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둘기는 걸을 때마다 박자를 맞춰 고개를 주억거린다. 비둘기들은 왜 이토록 ‘헤드뱅잉’에 집착할까. 답은 눈, 정확히는 눈을 둘러싼 근육에 있다.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토요판] 하리하라 눈을 보다
(15) 눈을 움직이는 힘
(15) 눈을 움직이는 힘
지금도 기억한다. 대학교 3학년 가을, 이과대학 6층 생물학 실험실에서 있었던 일을. 그날도 여느 때와는 다름없는 날이었다. 그 느낌이 나를 덮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런 경험이 있는가, 방금 전까지 멀쩡하던 세상이 갑자기 빙그르르 돌아 뒤집히는 듯한 경험 말이다. 내 경우 그건 은유가 아니라 물리적인 경험이었다. 내가 바라보는 세상이 갑자기 무작위적으로 흔들렸다. 마치 사방팔방으로 회전하는 자이로스코프에 묶여버린 기분이었다. 동시에 누가 내 귓속에 물이라도 한 바가지 부어넣은 양 소리가 물에 잠기는 느낌도 찾아왔다.
어지러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건 빈혈이다. 의식은 명료했고 눈앞이 깜깜해진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내 눈은 흔들림만을 보여주었고, 내 귀는 소리를 전해주지 않았다. 뭔가 심상찮음을 깨달은 친구들은 나를 등에 업고 학교와 맞닿은 대학병원 응급실로 뛰어갔다. 몇 명의 의료진을 거쳐 내가 도착한 곳은 뜻밖에도 이비인후과 병동이었다. ‘메니에르’라고 했다. 메니에르란 평형감각을 담당하는 내이(內耳) 부근에 과도하게 림프액이 들어차면서 평형감각 소실, 심한 어지럼증, 이명과 난청, 구토 등의 증상을 동반하는 질병이었다. 일시적 청각 상실이 동반되는 극심한 어지럼증이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 되어 불쑥불쑥 내 삶에 끼어들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난 귀가 문제인데 의사는 왜 눈만 보았나
그 이후로 어지럼증을 이유로 내원할 때마다 의사는 내 얼굴에 스노클링을 할 때 쓸 것 같은 커다란 고글을 씌운 뒤, 내 눈동자를 유심히 바라보곤 했다. 종종 그 상태로 머리를 잡아 크게 흔들고 난 뒤, 다시 관찰하기도 했다. 가뜩이나 어지러운데 머리를 잡고 흔들다니! 화가 났지만, 그런 흉측한 고글을 쓰고 의사를 쏘아본들 부질없는 짓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의사가 눈으로 직접 관찰하던 수동형 고글은 컴퓨터에 연결되어 화면으로 눈동자를 관측할 수 있는 전자고글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의사들은 내가 어지러움을 느껴 병원을 찾을 때마다 내 눈동자의 움직임을 관찰하곤 한다. 어지럼증의 원인은 귀에 있는데, 왜 눈에 주목하는 것일까.
