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리는 겹눈을 통해 넓은 공간을 모두 볼 수 있다. 곤충의 겹눈 구조를 모방한 인공눈은 넓은 시야각을 확보한다. <한겨레> 자료사진
[토요판] 하리하라 눈을 보다 ④ 눈의 구조
▶ 하리하라. 본명 이은희. 생물학을 전공해 연구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으나, 우연히 인터넷 블로그에 썼던 글들이 <하리하라의 생물학 카페> 등 책으로 묶여 나오면서 과학언론학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현재는 과학작가이자 강연자로 살고 있다. ‘하리하라’라는 인터넷 아이디를 필명으로, 세상에 퍼져 있는 과학에 대한 선입견과 오해를 걷어내는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고 있다. <한겨레> 토요판에서 격주로 ‘인간의 눈’과 본다는 것의 의미를 탐구한다.
거울아 거울아 네 눈은 삐뚤어졌니?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아름답지?”
“왕비님도 아릅답지만, 눈처럼 하얀 피부에 장미꽃처럼 붉은 입술, 밤하늘처럼 까만 머리카락을 지닌 백설공주가 왕비님보다 훨씬 더 아름답습니다.”
거울의 이 말 한마디는 젊고 예쁜 의붓딸에 대한 왕비의 질투를 폭발시켰고, 그녀를 죽여 없애려는 결심의 시작점이 된다. 아이에게 들려주기 위해 다시 꺼내든 오래된 백설공주 동화책.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도대체 거울은 백설공주가 아름답다는 것을 어떻게 ‘본’ 것일까. 거울의 눈은 분명 사람의 눈과 다를 터인데, 어떻게 사물을 동일하게 인식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눈을 지닌 존재는 같은 대상을 모두 동일하게 인식하는 것일까?
동공은 왜 누구나 검은 색깔일까
사람을 포함한 대부분의 척추동물과 두족류-문어나 오징어 등-는 하나의 구조물로 이루어진 눈을 갖는다. 이 눈은 홍채가 열리면서 형성되는 동공을 통해 빛을 안구 내부로 들여보낸다. 동공을 통해 들어온 빛은 수정체를 지나면서 굴절되어 안구 안쪽에 존재하는 망막에 상을 맺는 방식으로 외부 세계를 눈의 내부로 들여온다. 망막에 존재하는 세포들은 눈으로 들어온 빛 신호를 전기 신호로 바꾸어 시신경을 통해 뇌로 전달해주는 역할을 하는데, 망막세포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면 신호의 전달이 끊겨 우리는 앞을 볼 수 없게 된다. 뇌는 빛을 직접적으로 인식할 수 없다. 머리를 열고 시각 피질을 직사광선에 노출시켜도 뇌는 이를 인식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이런 원리로 외부 세계를 내부로 끌어들이는 터라 눈은 흔히 카메라에 비유되곤 한다. 조리개를 통해 빛의 양을 조절한 뒤, 렌즈를 통해 빛을 굴절시켜서 필름에 상을 맺히게 하는 카메라의 원리가 홍채를 통해 빛의 양을 조절하고 수정체를 통해 빛을 굴절시켜 망막에 상을 맺히게 하는 눈의 원리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리만 비슷할 뿐, 그 성능 면에서 보자면 제아무리 뛰어난 카메라도 눈의 능력을 따라오기 어렵다.
