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최병건의 ‘자학의 거울’
(7) 자기애
(7) 자기애
2014년 6월23일은 우리 축구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날로 남을 것 같습니다. 38분 동안에만 세 골. 경기야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지만, 이날 경기의 전반전은 충격적이었습니다. 45분 내내 우리 선수들은 넋이 나간 듯 우왕좌왕했고 알제리 선수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우리를 유린했습니다. 저도 인터넷을 통해 그 경기를 봤습니다. 경기가 시작될 때 채팅창에 표현되던 승리에 대한 기대는 한 골, 한 골을 허용하면서 실망과 분노, 탄식으로 바뀌었고 세 번째 골을 허용하자 ‘이제 그만하자’는 표현이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시청자들의 고통이 생생히 느껴졌습니다.
경기가 끝날 무렵 사이버 공간의 다른 한쪽에서는 류현진 선수의 경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이날 류 선수는 6이닝의 호투 끝에 승리투수가 되었습니다. 채팅창이 흥미로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축구 보다가 암에 걸려서 항암치료 받으러 왔다’는 식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나절이 지나자 인터넷에는 ‘류현진, 축구 패배 달랜 위로의 9승’ ‘류현진 시즌 9승 달성… 월드컵 패배 아픔 위로한 역투’라는 제목의 기사가 올라왔습니다. 유에스오픈 여자 골프에서 미셸 위 선수가 우승했다는 소식까지 같이 엮은 ‘치유 기사’도 여럿 눈에 띄었습니다.
남에게 인정받는 자신의 가치
온 세상이 다 나를 싫어해도
스스로를 사랑하는 이 없습니다
자기애에 관한 한 누구나 평생
남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남과 나를 끝없이 비교하고
끝없이 높은 곳을 보면서
열등감에 젖어들게 합니다
그것이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강요하는 자기애의 세상입니다 부모에게 배워 가지게 되는 일종의 능력 정신분석의 창시자인 프로이트는 사람의 마음에서 어떤 현상이 발생하는 이유, 즉 마음을 움직이는 동기를 욕망에서 찾았습니다. 마음이 추구하는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는 욕망의 만족 하나로 환원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가 생각한 욕망, 리비도는 몸에서 발생하는 일종의 에너지였습니다. 마음을 에너지의 개념으로 설명한 그의 이론에는 자연과학으로 세상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수 있다는 19세기의 세계관이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음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고, 사람의 마음이 추구하는 것은 욕망의 만족 하나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이후의 분석가들은 욕망 외에 마음을 움직이는 다른 동기들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그중 하나가 자기애입니다. 자기애의 개념은 연못에 비친 자신의 모습과 사랑에 빠져 그 모습만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죽었다는 나르시스의 이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맨 처음에 자기애는 성적 도착의 한 형태를 일컫는 이름으로 사용되었지만, 이후에 개념이 확장되어 현재는 매우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 여러 의미를 다 이야기하는 것은 무리이고, 이 글에서는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마음 정도로 정의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자존심 내지는 자존감도 비슷한 의미의 용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이렇게 정의되는 자기애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행복한 삶의 필수 조건입니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얼핏 사람은 누구나 다른 누구보다도 스스로를 더 사랑하고 위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드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얄팍한 이기심을 생각하면 그럴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것과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내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얼마나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가슴 서늘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면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이 그리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축구 이야기로 이 글을 시작한 것은 자기애가 얼마나 손상되기 쉬운 것인지, 그 손상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를 이야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날 경기를 지켜본 사람들은 ‘이제 제발 그만하자’는 말이 나올 정도의 정신적 고통을 경험했습니다. 