이유는 내 눈동자의 떨림 때문이었다. 눈을 떴을 때, 눈에 들어오는 모든 시야가 다 고르게 보이는 건 아니다. 특히나 사람은 중심 시력과 주변 시력의 차이가 크기 때문에 뭔가를 집중해서 보기 위해서는 시선, 정확히 말하자면 안구로 빛이 유입되는 동공을 보고자 하는 대상에 맞추어 눈동자를 움직여야 한다. 이는 쉬운 일이 아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꽤 잘 수행한다. 팔랑거리는 나비를 쫓아다니는 고양이처럼 그냥 대상을 쭈욱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 뭐가 어려운 것이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의 시야에서 가장 명확히 보이는 중심 시야는 매우 좁다. 사람의 시야각도는 좌우를 합쳐서 약 200°에 달하지만, 그중에서 정확히 인간의 볼 수 있는 시야는 1~2°에 불과하다. 시야각 1°란 엄지를 치켜들고 팔을 눈앞으로 쭉 뻗었을 때, 엄지의 손톱이 차지하는 크기 정도다. 즉, 사람의 시야에서 정확히 잘 보이는 범위는 문자 그대로 손톱만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일상에서 무언가를 정확히 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시선을 움직여야 한다. 또한 눈은 상하전후좌우로 움직임이 가능한 머리라는 이동장치에 놓여 있기 때문에 머리의 움직임과 몸의 흔들림을 고려하여 끊임없이 초점 거리를 재조정해야 한다. 우리가 길거리를 걷는 중에도 휴대폰 문자를 확인할 수 있거나 흔들리는 차 안에서 책을 볼 수 있는 이유는 이처럼 머리의 흔들림에도 굴하지 않고 순간순간 초점을 맞출 줄 아는 눈의 놀라운 미세조정 능력 때문이다. 그런데 메니에르처럼 내적 평형 감각에 이상이 생기는 경우, 눈은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다. 분명 귀에서 뇌로 전달하는 신호는 내 몸이 지금 마구잡이로 흔들리고 있음을 나타내지만, 눈이 보는 세상은 흔들리지 않음을 뇌에 전한다. 이 감각의 불일치로 인한 혼란은 다시 안구 운동에도 영향을 미쳐 눈동자가 불수의적으로 흔들리는 안구진탕증이 나타나게 된다. 지속적인 안구진탕증은 시력 저하를 동반하게 되고, 증상이 반복적으로 심각하게 나타나면 결국 시력을 잃을 수도 있기에 의사는 귀에 문제가 생긴 내 눈을 그토록 열심히 바라보았던 것이다.
모처럼 봄빛이 좋은 봄날, 아이들의 손을 잡고 공원에 나가니 어디서인지 비둘기들이 다가온다. 아이의 손에 들린 과자 부스러기가 탐이 났는지 훠이훠이 쫓아내도 잠깐 비켜서는 시늉만 할 뿐, 발가락이 부족한 다리로 다시 종종대며 따라오곤 한다. 그런데 가만 보니 뭔가 부조화스럽다. 손사래를 치면 나는 대신 슬쩍 비켜서는 모양새나 훨훨 나는 대신 종종거리며 걸어다니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움직임을 거부하는 듯한 몸과는 달리 매우 민첩하게 움직이고 있는 머리의 모양새가 그렇다. 비둘기는 걸을 때마다 박자를 맞춰 고개를 주억거렸고, 한자리에 못박힌 듯 멈춰 서 있을 때조차 머리는 사방으로 재빠르게 움직여댔다. 마치 1초에 한 번씩 뭔가에라도 놀라는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몸은 제자리에 붙박여 있으니 진짜로 놀라는 것 같지도 않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비둘기들은 이토록 헤드뱅잉에 집착하는 걸까?
답은 눈, 정확히는 눈을 둘러싸고 있는 근육에 있다. 비둘기는 사람과는 달리 안구를 움직이는 근육이 발달하지 않아 안구를 움직일 수 없다. 안구를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은 단순히 눈동자를 데굴데굴 돌릴 수 없다는 것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대부분 걷거나 움직이면서도 특정 대상을 보는 것이 가능하다. 걸어가며 가로수를 본다고 가로수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 것이다. 이는 우리 몸의 평형 센서가 머리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그에 맞춰 끊임없이 안근을 움직여 시야를 재조정한 결과다. 이 모든 과정이 특별히 인식하지 않아도 일어나기에 우리는 움직이면서도 물체를 보는 것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비둘기는 다르다. 비둘기는 안구를 움직이는 근육이 발달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이동하는 과정에서 초점이 맞지 않아 시야가 흐려질 수 있다. 이를 상쇄하기 위해 비둘기가 선택한 전략은 ‘꿩 대신 닭’이라는 표현처럼 눈 대신 머리를 움직이는 것이다. 앞으로 나가면 비둘기의 입장에서는 세상이 자신 쪽으로 다가오는 느낌이 든다. 일차적으로 비둘기는 이를 피하기 위해 목을 뒤쪽으로 쭉 뺀다. 하지만 머리라는 것이 어디까지나 어깨 위에 얹혀 있는 존재이므로 길게 늘이는 건 곧 한계에 부딪친다. 그럼 비둘기는 이번에는 다시 고개를 재빨리 앞으로 잡아당겨 몸과 같은 선에 가져다 놓고, 이 과정에서 시야를 재조정해 다시 뚜렷한 시야를 확보한다. 그래서 비둘기는 걸을 때마다 발걸음에 맞춰 리드미컬한 목운동을 반복하는 것이다.
