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판의 미로>에 등장하는 아이 잡아먹는 괴물은 양 손바닥에 눈이 붙어 있다. 손은 어쩌면 가장 효율적인 눈의 위치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겨레> 자료사진
[토요판] 하리하라 눈을 보다 / (3) 왜 두 개인가
▶ 하리하라. 본명 이은희. 생물학을 전공해 연구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으나, 우연히 인터넷 블로그에 썼던 글들이 <하리하라의 생물학 카페> 등 책으로 묶여 나오면서 과학언론학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현재는 과학작가이자 강연자로 살고 있다. ‘하리하라’라는 인터넷 아이디를 필명으로, 세상에 퍼져 있는 과학에 대한 선입견과 오해를 걷어내는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고 있다. <한겨레> 토요판에서 격주로 ‘인간의 눈’과 본다는 것의 의미를 탐구한다.
이오는 슬펐다. 그래서 울었다. 그 울음소리는 가련한 흐느낌이 아니라 낮고 탁한 소울음이 되어 터져나왔다. 그녀는 소로 변해버린 제 몸을 보며 또 한번 나직한 울음을 토해냈다. 그녀는 원래 강의 신 이나코스의 딸로 태어난 아름다운 님프였다. 지금은 더러운 외양간에 갇힌 소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그녀의 죄라면 제우스의 사탕발림에 넘어갔다는 것뿐. 생각해보라. 한낱 순진한 어린 님프가 어찌 신들의 제왕이자 ‘선수’의 대명사 격인 제우스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었으랴. 남편의 바람기에 넌덜머리가 난 헤라에게 그런 건 일말의 고려 대상도 아니었다. 헤라는 제우스에게서 반강제로 그녀를 빼앗아 더러운 외양간에 집어넣고는 백안의 아르고스로 하여금 그녀를 감시하도록 하고 있었다. 아르고스의 100개의 눈은 잘 때도 모두 감기지 않았다. 끊임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눈동자의 환영은 아무리 눈을 감아도 사라지지 않고, 이오의 마음까지 옥죄는 듯했다.
두 개가 얼굴 전면 가깝게 붙은
인간의 눈은 사각지대 많지만
꼭 효율이 떨어지는 건 아냐
두 눈의 시야가 겹쳐지면서
원근감·입체감 판별이 유리 사자나 호랑이 같은 육식동물
얼굴 전면 중앙부에 눈 빛나지만
말이나 사슴 같은 초식동물
얼굴 측면에 따로 눈이 존재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숙명 100개의 눈으로 보는 세상은 그리스 신화 속 아르고스는 헤라의 명으로 100개의 눈을 부릅뜨고 밤낮으로 이오를 지키지만, 결국 제우스가 보낸 헤르메스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졸지에 부부싸움의 희생양이 되어버린 아르고스를 불쌍히 여겼는지, 헤라는 그의 눈을 자신의 신조(神鳥)인 공작의 꽁지깃에 심어 넣었다. 그래서인지 공작의 꼬리를 보면 억울하게 죽어 눈조차 감지 못한 아르고스의 모습 같아 으스스한 느낌조차 든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도대체 100개의 눈으로 보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우리는 두 개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데 익숙하다. 사람만이 아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눈이 달린 생명체들 역시도 두 개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가만 보면 얼굴의 이목구비 중에서 코나 입은 하나이지만, 귀와 눈은 두 개가 존재한다. 왜? 일단 가장 먼저 떠오르는 대답은 하나보다는 둘이 낫다는 것이다. 하나의 눈에 비해 두 개의 눈이 더 유리한 이유는 직관적으로도 쉽게 알 수 있다. 일단 눈이 두 개이면 하나일 때보다 분명히 시야가 더 넓어진다. 벽에 동일한 크기의 창문이 있다면, 하나보다는 둘이 방 안으로 빛과 바람을 더 많이 불러들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 하지만 단지 시야를 넓힐 목적으로 눈이 하나 더 필요했다면, 왜 하필 두 개의 눈이 모두 얼굴에, 그것도 중앙 부분에 모여 있는 것일까? 이왕 두 개가 존재하려면 하나는 얼굴에, 하나는 뒤통수에 존재해야 전후좌우를 살피는 데 더 유리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사람의 두 눈은 모두 얼굴 전면부에 존재하기 때문에, 눈이 하나일 때보다 시야는 겨우 4분의 1 정도 넓어질 뿐이며, 양쪽 관자놀이 뒤쪽의 시야, 즉 세상의 절반은 여전히 사각지대에 놓인다. 