알제리의 슛이 우리의 그물을 가를 때마다 우리의 자존심과 자기애도 쩍쩍 갈라졌고, 그렇게 손상된 자기애를 치유하기 위해 사람들은 류현진 선수를 찾았습니다. 한국인도 아닌 한국계, 미셸 위 선수마저 끌어들이고 싶었을 정도로 축구에서 받은 자기애의 상처는 깊었습니다. 내가 직접 굴욕을 당한 것도 아니고, 어찌 보면 별것도 아닌 축구 시합에서 패배했을 뿐인데도 그만큼의 굴욕감이 느껴질 정도로 자기애의 상처는 고통스럽습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 어떻게 생각하면 남과 상관없을 듯도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자기애를 가지기 위해서는 남이 꼭 필요합니다. 이상화에 대한 글에서 건강한 자기애가 생기려면 이상화할 수 있는 부모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했지만, 부모의 역할은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충분한 자기애가 생기려면 무엇보다도, 부모가 아이를 충분히 사랑해야 합니다. 아이가 뭘 해도 예뻐하고 무조건 최고라고 치켜세워주는 부모가 있어야, 아이는 자신이 얼마든지 조건 없이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존재라는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야 아이는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자기애는 부모로부터 학습되는 것입니다. 불운하게도 좋은 부모를 만나지 못한 사람은 스스로를 충분히 사랑할 수 없습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부모에게 배워서 가지게 되는 일종의 능력입니다. 부러움을 유발해 지갑을 털어 가는 방법
아무리 사랑을 많이 받고 자라서 자기애가 건강하게, 충분히 발달한 어른이 되었다고 해도 더 이상 남의 사랑과 인정이 필요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자신이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지속적으로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느낌은 당연히 남으로부터 옵니다. 온 세상이 다 나를 싫어해도 지그시 무시하고 나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따돌림은 아이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자기애에 관한 한 누구나 평생 남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남의 인정을 바라는 경향이 유독 두드러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애적 인격을 가지고 있다고 정신분석에서는 말합니다. 그들은 마치 남의 인정만이 삶의 목표인 것처럼 행동합니다. 인정받으려면 남이 좋아하는 모습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남이 무엇을 원하는지에 아주 민감합니다. 남이 원하는 것이 중요해질수록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잊어갑니다. 가치의 판단 기준이 인기와 남의 부러움이 됩니다. 그 결과 이들의 삶은 점점 세속적이고 공허해집니다. 남이 탐낼 명품, 외제 차, 남이 부러워할 잘생긴 얼굴과 멋진 몸매, 남이 질투할 멋진 배우자. 남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삼고, 남이 욕망하는 대상이 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습니다. 그 목표를 이루면 잘나고 행복한 사람이 된 듯 보이지만 그건 겉모습일 뿐입니다. 남의 욕망을 끝없이 살피고 그것에 맞추어 사는 삶 속에서 자발적 욕망을 가진 주체는 사라지고 남의 욕망으로 규정되는 텅 빈 객체만이 남습니다. 이들의 삶은 남의 욕망에 종속됩니다.
명품, 외제 차, 멋진 몸매. 누구나 다 가지고 싶은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드실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누구나 다 그런 것들을 원합니다. 하지만 자기애적 인격을 가진 사람들은 상식적인 선에서 그런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원하는 것을 가지지 못하면 이들의 자기애는 심한 상처를 받게 되고, 이들은 심한 굴욕감과 고통에 빠집니다. 자신보다 많이 가진 사람들에 대해 이들은 부러움 정도가 아니라 극심한 질투와 적개심을 느낍니다. 반대로 자신보다 못 가진 사람들에 대해서는 노골적인 경멸감을 가집니다.
자기애적 인격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우리 모두 어느 정도 자기애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신분석에서 다루는 모든 문제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모든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현상들입니다. 그런 모습이 두드러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확대경을 통해 들여다보듯, 우리 자신을 좀더 잘 볼 수 있습니다.