우리는 길 걸으며 문자 확인하고
흔들리는 차에서 책 볼 수 있다
눈의 놀라운 미세조정능력으로
순간순간 초점 맞출 수 있어
비둘기는 그게 안돼 머리 움직여 사람의 안구 측정한 논문 따르면
눈을 위아래로 꼬나보기보다는
좌우로 흘겨보기가 더 쉬우며
치켜뜨기보다는 내리깔기가,
안보다는 밖으로 굴리기가 수월 눈을 움직이는 여섯가닥의 근육 만약 우리가 비둘기처럼 생겨먹었다면 누구나 맷돌춤의 대가가 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눈을 움직일 수 있는 근육이 있기에 맷돌춤은 본능적 몸짓이 아니라 다년간의 연습의 결과일 뿐이다. 천만다행한 일이다. 사람의 머리는 꽤 무겁기 때문에 우리가 비둘기처럼 고개를 주억거리고 다닌다면 목 디스크는 인류 최대의 질병이 될 테니. 어쨌든 사람의 눈에는 비둘기와는 달리 비교적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여섯 가닥의 근육이 붙어 있기에 상대적으로 머리를 덜 움직여도 괜찮다. 물론 비둘기에 비해서 덜 움직여도 된다는 것이지 그렇다고 머리를 안 움직여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앞서 말했듯 사람은 애초에 시야각 자체가 좁은 편인데다 중심 시야도 좁아서 눈을 움직이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니 무언가 더 잘 보고 싶은 것이 있으면 고개를 돌리고 목을 쭉 빼야 하는 건 어쩔 수 없다. 다만 안근이 이 수고를 조금 덜어주는 것뿐. 눈에 붙은 4개의 직근은 각각 위아래와 좌우 방향의 운동을 담당하고, 2개의 사근은 안쪽과 바깥쪽의 회전운동을 담당한다. 이 여섯 개의 근육 덕에 우리는 눈을 치켜뜨거나 내리깔 수 있으며, 곁눈질을 하거나 눈을 모을 수도 있고, 눈동자를 빙글빙글 돌리는 것도 가능하다. 다만 그 정도가 모두 같지는 않다. 안근의 움직임 정도를 측정한 논문에 따르면, 사람들은 수직 방향보다 수평 방향의 시야가 더 넓으며, 상하 중에서는 아래쪽의 시야가 더 넓었으며, 회전운동에서는 안쪽(코 쪽)이 바깥쪽(귀 쪽)보다 더 용이한 것으로 조사된 바 있다. 즉, 사람들은 눈을 위아래로 꼬나보기보다는 좌우로 흘겨보는 것을 더 잘할 수 있으며, 눈을 치켜뜨기보다는 눈을 내리까는 것이 더 쉽고, 눈을 안으로 굴리는 것보다 밖으로 눈을 돌리는 게 더 어렵다는 뜻이다. 뒤돌아서 눈 흘기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면전에서 대놓고 위아래로 훑어보는 것은 상대보다 내가 우위에 있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인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다. 이렇듯 생체에서 직접적인 움직임을 담당하는 것은 근육이지만, 근육이 제 할 일을 하도록 조정하는 것은 신경이다. 따라서 신경과 근육은 협동 관계에 놓여 있기 마련이다. 협동 관계에 놓여 있다고 반드시 그 비율이 같지는 않다. 인간 사회에서도 명령을 내리는 존재보다는 실제 일을 수행하는 사람이 더 많아야 하듯이, 실제 신경섬유 하나가 10~1000여개의 근섬유를 관장한다. 그런데 눈에서만은 다르다. 안근에 존재하는 신경과 근육의 비율은 1:1에서 많아도 1:5를 넘어서지 않는다. 이렇듯 근육섬유 하나하나를 신경섬유가 하나씩 전담 마크해서 조절하기 때문에 안근은 우리 몸의 근육 중에서 가장 반응 속도가 빠른 근육 중 하나가 되었다. 우리 눈이 초점 범위가 그토록 좁음에도 불구하고 움직이는 것을 보는 데 큰 불편을 느끼지 않는 것은 이처럼 눈의 신경과 근육의 협업이 매우 미세하고 정교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단점도 생긴다. 