눈앞에서 얼쩡대는 모기를 잡으려고 분기탱천해 일어났던 사람들의 대부분이 잠시 뒤, 마술처럼 눈앞에서 모기가 사라지는 황당한 경험을 하고는 허무하게 주저앉게 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모기는 순간적인 회전과 방향 전환에 능수능란한 초소형 비행물체이기에 시야각이 좁은 인간의 눈으로는 눈앞의 모기가 갑자기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니 내 피를 빤 녀석을 겨냥해 가열차게 들었던 손을 힘없이 내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단지 시야의 확장을 위해서만 눈이 하나 더 필요하다면 사람이 아니라 토끼나 말과 같은 초식동물을 벤치마킹해야 한다. 이들의 눈은 얼굴의 정면이 아닌 얼굴의 측면에 존재해 각각의 눈이 가지는 시야의 범위를 최대로 확장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말의 경우는 머리를 고정하고 있을 때에도 뒤쪽 30° 정도를 제외하고는 모두 볼 수 있으며, 토끼의 경우 사각지대가 겨우 9°에 불과할 정도로 넓은 시야를 자랑한다. 비록 시야의 확장 분야에서는 사람의 눈이 말이나 토끼보다는 못하더라도 꼭 효율이 떨어진다고 볼 수는 없다. 사람의 경우, 눈이 얼굴 전면에 가깝게 존재하는 덕에 두 눈의 시야가 상당 부분 겹쳐지면서 원근감과 입체감의 판별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눈이 두 개이고, 두 눈이 약간이라도 떨어져 있다면 각각의 눈에 들어오는 시각 영역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눈앞에 손가락을 하나 세우고 양쪽 눈을 번갈아 윙크하듯 감아보면, 눈을 번갈아 뜰 때마다 손가락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의 뇌는 하나의 대상에 대해 두 개의 상을 형성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각각의 눈에서 들어온 시각정보를 합쳐 하나의 이미지로 통합하게 된다. 양쪽 눈에서 각각 뻗어나온 시신경이 뇌로 들어가기 전에 하나로 합쳐지는 이유는 이 때문이며, 이렇게 양쪽 시야를 합치는 과정에서 시야에 입체감이 더해진다. 사람의 눈은 비록 시야는 넓은 편이 아니지만, 거리감을 판별하는 데 매우 탁월하다. 이렇게 양안의 시야를 겹쳐 원근감을 살리는 것, 입체시는 흥미롭게도 사냥꾼의 특성이라는 것이다.
외눈박이 맹수는 목숨을 잃을 위험 많아
동물들도 사자나 호랑이와 같은 육식동물의 경우 얼굴 전면 중앙부에 두 개의 눈이 빛나고 있지만, 말이나 사슴 같은 초식동물은 얼굴 측면에 따로따로 눈이 존재한다. 이유는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숙명 때문이다. 초식동물의 경우, 가장 중요한 것은 천적의 존재 자체를 인식하는 것이다. 천적이 멀리 있는지 가까이 있는지 따지기에 앞서 일단 천적이 나타났으면 무조건 도망쳐야 살아날 확률이 높다. 따라서 이들은 눈의 위치를 최대한으로 멀리 떨어뜨림으로써 각각의 눈이 지닌 시야를 최대한으로 확장시켜 생존해왔던 것이다. 반면 육식동물의 경우, 눈앞에 하나든 백이든 간에 내 발톱으로 움켜쥐기 전까지는 모조리 그림의 떡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단순히 보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대상과의 거리를 정확히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거리를 잘못 인식한다면 사냥감을 향해 멋지게 뛰어올랐는데 결국은 땅바닥에 저 혼자 나뒹구는 낯뜨거운 상황을 연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창피함이 아니다. 번번이 이런 실수를 반복한다면 사냥꾼은 결국 굶어 죽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목표가 되는 사냥감의 위치를 뚜렷하게 판별하고 이 한 번의 도약으로 사냥감의 목덜미에 정확히 이빨을 박아 넣으리라는 확신이 눈에서 생겨야 한다. 그래서 이들은 넓은 시야 대신 좁지만 겹쳐지는 시야를 통해 대상과의 거리감과 입체감을 획득한 것이다. 실제로 야생에서는 한쪽 눈을 다친 맹수들이 사냥에 번번이 실패하고는 결국 목숨마저 잃게 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이는 한쪽 눈만으로는 사냥감과의 거리 가늠이 어렵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런 이유에서 무협지 등에 등장하는 ‘외눈 고수’들의 신화는 상당히 부풀려졌을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사람의 눈은 호랑이처럼 정면을 향해 있고, 입체감과 원근감을 판별하는 데 뛰어나다. 이러한 눈은 원시 시대 우리네 조상들이 채집뿐 아니라 수렵을 통해 생을 이어갔던 사냥꾼이었을 가능성에 무게를 실어준다.
