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누구나 아는 그리스 산토리니. 그곳의 매력은 거저 나오지 않았다. 자연과 역사와 사회환경이 맞물려 형성된 토속의 아름다움은 수많은 사람의 노력으로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관광객과 돈이 몰리면 개인의 욕망이 부풀어 오르고, 도시의 매력도 조금씩 훼손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산토리니는 그렇게 놔두지 않았다.
우르릉 쾅쾅. 기원전 1613년 산토리니에서 발생한 화산폭발은 48~64시간 동안 지속되며 60㎦에 이르는 화산재와 부석(pumice)이라 불리는 화산석 등을 공중에 흩뿌렸다. 이는 집 6400만채와 맞먹는 부피다. 폭발의 충격은 지구적인 충격을 줬다. 화산에서 튀어나온 화산재 등은 성층권에까지 도달할 정도였다. 2주간 어둠이 깔렸고, 2년간 겨울이 지속되었다. 지금도 북반구 전역에서 그 증거를 찾을 수 있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폭발이었다. 섬 전체에 쌓인 하얀 화산재의 두께가 60m에 달했다. 시간이 흐르고, 사람들이 다시 이 땅을 찾으며 전통적인 건축물이 자연스럽게 탄생하게 되었다.
지난 달 26일 그리스 산토리니 이아 마을에서 만난 건축가 야니스 비티스가 산토리니 토속 건축의 특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는 2008년부터 산토리니에서 활동 중이다.
“딱딱딱딱.” 지난달 26일(현지시간) 오후, 산토리니 이아 마을에서 만난 건축가 야니스 비티스는 손으로 땅을 파는 시늉을 하며 입으로는 이런 소리를 냈다. 이아 마을은 국내에서 포카리스웨트 광고로 유명한 곳이다. 산토리니 사람들은 화산재를 파고들어가 집을 만들었다. 워낙 건조한 땅이라 나무가 잘 자라지 않는 곳이다. 그러다 보니 집의 구조체로 사용할 만한 목재를 구하기 어려웠다. 대신 화산재로 구성된 지층을 동굴처럼 파고들어가면 훌륭한 집을 만들 수 있었다. 화산재는 시멘트와 거의 비슷한 성질을 갖는다. 동굴을 팔 때 무너지지 않게 하려면 좁고 길게 파고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입구에 들어가면 거실, 침실, 창고 등이 차례로 등장하는 일자형 평면구조가 이곳 건축물의 특징이다. 비티스는 “모든 동굴집은 하나의 입구만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곳은 워낙 건조해서 집을 지을 만한 나무를 구할 수 없었고, 사람들은 하얀 화산재에 구멍을 파고들어가 살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동굴주택은 이곳의 강렬한 자외선과 강풍을 피하기에도 적합했다. 그렇게 산토리니 섬의 역사는 시작됐다.
그렇게 만들어진 토속 건축물은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훌륭한 경관을 연출했다. 우리가 인터넷에서 흔히 보는 이곳의 경관은 단순한 ‘사진발'이 아니다. 평범한 사람도 바다와 건축물을 손쉽게 카메라의 한 프레임 안에 넣을 수 있다. 화산폭발로 칼데라가 형성됐고, 그로 인해 바다 쪽으로 열린 형태의 초승달 모양의 지형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산토리니의 바다는 모두에게 열려 있다.
3600여년 전 지중해의 화산폭발
사람들은 동굴 파서 집을 지었다
좁고 길게 파들어간 일자형 주택
빗물 받을 수 있고 바다가 보이는
평평한 옥상은 다른 집 베란다 되어
토속적인 수직도시가 탄생했다
시 당국, 수직도시 경관 보전 위해
마당 바닥재, 그늘막 형태까지 권고
‘풍경의 개성' 해치는 맥도널드 금지
대형호텔 체인도 설립 안 되고
2층 이상 건물도 신축 금지…
그래서 바다는 ‘모두의 것' 되었다
더욱 놀라운 점은 과거 형성된 마을의 형태적 특성이 지금까지도 거의 그대로 남아 있다는 점이다. 피라 마을의 한 매장에서 판매 중인 옛 사진들을 보니, 1930년대의 산토리니도 지금의 모습과 놀랍도록 똑같았다. 함께 간 최이규 계명대 교수(도시학부)는 “이 아름다운 경관은 거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에어컨 실외기나 휴대전화 안테나 같은 것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현대의 풍요로움과 그것을 향한 욕망은 이곳의 아름다움을 훼손하기에 충분하다. 이곳의 아름다움이 어떻게 완성됐는지와 함께 산토리니 사람들이 욕망을 어떻게 제어하고 있는지가 이번 여정의 핵심 과제였다.