하나의 신경이 적은 수의 근육만을 담당하다 보니 아주 작은 자극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고 그 결과 눈 근육은 많은 양의 산소를 필요로 할 뿐 아니라, 매우 쉽게 피로해진다. 밤을 새워 일을 하는 경우, 눈이 가장 먼저 피곤하다는 신호를 보내오는 건 이 때문이다. 사람의 눈은 의식하지 않는 순간에도 끊임없이 움직인다. 그건 기본적으로 눈이 달린 우리의 몸 자체가 움직이는 대상이면서 동시에 우리를 둘러싼 주변 환경들이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에 맞춰 우리의 눈도 바쁘게 움직이기 마련인데, 이는 특정 대상에 눈길이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음으로 읽힐 수도 있다. 사람들은 뭔가 의미를 찾으면 시선을 고정해 대상을 응시하며, 누군가에게 시선이 꽂힌다는 것은 십중팔구 그에게서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물론 괴상하고 끔찍해도 시선이 쏠릴 수 있지만, 대부분은 곧 눈을 돌려버리기 때문에 지긋이 바라본다는 것 자체가 많은 의미를 가진다. 사람들이 좋아하고 끌리는 것에 눈길을 주고 그것이 정말 마음에 들면 눈을 떼지 못한다는 사실은 마케팅을 연구하는 이들이 ‘아이 트래킹’(eye tracking)에 대한 연구에 주목하는 계기가 되었다. 시선의 움직임 추적하는 ‘아이 트래킹’ 아이 트래킹이란 말 그대로 시선의 움직임을 추적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시선을 추적해 좀더 많이 시선이 쏠리는 위치, 색깔, 모습 등을 찾아낼 수 있다면, 이를 역으로 이용해 자신들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을 사람들의 시선 범위 속에 더 잘 노출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기업들이 골프 선수의 모자나 축구 선수의 등판에 자신들의 브랜드 네임과 로고를 새기기 위해 천문학적인 돈을 지불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자체가 걸어다니는 시선 집합소인 스타들에게 자신들의 이름을 덧칠하면서 자연스레 사람들의 시선 속에 그들의 로고를 인식시키고, 스타들에 대한 선망이 브랜드에 대한 소유 욕구로 이어지기를 노리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중용의 도가 필요하다. 여기 두 사람이 있다. 둘 다 실력 면에서는 남부럽지 않은 최고의 운동선수들이지만, 한쪽은 평범한 외모를 가졌고 다른 쪽은 뛰어난 외모를 가지고 있다. 만약 이들을 모델로 섭외하는 비용이 동일하다면 아마도 광고주는 대부분 후자를 섭외하려고 할 것이다. 뛰어난 외모란 그 자체로도 시선을 집중시키는 훌륭한 요소이니까. 하지만 실제 아이 트래킹을 통해 마케팅 기법을 연구하는 이들의 연구에 따르면, 모델의 외모가 지나치게 뛰어날 경우 사람들의 시선 주목도는 높아지지만 그것이 이들이 광고하는 브랜드의 인지도에 미치는 영향은 오히려 떨어진다고 한다. 즉, 사람들은 모델의 뛰어난 외모에 반해 이들에게만 시선을 고정할 뿐, 정작 그들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기 위해 돈을 쓴 배경에는 무관심해진다는 것이다. 이 모두 시야가 매우 좁고 집중돼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나무를 보면 숲이 보이지 않고, 사랑에 빠지면 눈이 머는 것은 어쩌면 인간이라는 존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애초부터 그렇게 만들어졌기 때문은 아닐까.