입체감을 살릴 수 있는 인간의 눈의 특성은 현대과학과 만나 3D 영상의 구현으로 이어진다. 인간의 눈은 입체감을 느끼는 데 특화되어 있기 때문에, 약간의 조작만으로도 평면을 입체로 인식할 수 있다. 평면을 입체로 인식시키는 기본 원리는 하나의 대상에 대한 이미지를 특수안경을 이용해 양쪽 눈이 서로 조금씩 다르게 인식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나머지는 입체시를 인식하는 능력이 뛰어난 뇌에 맡기면 된다. 심지어 사람의 눈은 양쪽 눈이 느끼는 색의 차이만 나도 입체감을 만들어낼 수 있다. 어릴 적 어린이용 잡지를 사면 부록으로 심심찮게 들어 있던 빨간색과 파란색 셀로판지가 들어간 종이안경과 일부러 어긋하게 이중으로 인쇄된 그림들을 떠올려보라. 이 안경을 쓰고 그림을 보면 각각의 셀로판지들이 필터로 작용하면서 색을 걸러내기에 이중으로 인쇄된 그림이 하나로 중첩되면서 입체감이 만들어진다. 이 방법은 매우 간단하게 만들 수 있고 값도 저렴하지만, 색깔 있는 필터를 이용하므로 물체의 색이 왜곡되어 ‘입체감은 느껴지지만 진짜 같지는 않은’ 감각을 선사한다. 따라서 현재의 3D 안경들은 한쪽 방향의 빛만을 통과시키는 편광필터나 인간의 눈이 인식할 수 없는 빠른 속도로 양쪽 시야를 번갈아 차단하는 셔터글라스 기법을 이용해 색의 왜곡 없이 평면 이미지를 입체적으로 느낄 수 있는 방향으로 개발되고 있다.
다시 두 개의 눈으로 돌아와보자. 어쨌든 시야의 확장 측면에서건 입체시 획득의 측면에서건 간에 눈이 하나일 때보다 두 개일 때 더 잘 볼 수 있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하나보다 둘이 더 좋다면, 둘보다 셋 혹은 넷이 더 좋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데 자연계에서 눈이 둘 이상인 동물은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며, 아르고스처럼 다수의 눈을 가진 존재는 더더욱 없다. 물론 곤충들처럼 수많은 낱눈을 가진 존재들도 있지만, 이 낱눈들 각각은 하나의 독립적인 눈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겹눈을 구성하는 시세포의 특성이 강하다. 그리고 이들 역시도 이 낱눈이 모여 구성된 겹눈은 두 개를 가진다.
눈이 많으면 뇌의 정보처리 속도가 느려져
사실 시각적 정보가 우리에게 주는 커다란 가치로 볼 때, 눈이 더 많이 존재하지 않아야 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만약 눈이 뒤통수에 하나 더 있다면 수평 시야의 사각지대는 사라질 것이고, 머리 꼭대기에 하나 더 추가된다면 시야의 범위는 수직으로도 확장될 것이니, 전후좌우상하를 한꺼번에 모두 살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눈의 개수가 늘어나면 각각의 눈이 수집한 정보들을 통합하여 의미있는 시각적 이미지를 파악하기 위해 훨씬 더 많은 정보처리 능력이 뇌에 요구될 것이다. 지금도 뇌의 상당 부분이 시각피질로 활용되는 마당에, 네 개의 시야에서 들어오는 이미지를 통합하려면 뇌가 지금보다는 더 커지고 복잡해져야 할 것이며 아무래도 처리하는 정보의 양이 많아지다 보면 속도가 느려질 가능성도 높아질 것이다. 어쩌면 눈에 있어 2란 숫자는 이러한 다양한 현실적인 요소들을 고려한 최적의 타협수가 아니었을까.
내친김에 마지막으로 하나 더 상상해 보자. 만약 눈이 지금처럼 얼굴에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대로 눈의 위치를 바꿀 수 있다면 어디에 있는 것이 가장 효율적일까. 개인적으로는 손가락 끝이 가장 효율적이지 않을까 싶다. 손에 눈이 있다면 뒤쪽과 위아래는 물론이거니와 좁은 틈새 사이로도 얼마든지 손가락을 밀어넣어 볼 수 있으니 진정한 시야의 사각지대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물론 손가락 끝은 쉽게 다칠 수 있으니 단단한 투명 눈꺼풀의 존재는 필수일 테고. 그렇다면 가장 효율적인 눈을 지닌 존재는 영화 <판의 미로>에 등장하는 아이 잡아먹는 괴물일지도 모른다.