자기애의 만족을 위해서는 누구나 어느 정도 남의 인정에 매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본주의에 의해 착취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정의 상당 부분은 소비와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는 우리의 자기애적인 측면을 십분 활용해서 우리의 지갑을 털어 갑니다. 사실, 부러움을 유발해 돈을 쓰게 만드는 수법은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21세기 자본주의는 전보다 훨씬 악랄한 수법을 쓰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자기애에 상처를 내어 부러움이 아니라 굴욕감과 수치심을 유발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몸 이야기를 해볼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비쩍 마른 여자, 식스팩의 남자가 되라고 합니다. 안 그러면 남의 사랑과 인정은 꿈도 꾸지 말라고 협박합니다. 아름다운 몸을 갖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게으름 때문이라며 죄인 취급을 합니다. 이런 살벌한 분위기에서 우리는 몸에 대한 강박에 시달립니다. 방송에서는 살찐 사람, 못생긴 사람을 대놓고 조롱합니다. 남의 호감을 얻으려면 유행에 뒤처지지 않게 옷도 차려입어야 하고 사랑을 얻으려면 이벤트도 해야 합니다. 미용 성형이 덕목이 되어가고, 학자보다는 부자가 존경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21세기 대한민국은 그런 사회입니다.
윤리의식이나 역사의식 같은 것들은 정치인들이 서로 헐뜯을 때나 거론될 뿐, 더 이상 우리 사회의 중요한 덕목이 아닙니다. 돈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의 관심은 오로지 돈뿐입니다. 우리의 지갑을 열기 위해 자본주의는 ‘남의 욕망’을 끝없이 업그레이드하면서 그것을 쫓아가지 못하면 ‘루저’가 될 거라고 우리를 협박합니다.
자본주의에 조롱당하며 스스로를 비하
자본주의의 협박과 농간의 가장 큰 폐해는, 우리가 그것을 내면화하는 데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우리의 자기애에 상처를 내는 방식을 내면화해서 우리 스스로 우리의 자기애에 상처를 내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에 의해 조롱당한 우리는 스스로를 비하하기 시작합니다. 뚱뚱하다고, 못생겼다고, 가난하다고.
전에 없던 자기애가 21세기에 새로 생겼을 리는 없습니다. 자기애는 늘 우리 마음속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해왔습니다. 잘난 사람은 늘 잘난 체했고, 못난 사람은 늘 자신을 비하했습니다. 하지만 최소한 지금처럼 노골적이지는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는 자기애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된 원인은 우선 고도로 발전된 자본주의에 있습니다. 자기애의 결핍을 자극하는 것이야말로 소비를 유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전세계적인 현상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최근에 자기애가 중요해진 데에는 하나의 이유가 더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람은 두 가지 이상을 추구합니다. 하나는 옳은 사람이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잘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옳게 살지 못하면 죄스럽고, 못나 보이면 창피한 것이 사람 마음입니다. 그런데 옳은 것과 잘난 것은 별개가 아닙니다. 자신이 옳게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 스스로를 잘났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옳고 그름이 확실한 세상에서는 잘난 사람이 되는 것보다는 옳은 사람이 되는 것이 우선입니다.
1980년대까지의 우리 사회가 그랬습니다. 그때 우리에게는 민주사회를 이루어야 한다는 목표의식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옳은 것’이었고, 그 의무감 때문에 우리는 지나치게 엄숙하고 진지했습니다. 옳게 사는 것만도 매우 힘든 세상에서 잘난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을 갖는 것은, 일종의 죄악이었습니다. 그때는 자기애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시절이었습니다.
세상은 달라졌고 이제 우리는 옳은 것에 대한 강박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자유를 얻은 듯하지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게 우리를 풀어주지 않습니다. 이제 세상은 잘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으로 우리를 옭아매고 있습니다. 잘난 것은 자기애의 영역이고, 수치심의 영역입니다. 이제 우리는 반성하지 않습니다. 스스로를 조롱하고 비하합니다.