우리가 단순히 ‘상을 맺는다’고 말하는 과정만 해도 신경써야 할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먼저 시선이 정확히 물체에 맞도록 안구가 움직여야 한다. 앞서 말했듯이 사람의 시야는 그다지 넓은 편이 아닌데다, 중심 시야와 바깥 시야의 차이도 매우 크다. 가장자리의 시각은 중심부의 40분의 1에 불과하다. 우리가 눈 옆을 스치고 지나가는 존재에 대해 인식은 해도 명확히 구별하지 못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따라서 무언가를 정확히 보려면 대상과 눈을 맞춰야 하고, 대상이 움직이거나 반대로 눈이 위치한 머리가 흔들리더라도 이에 맞춰 시선을 바꾸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렇게 대상에 시선을 맞춘 뒤에는 빛이 눈에 적당하게 들어가도록 홍채를 이용해 동공의 크기를 적절히 조절해야 한다. 동공은 눈 내부로 빛이 들어가는 유일한 통로다. 눈의 내부로 들어가는 빛이 너무 약하면 사물을 구별할 수 없고, 빛이 너무 강하면 눈이 부셔서 역시나 사물 구별이 힘들다. 따라서 빛이 약하면 홍채를 열어 동공을 크게 하고, 빛이 강하면 홍채를 닫아 동공을 줄여야 눈이 본래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홍채의 색은 멜라닌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멜라닌의 양에 따라 검은색, 갈색, 노란색, 녹색, 파란색 등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지만, 동공의 색은 누구나 검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동공 자체는 원래 투명하지만, 눈 내부는 일종의 암흑상자이기 때문에 내부의 어두운 그림자 때문에 검게 보이는 것이다. 고유한 눈 색을 만드는 것이 동공을 제외한 홍채만이라는 것은 컬러렌즈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컬러렌즈라고 해서 모두 색이 있지는 않고, 동공이 위치한 가운데 부분은 투명하고 가장자리 부위만 색이 들어가 있다. 그래서 파란색 컬러렌즈를 착용하더라도 세상이 파랗게 보이지는 않는 것이다. 투명하며 내부가 비치는 동공의 이런 특징은 순식간에 귀여운 아기를 사탄의 인형처럼 보이게 만드는 적목현상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는 어두운 곳에서 플래시를 터트려 사진을 찍을 경우, 이미 열려 있던 동공 안쪽으로 순간적으로 강한 빛이 들어오면서 투명한 동공을 통해 눈 내부의 혈관이 직접 비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시선과 광량을 조절한 뒤에도, 망막에 정확한 상이 맺히도록 하려면 대상과의 거리에 따라 상의 위치를 조절해 주어야 한다. 프로젝터를 스크린에 비춰 영화를 본다면, 프로젝터와 스크린의 거리가 너무 가깝거나 너무 멀어도 스크린에 상이 제대로 맺히지 않는다. 이럴 때 우리는 프로젝터와 스크린의 거리를 조절해서 정확한 상이 맺히도록 한다. 오징어나 물고기, 개구리, 뱀 등의 동물도 이와 비슷하게 수정체의 위치를 앞뒤로 조절해 망막에 정확한 상이 맺히도록 조절한다. 하지만 사람의 경우, 수정체가 고정되어 있어 이런 방식으로 초점을 맞추는 것이 불가능하다.