이은희 과학 작가
▶ 하리하라 본명 이은희. 생물학을 전공해 연구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으나, 우연히 인터넷 블로그에 썼던 글들이 <하리하라의 생물학 카페> 등 책으로 묶여 나오면서 과학언론학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현재는 과학작가이자 강연자로 살고 있다. ‘하리하라’라는 인터넷 아이디를 필명으로, 세상에 퍼져 있는 과학에 대한 선입견과 오해를 걷어내는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고 있다. <한겨레> 토요판에서 격주로 ‘인간의 눈’과 본다는 것의 의미를 탐구한다.
흔들리는 차에서 책 볼 수 있다
눈의 놀라운 미세조정능력으로
순간순간 초점 맞출 수 있어
비둘기는 그게 안돼 머리 움직여 사람의 안구 측정한 논문 따르면
눈을 위아래로 꼬나보기보다는
좌우로 흘겨보기가 더 쉬우며
치켜뜨기보다는 내리깔기가,
안보다는 밖으로 굴리기가 수월 눈을 움직이는 여섯가닥의 근육 만약 우리가 비둘기처럼 생겨먹었다면 누구나 맷돌춤의 대가가 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눈을 움직일 수 있는 근육이 있기에 맷돌춤은 본능적 몸짓이 아니라 다년간의 연습의 결과일 뿐이다. 천만다행한 일이다. 사람의 머리는 꽤 무겁기 때문에 우리가 비둘기처럼 고개를 주억거리고 다닌다면 목 디스크는 인류 최대의 질병이 될 테니. 어쨌든 사람의 눈에는 비둘기와는 달리 비교적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여섯 가닥의 근육이 붙어 있기에 상대적으로 머리를 덜 움직여도 괜찮다. 물론 비둘기에 비해서 덜 움직여도 된다는 것이지 그렇다고 머리를 안 움직여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앞서 말했듯 사람은 애초에 시야각 자체가 좁은 편인데다 중심 시야도 좁아서 눈을 움직이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니 무언가 더 잘 보고 싶은 것이 있으면 고개를 돌리고 목을 쭉 빼야 하는 건 어쩔 수 없다. 다만 안근이 이 수고를 조금 덜어주는 것뿐. 눈에 붙은 4개의 직근은 각각 위아래와 좌우 방향의 운동을 담당하고, 2개의 사근은 안쪽과 바깥쪽의 회전운동을 담당한다. 이 여섯 개의 근육 덕에 우리는 눈을 치켜뜨거나 내리깔 수 있으며, 곁눈질을 하거나 눈을 모을 수도 있고, 눈동자를 빙글빙글 돌리는 것도 가능하다. 다만 그 정도가 모두 같지는 않다. 안근의 움직임 정도를 측정한 논문에 따르면, 사람들은 수직 방향보다 수평 방향의 시야가 더 넓으며, 상하 중에서는 아래쪽의 시야가 더 넓었으며, 회전운동에서는 안쪽(코 쪽)이 바깥쪽(귀 쪽)보다 더 용이한 것으로 조사된 바 있다. 즉, 사람들은 눈을 위아래로 꼬나보기보다는 좌우로 흘겨보는 것을 더 잘할 수 있으며, 눈을 치켜뜨기보다는 눈을 내리까는 것이 더 쉽고, 눈을 안으로 굴리는 것보다 밖으로 눈을 돌리는 게 더 어렵다는 뜻이다. 뒤돌아서 눈 흘기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면전에서 대놓고 위아래로 훑어보는 것은 상대보다 내가 우위에 있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인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다. 이렇듯 생체에서 직접적인 움직임을 담당하는 것은 근육이지만, 근육이 제 할 일을 하도록 조정하는 것은 신경이다. 따라서 신경과 근육은 협동 관계에 놓여 있기 마련이다. 협동 관계에 놓여 있다고 반드시 그 비율이 같지는 않다. 인간 사회에서도 명령을 내리는 존재보다는 실제 일을 수행하는 사람이 더 많아야 하듯이, 실제 신경섬유 하나가 10~1000여개의 근섬유를 관장한다. 그런데 눈에서만은 다르다. 안근에 존재하는 신경과 근육의 비율은 1:1에서 많아도 1:5를 넘어서지 않는다. 이렇듯 근육섬유 하나하나를 신경섬유가 하나씩 전담 마크해서 조절하기 때문에 안근은 우리 몸의 근육 중에서 가장 반응 속도가 빠른 근육 중 하나가 되었다. 