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1. 1961년 5월25일 미 의회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유인 달탐사를 제안하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왼쪽)과 “우리는 달에 가기로 결정했다”는 말로 유명한 1962년 9월12일 라이스대학에서의 연설 모습(오른쪽). 위키미디어 코먼스
첫 인공위성을 소련의 스푸트니크 1호에 내준 후 미국은 1958년부터 머큐리 계획 (Project Mercury)을 시작하면서, 유인 우주비행은 소련보다 앞서겠다는 목표을 세웠다. 그러나 첫 유인 우주비행도 지구를 1바퀴 돌고 돌아온 소련의 보스토크 1호에게 내줬다. 미국은 소련의 보스토크 1호 성공 후 23일이 지난 1961년 5월 5일에 첫 유인 우주비행에 성공했지만, 단순히 높은 고도의 우주에 올라갔다가 바로 내려오는 한 단계 낮은 수준의 탄도 우주비행이었다. 머큐리 계획의 2번째 유인 우주비행도 탄도 우주비행이었고, 이후 1963년까지 이어진 4번의 머큐리 유인 우주비행은 지구 주위를 도는 궤도 우주비행이었다.[1] 인류 최초의 유인 우주비행을 성공한 소련의 보스토크 프로그램은 머큐리 계획보다 조금 더 일찍 시작해 비슷한 기간 동안 진행되었고, 총 6번의 보스토크 유인 우주비행도 모두 궤도 우주비행이었다. 프로그램 마지막 우주선인 보스토크 6호에는 최초의 여자 우주인 발렌티나 테레시코바(Валентина Владимировна Терешкова)가 탑승했다.[2]
인류 첫 유인 우주비행을 소련에 내준 미국은 새로운 목표가 필요했다. 미국 첫 유인 우주비행 후 20일이 지난 1961년 5월25일 당시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는 미 의회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유인 달탐사를 제안했고 1960년대가 지나기 전에 달에 사람을 보내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그해 나사(미 항공우주국)는 유인 달탐사 프로젝트인 아폴로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1962년 9월12일 라이스대학에서 케네디는 ‘‘우리는 달에 가기로 결정했다”(We choose to go to the Moon)는 말로 유명한 연설을 했다.
미국의 제미니와 소련의 보스호트의 대결
아폴로 프로그램으로 유인 달탐사를 목표로 세운 미국은 제미니 계획(Project Gemini)이라는 새로운 유인 우주비행 계획을 시작했다. 라틴어 단어 ‘제미니’가 쌍둥이를 의미하는 것과 같이 2명의 우주인이 탑승하는 유인 우주비행 계획이었다. 이 계획의 목적은 유인 달탐사에 필요한 기술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달에 다녀오는 데 필요한 긴 시간 동안 유인 우주비행, 유인 달 탐사과정에서 필요한 우주선 사이의 도킹, 우주유영과 같은 우주선 밖에서의 우주인 활동, 그리고 지구 대기권 진입을 통해 미리 정해진 위치로의 귀환 등이 주요 목표였다. 1964년과 1965년에 발사된 제미니 1호와 2호는 무인 탄도 우주비행을 수행했고, 1965년 3월23일 발사된 제미니 3호부터 1966년 11월15일 발사된 제미니 12호까지 20개월 동안 총 10번의 유인 궤도 우주비행을 수행했다.
1965년 6월3일 발사된 제미니 4호에 탑승했던 두 우주인 중의 한 명인 에드 화이트(Ed White)는 발사 당일 우주선 밖으로 나가 미국인 첫 우주유영을 수행했다. 제미니 6호는 두 우주선이 결합하는 도킹을 수행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제미니 6호와 도킹할 예정이었던 아제나 표적기(Agena Target Vehicle)를 발사하는 데 실패하면서, 제미니 6호의 발사는 연기됐다. 제미니 6호의 도킹 실험은 도킹 장치가 없는 제미니 7호와의 랑데부 실험으로 대체됐다. 무인 우주선과의 도킹은 1966년 3월16일 발사된 제미니 8호가 처음 성공했다. 그러나 도킹 후 우주선이 회전하는 비상상황이 발생했고 선장 닐 암스트롱은 재진입용 역추진 로켓을 사용해 문제를 해결하고 아제나 표적기와 분리했다. 이후 우주유영을 포함한 제미니 8호의 나머지 임무는 모두 취소되었고 일정을 앞당겨 대기권에 재진입해 일본 오키나와 동쪽 800km 해상에 무사히 착수했다.