왕비의 질투 폭발시킨 거울
거울은 백설공주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본’ 것일까
사람이 아닌 존재도 사람과
똑같은 눈으로 세상 바라볼까 홍채를 통해 빛의 양 조절하고
수정체 통해 빛을 굴절시켜
망막에 상을 맺히게 하는 원리
제아무리 뛰어난 카메라도
눈의 능력을 따라오기 어렵다 잠자리는 겹눈…낱눈만 2만8000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꼭 한가지만 있지는 않다. 사람의 수정체는 위치 조절은 안 되지만, 자체의 신축성이 좋아서 수정체의 두께 변화를 이용해 빛이 구부러지는 정도를 조절할 수 있다. 가까운 것을 볼 때 수정체는 두꺼워지고, 먼 것을 볼 때는 얇아지면서 정확한 상의 원리를 조절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 상이 맺히는 각도를 조절하다 보니 간혹 수정체의 조절 기능이 망가지면서 늘 두껍거나 늘 얇은 상태로 존재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즉, 수정체가 늘 두꺼운 상태로 유지되면 가까운 곳은 잘 보이나 먼 거리는 잘 보이지 않는 근시가 나타나고, 반대로 얇아진 상태로 고착되면 먼 것은 그나마 보이지만 가까운 것이 잘 보이지 않는 원시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수정체의 신축성에는 문제가 없더라도 한계는 존재하는지라 무한정 두꺼워지거나 무한정 얇아질 수는 없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수정체의 신축성 한계는 대부분의 갓난아이들이 원시 상태로 태어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갓난아이의 안구 내부의 직경은 평균 16.8㎜ 정도로 이는 수정체가 아무리 신축성이 좋다 한들 상을 망막에 정확하게 맞춰 굴절시키기에는 지나치게 짧은 거리다. 따라서 갓난아이들은 대부분 원시 상태로 태어난다. 물론 이 원시는 아기의 성장에 따라 안구의 크기가 커지면서 대부분 해결되기는 하지만, 간혹 안구의 크기 자체가 수정체의 신축성을 넘어서는 사람들이 있다. 즉, 안구가 지나치게 짧거나 지나치게 긴 경우에는 수정체의 이상이 없이도 원시나 근시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나 안구는 보통 14살께면 성장을 멈추는데, 이후에도 안구가 계속해서 자라는 경우 상대적으로 수정체와 망막의 사이가 길어지면서 가까운 곳이 잘 보이지 않는 현상, 즉 축성 근시 증상을 겪게 된다. 이처럼 단순히 눈으로 들어오는 빛을 망막에 정확하게 맺히게 하는 과정에서조차도 필요한 게 이토록 많다. 더욱 신기한 것은 이 모든 과정이 의식하지 않아도 이루어지는 자동적인 과정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눈 깜짝할 새 말이다. 가을이 되니 잠자리들이 날아다니기 시작하고, 그에 비례해 잠자리를 잡아달라는 아이들의 요구도 늘어난다. 움직이는 생물체를 잡기 위해서는 그 생물체의 시선을 피해 사각지대에서 살금살금 접근하는 것이 필요한데,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의 시야를 파악하는 것이 매우 유리하다. 시야각에서 벗어나면 보이지 않을 테니 말이다. 대개 시선의 방향은 눈동자가 바라보는 방향으로 알 수 있다. 하지만 잠자리는 도통 알 수가 없다. 잠자리의 눈은 몸집에 비해서 매우 큰 편이기는 하지만, 눈동자가 없으니 시선의 방향도 시야의 각도도 파악하기 곤란하다. 잠자리가 어디를 보고 있는지 도통 알 수 없으니 잡자리의 시선에 내가 들어갔는지 알 길이 없다는 것이다.(그러니 제발 왜 잠자리 안 잡아주느냐고 타박하지 말자! 안 잡는 게 아니라 못 잡는 거다.) 잠자리의 눈은 곤충들 중에서도 특히나 크기로 유명한데, 이 큰 눈은 하나의 눈이 아니라 수많은 낱눈들이 모여 만들어진 겹눈이다. 겹눈을 이루는 낱눈의 수는 종에 따라 편차가 큰데, 그중에서도 잠자리는 겹눈 하나를 이루는 낱눈의 수가 2만8000개나 되는 것도 있다. 이 낱눈들은 크기는 작아도 볼록렌즈, 즉 빛을 굴절시키는 수정체의 구실을 하는 키틴 각막과 빛을 인식하는 망막세포를 8개 정도 지니고 있어 하나만 존재해도 볼 수 있을 정도다. 또한 낱눈의 내부에는 색소 입자를 지닌 색소세포가 존재하여 홍채처럼 빛의 유입량과 각도를 조절할 수 있다. 겹눈을 이루는 낱눈은 너무 작기 때문에 시력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지만, 이동하는 물체를 판별하는 능력은 매우 뛰어나다. 물체가 움직이는 경우, 여기서 반사되는 빛은 낱눈마다 따로따로 인식되어 마치 모자이크처럼 인지되기 때문이다. 삼엽충의 방해석 수정체와 오늘날 렌즈 5억년 전, 지구상에 나타난 최초의 눈인 삼엽충의 눈도 낱눈이 모인 겹눈이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삼엽충은 현대의 동물들처럼 부드러운 단백질로 이루어진 수정체가 아니라, 단단한 광물질인 방해석으로 이루어진 수정체를 이용해 세상을 보았다는 점이다. 인간이 시력의 한계를 확장하기 위해 광물질로 만들어진 렌즈를 이용하는 것은 어쩌면 눈이 최초로 만들어질 때부터 이미 정해진 것은 아니었을까.
