임상실험에서 실패했다”며 “이번 연구에서 세포가 아닌 세포 유래 물질을 매개로 노화 전이가 다양한 조직에서 일어난 과정이 밝혀진 만큼 세놀리틱 물질의 개발 초점이 달라져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는 노화 질환 치료에서 혈액 내의 노화 유발 인자를 제거하는 약물 개발이라는 새로운 목표를 제시해준다. 전옥희 교수는 “다음 연구 과제는 구체적으로 노화 전이를 일으키는 물질이 무엇인지를 알아내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곽노필 선임기자
nop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