그림 2.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제미니 4호 에드 화이트의 미국 첫 우주유영, 미국의 첫 우주선 랑데부 때 제미니 6A호에서 바라본 제미니 7호(제미니 6호는 발사가 연기된 후 이름이 제미니 6A호로 변경됐다), 긴급상황을 해결하고 계획보다 일찍 귀환해 일본 오키나와 동쪽 800km 해상에 착수한 제미니 8호의 우주인 데이비드 스코트(왼쪽)과 닐 암스트롱(오른쪽), 최초 우주선 도킹 때 제미니 8호에서 본 아제나 표적기의 모습.
소련 추월을 진두지휘한 나사 국장 제임스 웹
소련도 보스토크 프로그램에 이어 다인승 유인 우주비행 계획인 보스호트 프로그램을 1964년과 1965년 사이에 수행했다. 첫 다인승 우주선 우주비행은 소련의 차지였다. 미국의 첫 2인승 유인 우주선이었던 제미니 3호가 1965년 3월23일 발사됐던 반면, 우주인 3명을 태운 보스호트 1호는 이보다 5개월10일 이른 1964년 10월12일에 발사됐다. 보스호트 우주선은 보스토크 우주선을 기반으로 원래 2인승으로 개발했지만, 최종 탑승자 선정에서의 우여곡절 끝에 엔지니어와 의사를 포함한 총 3명의 우주인이 탑승했다. 우주선 내의 공간 부족과 적재량 초과로 우주복을 착용하지 않고 다이어트까지 한 상태로 우주비행을 했다.[3]
5개월 후인 1965년 3월18일에 발사된 인류 2번째 다인승 유인 우주선 보스호트 2호에는 원래대로 2명이 우주복을 입고 탑승했다. 보스호트 2호 탑승 우주인중의 한 명인 알렉세이 레오노프는 우주선 밖으로 나가 인류 최초로 우주유영을 수행했다. 제미니 4호의 에드 화이트가 수행한 미국의 첫 우주유영보다 2개월15일 이른 우주유영이었다.
4번의 보스호트 유인 우주선이 더 계획되어 있었지만, 보스호트 3호의 준비가 지연되는 동안 미국의 제미니 계획이 보스호트 프로그램에서 계획했던 일들을 먼저 달성하면서 이후의 보스호트 우주선 발사 계획은 취소됐다. 보스호트 1호가 귀환한 다음 날 우주비행 프로그램 지원에 적극적이었던 니키타 흐루쇼프 제1서기가 축출되고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제1서기를 비롯한 삼두 체제로 소련의 지도부가 바뀌는 정치적 변화가 있었다. 보스호트 2호 발사 이후 소련은 2년이 넘게 유인 우주선을 발사하지 않다가 미국이 제미니 계획을 마친 후 약 5개월이 지난 1967년 4월23일에 소유즈 1호를 발사하면서 유인 우주비행을 재개했다. 하지만 귀환하던 중 낙하산이 펴지지 않아 추락하는 바람에 탑승했던 우주인 블라디미르 코마로프는 사망했다. 우주비행에서 우주인이 사망한 첫 사고였다. 코마로프는 보스호트 1호에 탑승했던 3명의 우주인중의 1명이었다.
다인승 유인 우주비행 초기에는 미국이 소련에 밀렸으나, 1965년 3월 제미니 3호 발사부터 1966년 11월 제미니 12호 발사까지 훨씬 더 많은 유인 우주선을 발사해 유인 달탐사 관련 시험을 수행하면서 미국이 소련을 따라잡고 앞서가기 시작했다. 당시 나사를 이끌었던 사람은 제임스 웹(James Edwin Webb)으로, 국무부 차관을 지냈던 관료 출신이었다. 과학자 출신이 아님에도 그의 이름은 2021년 12월25일에 발사돼 요즘 왕성한 관측활동을 하고 있는 ‘제임스 웹 우주 망원경’(James Webb Space Telescope) 이름에 쓰였다.
그림 3. 달 궤도선과 달 착륙선이 되기 위해 필요한 추가 속도(또는 속도증분). 지구 저궤도(250km상공)에서 달전이궤도로 진입(trans-lunar insertion)하려면 초속 3.1km의 추가 속도가 필요하다.(하늘색) 달전이궤도에서 달 저궤도(100km상공)에 진입하려면 적어도 초속 0.82km를 감속해야 한다.(연보라색) 달전이궤도에서 달에 착륙하려면 달의 중력 탈출속도인 초속 2.38km 이상을 감속해야 한다.(주황색)
무인 달 탐사…궤도선보다 착륙선이 먼저였다
유인 달탐사를 하려면 달 주위를 도는 달 궤도선이 필요하고, 달 표면에 발을 디딜려면 달 착륙선도 필요하다. 탑승 우주인의 안전과 무사 귀환을 보장하려면, 유인 달탐사의 이전 단계로 무인 달 궤도선과 착륙선을 시험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다른 행성 주위를 도는 궤도선이나 착륙선을 보내기 전 단계로서의 시험으로도 무인 달 탐사는 중요하다.