변하지 않은 풍경의 귀중함
산토리니의 건축은 기본적으로 화산폭발에 따른 부산물을 재료로 이용한다는 점에서 ‘토속적'(vernacular)이라는 표현이 붙는다.
산토리니 사람들은 동굴을 파고 살며 익힌 재주를 이용해 동굴이 아닌 집도 지었다. 화산폭발로 나온 부석은 가볍지만 강도가 셌다. 이 부석을 세우고, 화산재를 시멘트 삼아 벽체를 세웠다. 화산재에는 석회 가루를 섞어 강도를 더했다. 하얀색 회반죽을 외장재 삼아 표면을 덮었다. 하얀 회반죽은 이곳의 강렬한 빛을 반사시켜 주는 동시에, 만약 내부에서 구조적 문제가 생길 경우 크랙(금)으로 경고를 해줄 수 있다. 절벽 위쪽에 화산재로 형성된 지층이 있기도 했지만, 해적의 침입도 잦았기 때문에 바다를 바라보는 방향으로 숨겨진 계곡 위주로 자리를 잡았다.
건조한 날씨에 의해 목재가 부족해 석재의 압축력을 기반으로 한 건축물을 개발하게 됐다. 수직력을 견디기 위한 방안으로 아치 형태의 지붕이 나오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아치 지붕이 수직의 하중을 수평으로 작용하게 하기 때문에 이를 견딜 수 있게 벽체는 두꺼워졌다. 1956년 이곳을 완전히 파괴한 대지진 이후에는 아치형 지붕이 더욱 늘어났다.
아치 위에 평평한 옥상을 추가로 덧붙이는 경우도 있었다. 천장이 이중으로 돼 여름엔 시원하게, 겨울엔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효과가 있었고, 빗물 수집도 쉽게 해줬다. 매우 건조한 이곳에서 옥상은 빗물 수집용으로 아주 중요했다. 살짝 기울기를 줘 빗물을 아래쪽으로 흐르게 해 ‘시스턴’이라는 이름의 빗물받이에 저장하도록 했다. 섬의 꼭대기 부위에 화산재가 쌓였고, 가파른 절벽 지형을 이루고 있어서 누군가의 집 옥상은 또다른 이의 집 베란다로 활용됐다. ‘수직도시’가 된 것이다. 비티스는 “지금도 소유 관계가 복잡하다”고 말했다.
아주 단순한 형태에 두꺼운 벽체, 얇은 아치, 좁은 입구, 하얗고 부드러운 곡선의 단순한 외형을 가진 산토리니 건축물은 이렇게 탄생했다. 산토리니 전역에서 볼 수 있는, 이런 흰 건축물의 이름은
이포스카포스(Yposkafos)다. 하지만 선장이나 귀족 등과 같은 부유층의 주택은 달랐다. 빽빽한 절벽지에 집을 짓는 대신, 꼭대기 평지에 집을 지었다. ‘선장의 집’으로 통칭되고 있는
카페타노스피타(Kapetanospita)다. 1850년께부터 지어지기 시작한 선장의 집은 프랑스 같은 곳에서 볼 만한 건물과 비슷한 느낌의, 화려한 장식이 더해졌다. 유럽 전역을 다녀온 선장들은 당시 유행한 신고전주의 건축양식을 따라 하고 싶어 했다.
그리스 아테네국립공과대학의 타노스 스타시노풀로스는 2006년 발표한 논문 ‘산토리니 건축물의 4가지 요소에서 찾아낸 토속적 지속가능성에 대한 고찰’에서 “지형과 기후조건 등에 적응해 나가는 사회 진화의 한 형태”라고 소개했다. 건축물은 사람들이 그 장소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여준다. 산토리니의 화산폭발과 그에 따른 지형 조건, 지중해성 기후 등은 이곳 특유의 건축을 만들어낸 셈이다. 외부에서 들여온 건축 재료가 아닌, 이곳 자연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를 그대로 써 만들어낸 건축은 인공이면서도 인공이 아니었다. 아름다운 자연과의 조화는 태생적으로 당연한 것이었다.