사람의 눈이든 잠자리의 눈이든 삼엽충의 눈이든 빛을 인식해서 이미지화시키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그들이 인식하는 이미지가 모두 동일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이미 많은 연구 결과, 종에 따라 시력과 시야, 색깔 구별 능력, 자외선과 적외선의 인식 능력은 모두 제각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람은 하나의 이미지로 인식하는 대상을 겹눈을 지닌 잠자리는 모자이크 형태로 인식한다. 같은 꽃을 보더라도 가시광선만을 인식하는 사람의 눈과 자외선도 인식할 수 있는 꿀벌의 눈은 다르게 보일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요술거울은 왕비와 같은 눈으로 백설공주를 인식했을까. 아니, 애초에 거울이 가진 아름다움의 기준이 사람들의 그것과 동일했을까. 어쩌면 왕비의 가장 큰 잘못은 아름다운 젊은 의붓딸에 대한 질투가 아니라, 내가 아닌 존재도 나와 동일하게 세상을 바라볼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의 말을 맹목적으로 믿은 어리석음에 있을지도 모른다. 세상에 존재하는 시각은 동일한 하나가 아니라, 눈이 달린 생명체의 수만큼 다양한 시각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몰랐다는 죄 말이다.
이은희 과학 작가
종마다 눈이 다르며 따라서 ‘보여지는 세상’이 다르다. 사람은 가시광선만 보지만 꿀벌은 자외선을 인식한다. 자외선을 인지하는 꿀벌의 시선으로 꽃을 보면 꿀이 묻은 부분이 훨씬 진하게 인식된다. AP 연합뉴스
거울은 백설공주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본’ 것일까
사람이 아닌 존재도 사람과
똑같은 눈으로 세상 바라볼까 홍채를 통해 빛의 양 조절하고
수정체 통해 빛을 굴절시켜
망막에 상을 맺히게 하는 원리
제아무리 뛰어난 카메라도
눈의 능력을 따라오기 어렵다 잠자리는 겹눈…낱눈만 2만8000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꼭 한가지만 있지는 않다. 사람의 수정체는 위치 조절은 안 되지만, 자체의 신축성이 좋아서 수정체의 두께 변화를 이용해 빛이 구부러지는 정도를 조절할 수 있다. 가까운 것을 볼 때 수정체는 두꺼워지고, 먼 것을 볼 때는 얇아지면서 정확한 상의 원리를 조절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 상이 맺히는 각도를 조절하다 보니 간혹 수정체의 조절 기능이 망가지면서 늘 두껍거나 늘 얇은 상태로 존재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즉, 수정체가 늘 두꺼운 상태로 유지되면 가까운 곳은 잘 보이나 먼 거리는 잘 보이지 않는 근시가 나타나고, 반대로 얇아진 상태로 고착되면 먼 것은 그나마 보이지만 가까운 것이 잘 보이지 않는 원시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수정체의 신축성에는 문제가 없더라도 한계는 존재하는지라 무한정 두꺼워지거나 무한정 얇아질 수는 없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수정체의 신축성 한계는 대부분의 갓난아이들이 원시 상태로 태어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갓난아이의 안구 내부의 직경은 평균 16.8㎜ 정도로 이는 수정체가 아무리 신축성이 좋다 한들 상을 망막에 정확하게 맞춰 굴절시키기에는 지나치게 짧은 거리다. 