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원 중 인간의 언어와 가장 비슷한 소리를 내는 건 나무에 사는 오랑우탄이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언어는 인간 진화의 최대 수수께끼 가운데 하나다. 인간의 언어가 지금처럼 다양한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은 모음과 자음이 여러 방식으로 결합하기 때문이다. 모음은 성대를 울리는 유성음, 자음은 성대를 울리지 않는 무성음으로 이뤄져 있다. ㅂ, ㅍ, ㄷ, ㅅ, ㅈ 같은 자음들은 성대와 상관없이 입술과 혀, 턱을 움직여 내는 소리다.
대부분의 영장류는 거의 모음으로만 이뤄진 울음소리를 낸다. 반면 인간의 가까운 친척이라 할 유인원은 자음과 유사한 소리를 낸다. 동남아시아의 오랑우탄과 아프리카의 고릴라, 침팬지, 보노보가 사람과(호미니드)에 속하는 대형 유인원들이다.
그렇다면 유인원의 울음소리에서 인간에게 독특한 자음 발성의 기원을 찾을 수 있을까?
인간의 대표적인 특성 가운데 하나인
직립보행이 나무에서 내려오기 전에 진화했다는 주장이 나온 데 이어, 이번엔 또 다른 특성인 언어의 기원을 땅으로 내려오기 전 수목 생활에서 찾은 연구 결과가 나왔다.
그동안의 연구들은 주로 영장류와 유인원, 인간의 후두 구조 차이에 초점을 맞췄다. 지난 18년 동안 인도네시아 보루네오와 수마트라의 야생 오랑우탄을 연구해 온 영국 워릭대 아드리아노 라메이라 교수(진화심리학)는 유인원의 생활 환경 차이에 주목했다.
그는 유인원들의 울음소리에 자음이 얼마나 섞여 있는지에 관한 기존 연구들을 분석한 결과, 자음의 탄생은 수목 생활과 관련돼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국제학술지 ‘인지과학동향’(Trends in Cognitive Sciences)에 발표했다. 이는 인류의 조상이 침팬지와 분리된 이후에도 나무에서 생활한 기간이 생각보다 더 길었다는 걸 시사한다.
수목 생활을 하는 오랑우탄은 한쪽 팔은 나무를 잡는 데 써야 하기 때문에 이를 대신할 ‘제5의 팔다리’로 입술과 혀, 턱뼈를 사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pexels 제공
입과 턱이 ‘제5의 팔다리’ 역할
그는 보루네오와 수마트라의 열대삼림에 사는 오랑우탄의 행동 양태에서 해답의 실마리를 찾았다. 유인원 중에서도 숲속 수목생활을 하는 오랑우탄은 지상에서 생활하는 고릴라와 침팬지, 보노보다 더 다양하고 더 많은 자음 소리를 냈다.
라메이라 교수는 오랑우탄은 주로 둥지를 짓거나 새끼와 소통하거나 경보를 울릴 때 자음 발성을 내며, 이는 오랑우탄 개체군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특징이라고 밝혔다. 반면 고릴라나 침팬지는 특정 자음과 비슷한 울음소리를 내기는 하지만 일부 집단에서만 통용될 뿐이었다.
라메이라 교수는 오랑우탄이 이렇게 다양한 소리를 내도록 진화하는 데는 나무에서의 생활이 큰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추정했다.
유인원들은 견과류처럼 안쪽에 숨겨져 있는 음식을 추출하는 데 능숙한 기술을 갖고 있다. 지상 생활을 하는 고릴라나 침팬지는 자유롭게 두 팔로 도구를 사용한다. 그러나 수목 생활을 하는 오랑우탄은 적어도 팔다리 가운데 일부를 나무 위에서 몸의 균형을 잡는 데 써야 한다. 따라서 이를 보완해줄 뭔가가 필요하다.
그는 오랑우탄이 입술과 혀, 턱의 움직임을 세밀하게 제어하는 기술을 개발함으로써 그 돌파구를 찾은 것으로 해석했다. 예컨대 오랑우탄은 입술만으로 오렌지 껍질을 벗길 수 있다. 동물원에서 사람이 펜을 건네면 오랑우탄은 보통 손이 아닌 입으로 펜을 문다. 오랑우탄에게 ‘제5의 팔다리’ 역할을 하는 이 기능이 입술과 혀, 턱뼈를 움직여 내는 자음(무성음)을 탄생시키는 기반이 됐다는 것이다.
오랑우탄은 새끼와 소통할 때 자음 발성을 많이 낸다. pexels 제공
인간 언어의 기원에 새로운 통찰
연구진은 이로 미뤄볼 때 초기 인류 역시 나무에서 내려오기 전, 열악해진 수목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이런 기술을 터득해 자음 발성을 낼 수 있게 됐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초기 인류가 기후변화로 숲이 줄어들자 먹을 것을 찾아 나무에서 내려오면서 직립보행을 하기 시작했다는 사바나가설과는 배치된다. 그러나 최근 나무가 적어지자 열매가 달린 나무를 더 샅샅이 탐색하기 위해 직립보행 기술을 익혔다는 미국과 영국 공동연구진의 최근 연구와는 일맥상통한다.
먹이 구하기와 음성 소통 사이의 연관성은 몸집이 더 작은 영장류인 원숭이한테는 적용되진 않는다. 원숭이들은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작은 몸집과 긴 꼬리를 이용해 나뭇가지 사이를 안정적으로 이동하면서 먹이를 구할 수 있다.
연구에 참여하지 않은 영국 리버풀존무어스대의 서지 위츠(Serge Wich) 교수(영장류생태학)는 ‘뉴사이언티스트’ 인터뷰에서 “어느 정도 통찰력을 줄 수 있는 가설”이라며 “둘 사이에 연관성이 있다 하더라도 다른 요인도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이 인과관계를 뜻하는 건 아니다”라고 논평했다.
곽노필 선임기자
nop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