달 주위를 도는 달 궤도선을 보내는 것은 단순히 달을 지나치는 근접비행보다 더 어렵다. 우주선이 지구의 중력탈출속도와 비슷한 속도로 출발하는 것에 더해, 달에 가장 가까이 접근했을 때 역추진으로 속도를 적절히 줄여 우주선이 달의 중력에 갇히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줄여야 하는 속도는 달표면 100km 상공 저궤도 진입을 기준으로 초속 0.82km 정도이다.[4] 달에 가장 가까운 위치가 아닌 곳에서 감속하면 속도를 더 많이 줄여야 한다. 금성이나 화성에 다가가는 근접비행을 하려면 지구에서 중력탈출속도보다 초속 0.3~0.4km 더 빠르게 출발해야 하는 것을 고려하면, 달 저궤도를 도는 달 궤도선을 보내는 경우에 더 많은 로켓 추진이 필요한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이 달 표면에 가려면 달 표면에 추락하거나 충돌하는 경착륙이 아닌, 달 표면에 사뿐히 내려앉는 연착륙을 해야한다. 달 표면에 도착하는 순간 착륙선의 속도를 거의 0이 되도록 착륙선의 속도를 줄여야 한다. 달 표면에는 대기가 없기 때문에 공기저항으로 우주선의 속도를 줄일 수 없고 낙하산도 쓸 수 없다. 로켓 추진만으로 속도를 줄여야 한다. 달 표면에서의 중력탈출속도가 초속 2.38km이므로, 속도를 줄이지 않고 달의 중력에 끌려 달 표면에 충돌하면 충돌속도는 초속 2.38km 이상이다. 따라서 탐사선이 달에 사뿐히 착륙하려면 초속 2.38km가 넘는 속도를 감속해 한다. 달 궤도선보다 더 많은 감속을 해야 하므로, 감속에 필요한 로켓 연료도 훨씬 더 많이 필요하다.
달 궤도선보다 달 착륙선이 더 많은 로켓추진을 해야 함에도, 미국과 소련 모두 달 착륙선을 먼저 성공했다. 달 표면에 처음으로 연착륙한 무인 우주선은 1966년 1월31일에 발사된 루나 9호(Luna 9)였다.[5] 달에 다가간 루나 9호는 달표면 7만4855m 상공부터 로켓 역추진으로 감속하기 시작해 달표면 260~265m에 이를 때까지 초속 2.6km이상을 감속했다. 달 표면에 닿기 직전에 에어백에 둘러싸인 99.8kg의 착륙선이 떨어져 나와 달에 착륙했다. 발사한 지 3일(77시간) 후였다. 지구와의 통신도 성공적이었다. 소련 해체 후 공개된 자료에 의하면, 루나 9호를 발사하기 3년 전이었던 1963년부터 1월부터 1965년 12월 사이에 소련은 달에 연착륙하기 위한 우주선을 총 11차례 발사해서 실패했을 만큼 많은 달 착륙 시도를 했다.[6]
첫 무인 달궤도선은 2달 후인 3월31일 발사된 소련의 루나 10호였다. 발사 3일 후인 4월 3일 달 표면 8천km 상공에서부터 역추진을 해 초속 0.64km의 속도로 줄여 달 공전궤도에 진입해 248.5kg의 궤도선이 분리되면서 달의 첫 인공위성이 되었다. 루나 10호의 달 궤도선은 달에 가까울 때는 달 상공 350km, 달에서 멀 때는 1016km의 공전궤도를 돌았다.[7] 사회주의 상징 노래인 ‘인터내셔널가(The Internationale)’ 음악을 루나 10호가 송신해 소련의 23차 공산당대회중인 4월4일에 방송할 예정이었고, 전날인 4월3일 밤 리허설에도 성공했다. 하지만 음악에서 한 음이 빠진 것을 알고 다음날 소련 공산당대회에서는 전날 밤의 녹음 테이프를 재생하고 달 궤도선에서 보내는 음악이라고 주장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5]
그림 4. 소련의 첫 달 착륙선 루나 9호(위)과 달 궤도선 루나 10호(아래). 달 표면에 도착하기 전까지 속도를 충분히 줄인 후 분리된 루나 9호의 달 착륙선은 에어백을 이용해 충돌 충격을 흡수하면서 연착륙에 성공했다. 루나 10호는 달에 가까이 접근했을 때 역추진해 속도를 초속 0.64km를 줄여 달에 가장 가까울 때는 350km 상공을 가장 멀 때는 1,016km 상공을 도는 타원 모양의 달 공전궤도에 진입했다.