산토리니의 대표적인 건축 형태 3가지. 교회(왼쪽 위), 카페타노스피타(오른쪽 위), 이포스카포스(왼쪽 아래). 건축 재료는 현무암과 같은 성질의 부석을 쌓아 올린 뒤 시멘트와 같은 화산재를 덮어 완성했다. 오른쪽 아래 사진은 화산재가 벗겨져 안쪽의 부석이 그대로 보이는 상태다.
지난 달 25일 그리스 산토리니 피라마을에서 바다를 향해 바라본 풍경. 스마트폰의 파노라마 기능을 이용해 사진을 찍었다. 하얀 회반죽으로 덮인 건물과 부겐빌레아의 빨간 꽃이 푸른 바다와 하늘, 붉은 태양과 어우러지며 장관을 연출한다.
개인의 욕망을 제어하는 방법
그렇다면 이곳 특유의 건축과 지형, 그에 따라 나타난 경관은 어떻게 지금까지도 유지될 수 있었을까. 지난달 27일 오전 티라시청에서 만난 마르코스 카푸로스 부시장은 이런 질문을 던지자, 149쪽에 걸쳐 수많은 사진이 담겨 있는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한겨레> 인터뷰에 응한 카푸로스 부시장은 선출직인 니콜라오스 조르조스 시장 재임 시작 때인 2014년 9월부터 시정 활동을 펼치고 있다.
27일 오전 티라시 시청에서 만난 마르코스 카푸로스 부시장.
카푸로스 부시장이 내놓은 <산토리니 전통 주거지에서 작은 규모의 건축 계획>이란 제목의 책에는 부제로 ‘사례를 통해 본 실무 가이드'라고 적혀 있었다. 놀라운 것은 이 책에 적힌, 다양하면서도 세세한 사례들이다. 책은 각종 사례를 사진으로 보여주며, ‘좋음, 중간, 나쁨’으로 분류해 명확한 기준을 제시했다. 예컨대 마당의 바닥재에 대해 “건물의 재료를 그대로 살린 하얀색 회반죽이 바람직하다”라거나, “흰색 페인트로 규칙적으로 도색하는 것도 깔끔하다”고 소개했다. “건축물과 어울리지 않는 세라믹 타일이나 공장에서 찍어낸 대리석을 사용하면 어울리지 않는다”며 재료의 제한을 명확히 하는가 하면, 에어컨 실외기를 숨기는 방식, 건물의 계단과 난간을 만드는 방식의 좋은 예와 나쁜 예도 소개했다. “계단은 흰색 회반죽을 활용해 모서리를 둥글게 처리하는 게 토속 건축물에 어울린다”는 식이다. 이곳 토착 덩굴식물인 부겐빌레아를 이용해 그늘막을 만드는 방법까지도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으니, 어느 정도로 세밀한지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또 책은 길거리의 조명이나 골목길 바닥재의 모양도 어떤 것이 바람직한지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려준다.
에어컨 실외기, 맥도널드, 고층건물 없는 도시
하지만 이 수많은 사례들은 ‘권고'일 뿐, 강제 규정은 아니다. 카푸로스 부시장은 “1980년부터 중앙정부가 여러 종류의 도시계획 규칙을 정해두고 있었지만, 관광객이 크게 늘어나면서 2년 전부터 이런 식으로 추가로 관리하기 시작했다”고 소개했다. 시에 따르면, 산토리니의 관광객은 2012년 169만1027명에서 지난해 235만9727명으로 3년 만에 67만명 정도 늘었다. 그는 “권고이다 보니 공공건물을 지을 때는 이런 기준을 잘 따르지만, 개인 건물을 지을 때는 규제하기 어려운 면이 많다”면서도 “이제는 교육과 홍보가 많이 되어서 개인들도 산토리니 전체의 아름다움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미 지어진 건물을 관리하는 데는 각자의 공감대가 필요하지만, 건물을 새로 지을 때는 이런 기준이 강력하게 적용된다. 건축가 비티스는 “신축할 때는 설계안이 건축협의회 심의를 통과해야 하는데, 협의회에서는 건축물 파사드의 색깔은 물론 창문의 크기까지 세세하게 체크한다”고 설명했다. 비티스는 이아 마을에서 한 창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렇게 창문을 크게 달면 안 된다”고 말했다. 특히 바다를 향한 경관권은 가장 중요하다. 어떤 건물도 7m, 2층을 넘게 지을 수 없다. 이 제한선에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뒤쪽 건물의 경관권을 침해할 정도의 높이는 허용되지 않는다.