옳고 그름에는 절대적이고 거시적인 기준이 있어서 그것만 지키면 되지만 잘나고 못난 것에는 그런 기준이 없습니다. 잘난 것에 대한 강박은 옳은 것에 대한 강박보다 훨씬 미시적으로 우리의 일상 곳곳에 침투해 있습니다. 남과 나를 끝없이 비교하고, 끝없이 높은 곳을 보면서 열등감에 젖어들 수밖에 없는 것, 그것이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강요하는 자기애의 세상입니다.
온 세상이 다 나를 싫어해도
스스로를 사랑하는 이 없습니다
자기애에 관한 한 누구나 평생
남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남과 나를 끝없이 비교하고
끝없이 높은 곳을 보면서
열등감에 젖어들게 합니다
그것이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강요하는 자기애의 세상입니다 부모에게 배워 가지게 되는 일종의 능력 정신분석의 창시자인 프로이트는 사람의 마음에서 어떤 현상이 발생하는 이유, 즉 마음을 움직이는 동기를 욕망에서 찾았습니다. 마음이 추구하는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는 욕망의 만족 하나로 환원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가 생각한 욕망, 리비도는 몸에서 발생하는 일종의 에너지였습니다. 마음을 에너지의 개념으로 설명한 그의 이론에는 자연과학으로 세상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수 있다는 19세기의 세계관이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음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고, 사람의 마음이 추구하는 것은 욕망의 만족 하나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이후의 분석가들은 욕망 외에 마음을 움직이는 다른 동기들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그중 하나가 자기애입니다. 자기애의 개념은 연못에 비친 자신의 모습과 사랑에 빠져 그 모습만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죽었다는 나르시스의 이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맨 처음에 자기애는 성적 도착의 한 형태를 일컫는 이름으로 사용되었지만, 이후에 개념이 확장되어 현재는 매우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 여러 의미를 다 이야기하는 것은 무리이고, 이 글에서는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마음 정도로 정의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자존심 내지는 자존감도 비슷한 의미의 용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이렇게 정의되는 자기애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행복한 삶의 필수 조건입니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얼핏 사람은 누구나 다른 누구보다도 스스로를 더 사랑하고 위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드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얄팍한 이기심을 생각하면 그럴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것과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내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얼마나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가슴 서늘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면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이 그리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축구 이야기로 이 글을 시작한 것은 자기애가 얼마나 손상되기 쉬운 것인지, 그 손상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를 이야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날 경기를 지켜본 사람들은 ‘이제 제발 그만하자’는 말이 나올 정도의 정신적 고통을 경험했습니다. 알제리의 슛이 우리의 그물을 가를 때마다 우리의 자존심과 자기애도 쩍쩍 갈라졌고, 그렇게 손상된 자기애를 치유하기 위해 사람들은 류현진 선수를 찾았습니다. 한국인도 아닌 한국계, 미셸 위 선수마저 끌어들이고 싶었을 정도로 축구에서 받은 자기애의 상처는 깊었습니다. 내가 직접 굴욕을 당한 것도 아니고, 어찌 보면 별것도 아닌 축구 시합에서 패배했을 뿐인데도 그만큼의 굴욕감이 느껴질 정도로 자기애의 상처는 고통스럽습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 어떻게 생각하면 남과 상관없을 듯도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자기애를 가지기 위해서는 남이 꼭 필요합니다. 이상화에 대한 글에서 건강한 자기애가 생기려면 이상화할 수 있는 부모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했지만, 부모의 역할은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충분한 자기애가 생기려면 무엇보다도, 부모가 아이를 충분히 사랑해야 합니다. 아이가 뭘 해도 예뻐하고 무조건 최고라고 치켜세워주는 부모가 있어야, 아이는 자신이 얼마든지 조건 없이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존재라는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야 아이는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자기애는 부모로부터 학습되는 것입니다. 불운하게도 좋은 부모를 만나지 못한 사람은 스스로를 충분히 사랑할 수 없습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부모에게 배워서 가지게 되는 일종의 능력입니다. 부러움을 유발해 지갑을 털어 가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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