미국도 달 궤도선보다 달 착륙선을 먼저 보냈다. 미국의 첫 무인 달 착륙선은 1966년 5월 30일에 발사되어 6월 2일에 착륙한 서베이어 1호(Surveyor 1)였다. 4달 전 소련의 달 착륙선 루나 9호가 달에 연착륙할 때는 로켓 역추진 이후 일부 남은 달 착륙 속도의 충격을 에어백으로 흡수한 반면, 서베이어 1호는 로켓 역추진으로 충분히 속도를 줄여 에어백 없이 3개의 다리로 사뿐히 착륙했다. 미국의 첫 달 궤도선인 루너 오비터 1호(Lunar Orbiter 1)는 1966년 8월 10일 발사되어 8월14일 달에 가깝게는 189.1km, 멀게는 1866.8km인 타워 모양의 달 공전궤도에 진입했다.
미국도 소련과 마찬가지로 달 착륙선과 궤도선의 성공 이전에 수차례의 실패가 있었다. 달 궤도선을 목적으로 1958년에 파이오니어 0호, 1호, 2호를, 1959년에는 파이오니어 P-1호, P-3호, P-30호, P-31호를 발사했으나 지구를 벗어나지 못하고 실패했다. 달 착륙선을 목적으로 한 우주선이었던 레인저 (Ranger) 3호, 4호, 5호도 1962년에 발사했으나 모두 실패했다는 기록이 있다.[8]
그림 5. 미국의 첫 달 착륙선 서베이어 1호(왼쪽)와 달궤도선 루너 오비터 1호(오른쪽). 서베이어 1호는 로켓으로 충분히 속도를 줄여 에어백 없이 3개의 다리로 사뿐히 착륙했다. 루너 오비터 1호는 달에 가장 가까운 근월점은 189.1km 상공을, 달에서 가장 먼 원월점은 1866.8km 상공을 도는 타원 모양의 공전궤도에 진입했다. 미국은 소련의 루나 9호와 10호보다 각각 약 4달 정도 늦게 달 착륙과 달 궤도 진입에 성공했다.
소련과 미국의 초기 달 궤도선과 착륙선은 발사한 지 3~4일만에 달에 가까이 다가가거나 착륙했다. 반면 2022년 8월5일에 발사한 대한민국의 다누리호는 달로 직접 향해 가지 않고 지구에서 150만km 이상 떨어진 곳까지 간 다음에 다시 돌아오는 매우 긴 경로를 약 4개월에 걸쳐서 가는 방법으로 달에 접근했다. 탄도형 달전이(BLT: Ballistic Lunar Transfer)라고 부르는 이 방식에 대해서는 이 시리즈 후반에 좀 더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다음 편에서는 새턴 로켓과 아폴로 프로그램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주)
[1] “Mercury Crewed Flights Summary”, NASA, https://www.nasa.gov/mission_pages/mercury/missions/manned_flights.html
[2] “Vostok - Soviet spacecraft series”, Encyclopaedia Britannica,https://www.britannica.com/technology/Vostok-Soviet-spacecraft
[3] “Voskhod 1”, Wikipedia, https://en.wikipedia.org/wiki/Voskhod_1
[4] “Low-Energy Lunar Trajectory Design”, J. S. Parker and R. L. Anderson, JPL/NASA, p228 (2013), https://descanso.jpl.nasa.gov/monograph/series12/LunarTraj--Overall.pdf
[5] “Beyond Earth: A Chronicle of Deep Space Exploration, 1958–2016”, Asif A. Siddiqi, NASA History Program Office, NASA (2018), https://www.nasa.gov/sites/default/files/atoms/files/beyond-earth-tagged.pdf
[6] “Russia's unmanned missions toward the Moon”, RussianSpaceWeb.com, https://www.russianspaceweb.com/spacecraft_planetary_lunar.html
[Moon] “Moon Landing”, Wikipedia, https://en.wikipedia.org/wiki/Moon_landing
[7] “Luna 10 - Spacecraft - the NSSDCA”, NASA, https://nssdc.gsfc.nasa.gov/nmc/spacecraft/display.action?id=1966-027A
[8] “List of missions to the Moon”, WIkipedia, https://en.wikipedia.org/wiki/List_of_missions_to_the_Moon
윤복원/미국 조지아공대 연구원(전산재료과학센터·물리학) bwyoo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