우리 눈이 초점 범위가 그토록 좁음에도 불구하고 움직이는 것을 보는 데 큰 불편을 느끼지 않는 것은 이처럼 눈의 신경과 근육의 협업이 매우 미세하고 정교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단점도 생긴다. 하나의 신경이 적은 수의 근육만을 담당하다 보니 아주 작은 자극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고 그 결과 눈 근육은 많은 양의 산소를 필요로 할 뿐 아니라, 매우 쉽게 피로해진다. 밤을 새워 일을 하는 경우, 눈이 가장 먼저 피곤하다는 신호를 보내오는 건 이 때문이다. 사람의 눈은 의식하지 않는 순간에도 끊임없이 움직인다. 그건 기본적으로 눈이 달린 우리의 몸 자체가 움직이는 대상이면서 동시에 우리를 둘러싼 주변 환경들이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에 맞춰 우리의 눈도 바쁘게 움직이기 마련인데, 이는 특정 대상에 눈길이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음으로 읽힐 수도 있다. 사람들은 뭔가 의미를 찾으면 시선을 고정해 대상을 응시하며, 누군가에게 시선이 꽂힌다는 것은 십중팔구 그에게서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물론 괴상하고 끔찍해도 시선이 쏠릴 수 있지만, 대부분은 곧 눈을 돌려버리기 때문에 지긋이 바라본다는 것 자체가 많은 의미를 가진다. 사람들이 좋아하고 끌리는 것에 눈길을 주고 그것이 정말 마음에 들면 눈을 떼지 못한다는 사실은 마케팅을 연구하는 이들이 ‘아이 트래킹’(eye tracking)에 대한 연구에 주목하는 계기가 되었다. 시선의 움직임 추적하는 ‘아이 트래킹’ 아이 트래킹이란 말 그대로 시선의 움직임을 추적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시선을 추적해 좀더 많이 시선이 쏠리는 위치, 색깔, 모습 등을 찾아낼 수 있다면, 이를 역으로 이용해 자신들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을 사람들의 시선 범위 속에 더 잘 노출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기업들이 골프 선수의 모자나 축구 선수의 등판에 자신들의 브랜드 네임과 로고를 새기기 위해 천문학적인 돈을 지불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자체가 걸어다니는 시선 집합소인 스타들에게 자신들의 이름을 덧칠하면서 자연스레 사람들의 시선 속에 그들의 로고를 인식시키고, 스타들에 대한 선망이 브랜드에 대한 소유 욕구로 이어지기를 노리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중용의 도가 필요하다. 여기 두 사람이 있다. 둘 다 실력 면에서는 남부럽지 않은 최고의 운동선수들이지만, 한쪽은 평범한 외모를 가졌고 다른 쪽은 뛰어난 외모를 가지고 있다. 만약 이들을 모델로 섭외하는 비용이 동일하다면 아마도 광고주는 대부분 후자를 섭외하려고 할 것이다. 뛰어난 외모란 그 자체로도 시선을 집중시키는 훌륭한 요소이니까. 하지만 실제 아이 트래킹을 통해 마케팅 기법을 연구하는 이들의 연구에 따르면, 모델의 외모가 지나치게 뛰어날 경우 사람들의 시선 주목도는 높아지지만 그것이 이들이 광고하는 브랜드의 인지도에 미치는 영향은 오히려 떨어진다고 한다. 즉, 사람들은 모델의 뛰어난 외모에 반해 이들에게만 시선을 고정할 뿐, 정작 그들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기 위해 돈을 쓴 배경에는 무관심해진다는 것이다. 이 모두 시야가 매우 좁고 집중돼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나무를 보면 숲이 보이지 않고, 사랑에 빠지면 눈이 머는 것은 어쩌면 인간이라는 존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애초부터 그렇게 만들어졌기 때문은 아닐까.
이은희 과학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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