따라서 갓난아이들은 대부분 원시 상태로 태어난다. 물론 이 원시는 아기의 성장에 따라 안구의 크기가 커지면서 대부분 해결되기는 하지만, 간혹 안구의 크기 자체가 수정체의 신축성을 넘어서는 사람들이 있다. 즉, 안구가 지나치게 짧거나 지나치게 긴 경우에는 수정체의 이상이 없이도 원시나 근시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나 안구는 보통 14살께면 성장을 멈추는데, 이후에도 안구가 계속해서 자라는 경우 상대적으로 수정체와 망막의 사이가 길어지면서 가까운 곳이 잘 보이지 않는 현상, 즉 축성 근시 증상을 겪게 된다. 이처럼 단순히 눈으로 들어오는 빛을 망막에 정확하게 맺히게 하는 과정에서조차도 필요한 게 이토록 많다. 더욱 신기한 것은 이 모든 과정이 의식하지 않아도 이루어지는 자동적인 과정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눈 깜짝할 새 말이다. 가을이 되니 잠자리들이 날아다니기 시작하고, 그에 비례해 잠자리를 잡아달라는 아이들의 요구도 늘어난다. 움직이는 생물체를 잡기 위해서는 그 생물체의 시선을 피해 사각지대에서 살금살금 접근하는 것이 필요한데,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의 시야를 파악하는 것이 매우 유리하다. 시야각에서 벗어나면 보이지 않을 테니 말이다. 대개 시선의 방향은 눈동자가 바라보는 방향으로 알 수 있다. 하지만 잠자리는 도통 알 수가 없다. 잠자리의 눈은 몸집에 비해서 매우 큰 편이기는 하지만, 눈동자가 없으니 시선의 방향도 시야의 각도도 파악하기 곤란하다. 잠자리가 어디를 보고 있는지 도통 알 수 없으니 잡자리의 시선에 내가 들어갔는지 알 길이 없다는 것이다.(그러니 제발 왜 잠자리 안 잡아주느냐고 타박하지 말자! 안 잡는 게 아니라 못 잡는 거다.) 잠자리의 눈은 곤충들 중에서도 특히나 크기로 유명한데, 이 큰 눈은 하나의 눈이 아니라 수많은 낱눈들이 모여 만들어진 겹눈이다. 겹눈을 이루는 낱눈의 수는 종에 따라 편차가 큰데, 그중에서도 잠자리는 겹눈 하나를 이루는 낱눈의 수가 2만8000개나 되는 것도 있다. 이 낱눈들은 크기는 작아도 볼록렌즈, 즉 빛을 굴절시키는 수정체의 구실을 하는 키틴 각막과 빛을 인식하는 망막세포를 8개 정도 지니고 있어 하나만 존재해도 볼 수 있을 정도다. 또한 낱눈의 내부에는 색소 입자를 지닌 색소세포가 존재하여 홍채처럼 빛의 유입량과 각도를 조절할 수 있다. 겹눈을 이루는 낱눈은 너무 작기 때문에 시력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지만, 이동하는 물체를 판별하는 능력은 매우 뛰어나다. 물체가 움직이는 경우, 여기서 반사되는 빛은 낱눈마다 따로따로 인식되어 마치 모자이크처럼 인지되기 때문이다. 삼엽충의 방해석 수정체와 오늘날 렌즈 5억년 전, 지구상에 나타난 최초의 눈인 삼엽충의 눈도 낱눈이 모인 겹눈이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삼엽충은 현대의 동물들처럼 부드러운 단백질로 이루어진 수정체가 아니라, 단단한 광물질인 방해석으로 이루어진 수정체를 이용해 세상을 보았다는 점이다. 인간이 시력의 한계를 확장하기 위해 광물질로 만들어진 렌즈를 이용하는 것은 어쩌면 눈이 최초로 만들어질 때부터 이미 정해진 것은 아니었을까.
이은희 과학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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