이은희 과학 작가
인간의 눈은 사각지대 많지만
꼭 효율이 떨어지는 건 아냐
두 눈의 시야가 겹쳐지면서
원근감·입체감 판별이 유리 사자나 호랑이 같은 육식동물
얼굴 전면 중앙부에 눈 빛나지만
말이나 사슴 같은 초식동물
얼굴 측면에 따로 눈이 존재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숙명 100개의 눈으로 보는 세상은 그리스 신화 속 아르고스는 헤라의 명으로 100개의 눈을 부릅뜨고 밤낮으로 이오를 지키지만, 결국 제우스가 보낸 헤르메스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졸지에 부부싸움의 희생양이 되어버린 아르고스를 불쌍히 여겼는지, 헤라는 그의 눈을 자신의 신조(神鳥)인 공작의 꽁지깃에 심어 넣었다. 그래서인지 공작의 꼬리를 보면 억울하게 죽어 눈조차 감지 못한 아르고스의 모습 같아 으스스한 느낌조차 든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도대체 100개의 눈으로 보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우리는 두 개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데 익숙하다. 사람만이 아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눈이 달린 생명체들 역시도 두 개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가만 보면 얼굴의 이목구비 중에서 코나 입은 하나이지만, 귀와 눈은 두 개가 존재한다. 왜? 일단 가장 먼저 떠오르는 대답은 하나보다는 둘이 낫다는 것이다. 하나의 눈에 비해 두 개의 눈이 더 유리한 이유는 직관적으로도 쉽게 알 수 있다. 일단 눈이 두 개이면 하나일 때보다 분명히 시야가 더 넓어진다. 벽에 동일한 크기의 창문이 있다면, 하나보다는 둘이 방 안으로 빛과 바람을 더 많이 불러들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 하지만 단지 시야를 넓힐 목적으로 눈이 하나 더 필요했다면, 왜 하필 두 개의 눈이 모두 얼굴에, 그것도 중앙 부분에 모여 있는 것일까? 이왕 두 개가 존재하려면 하나는 얼굴에, 하나는 뒤통수에 존재해야 전후좌우를 살피는 데 더 유리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사람의 두 눈은 모두 얼굴 전면부에 존재하기 때문에, 눈이 하나일 때보다 시야는 겨우 4분의 1 정도 넓어질 뿐이며, 양쪽 관자놀이 뒤쪽의 시야, 즉 세상의 절반은 여전히 사각지대에 놓인다. 눈앞에서 얼쩡대는 모기를 잡으려고 분기탱천해 일어났던 사람들의 대부분이 잠시 뒤, 마술처럼 눈앞에서 모기가 사라지는 황당한 경험을 하고는 허무하게 주저앉게 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모기는 순간적인 회전과 방향 전환에 능수능란한 초소형 비행물체이기에 시야각이 좁은 인간의 눈으로는 눈앞의 모기가 갑자기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니 내 피를 빤 녀석을 겨냥해 가열차게 들었던 손을 힘없이 내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단지 시야의 확장을 위해서만 눈이 하나 더 필요하다면 사람이 아니라 토끼나 말과 같은 초식동물을 벤치마킹해야 한다. 이들의 눈은 얼굴의 정면이 아닌 얼굴의 측면에 존재해 각각의 눈이 가지는 시야의 범위를 최대로 확장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말의 경우는 머리를 고정하고 있을 때에도 뒤쪽 30° 정도를 제외하고는 모두 볼 수 있으며, 토끼의 경우 사각지대가 겨우 9°에 불과할 정도로 넓은 시야를 자랑한다. 비록 시야의 확장 분야에서는 사람의 눈이 말이나 토끼보다는 못하더라도 꼭 효율이 떨어진다고 볼 수는 없다. 사람의 경우, 눈이 얼굴 전면에 가깝게 존재하는 덕에 두 눈의 시야가 상당 부분 겹쳐지면서 원근감과 입체감의 판별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눈이 두 개이고, 두 눈이 약간이라도 떨어져 있다면 각각의 눈에 들어오는 시각 영역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눈앞에 손가락을 하나 세우고 양쪽 눈을 번갈아 윙크하듯 감아보면, 눈을 번갈아 뜰 때마다 손가락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의 뇌는 하나의 대상에 대해 두 개의 상을 형성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각각의 눈에서 들어온 시각정보를 합쳐 하나의 이미지로 통합하게 된다. 양쪽 눈에서 각각 뻗어나온 시신경이 뇌로 들어가기 전에 하나로 합쳐지는 이유는 이 때문이며, 이렇게 양쪽 시야를 합치는 과정에서 시야에 입체감이 더해진다. 사람의 눈은 비록 시야는 넓은 편이 아니지만, 거리감을 판별하는 데 매우 탁월하다. 이렇게 양안의 시야를 겹쳐 원근감을 살리는 것, 입체시는 흥미롭게도 사냥꾼의 특성이라는 것이다.
100개의 눈을 부릅뜨고서 밤낮으로 이오를 지키던 아르고스가 제우스가 보낸 헤르메스에게 살해당하고 마는 장면을 형상화한 고대 그리스의 도자기. 오스트리아 빈 미술사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테오이닷컴 제공
이은희 과학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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