시 당국의 세밀한 도시관리의 사례는 이 밖에도 또 있다. 바람이 굉장히 센 지역적 특성을 활용해 풍력발전은 하지 않느냐는 최 교수의 질문에 카푸로스 부시장은 “경관을 해칠 수 있어 풍력발전은 하지 않는다. 태양광발전도 아름다움을 훼손하기 때문에 고민이 크다”고 강조했다. 그는 “단, 원자력발전은 도입하지 않을 생각”이라고 했다. 현재는 석유를 이용해 전기를 발전하고 있지만, 2년 안에 천연가스로 바꿀 계획이라고 했다.
중앙정부도 이곳의 도시 경관에 대한 규제를 내놓고 있다. 맥도널드와 같은 프랜차이즈 업체나, 하이엇·힐튼 같은 대형 호텔 체인도 허용하지 않는다 카푸로스 부시장은 “그건 미국 스타일”이라고 잘라 말했다. 작은 상점, 작은 호텔이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는 모습은 이곳의 트레이드 마크다. 최 교수는 “오밀조밀한 상점이 작은 골목길을 따라 형성되어 있는 점이 이곳 특유의 매력을 잘 살리고 있다”고 말했다. 마치 국내의 ‘뜨는 거리'와 비슷하게, 서울의 상수 지역처럼 작은 골목길을 따라 작은 상점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다. 각자의 개성을 바탕으로 다양성을 이루며 배열된 건물들은 이곳 건축 특유의 색깔과 형태 등의 통일성을 유지하며 아름다움을 연출했다.
물론 정부가 이런 식으로 도시 곳곳에 대해 세밀하게 관리하는 것이 꼭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관리 내용이나 방식이 후진적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관리 내용 자체가 좋지 않으면 오히려 도시가 망가질 수 있다. 건축물과 어울리는 골목길의 바닥재를 선택하는 것 자체에 그리스라는 나라의 대중적인 미적 감각, 문화적 수준을 엿볼 수 있는 셈이다.
지난 달 25일 그리스 산토리니 피라마을에서 한 관광객이 길 옆 낮은 담장에 걸터 앉아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담장을 낮추어 바다를 얻다
경관을 위한 세밀한 도시관리는 세계인들이 사랑하는 산토리니의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하얗고 부드러운 파사드의 건축물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는 도시의 모습, 그리고 그 도시가 푸른 바다를 향해 아름답게 고개를 내밀고 있는 경관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정도의 무한한 가치를 담고 있다. 코발트블루색의 아름다운 바다를 유지하기 위해 산토리니에는 5개의 하수처리장이 풀가동된다. 낚시 같은 수변 활동에 대해서도 시기를 정해 제한적으로만 이용할 수 있게 하고 있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카푸로스 부시장은 “관광객은 양보다 질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산토리니에 놀러온 관광객들이 만족하고 돌아가야 앞으로도 이곳의 관광업이 지속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관광객이 크루즈를 타고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올 경우 섬이 제대로 소화할 수 없다는 생각에, 시간대를 정해 관광객을 분산시키는 노력도 한다.
지난 달 26일, 해가 질 무렵이 되자 그리스 산토리니 이아 마을을 찾은 관광객들이 바다 속으로 지는 태양의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하려고 일제히 카메라를 들었다.
이를 바탕으로 산토리니 사람들이 얻은 것은 무얼까. 그것은 바로 섬이 향하고 있는 서쪽 바다로 저무는 태양이다. 그리고 그걸 어디에서든 쉽게 즐길 수 있는 공간을 창출해냈다. 이곳엔 바다 쪽에 설치된 담장조차도 허리춤 밑으로 설치돼 있다. 이곳에 걸터앉아 바라보는 석양은 산토리니 최고의 관광 상품이다. 저녁때면 이곳을 찾은 모든 이가 담장에 주욱 걸터앉는다. 푸른 바다를 붉게 물들이며 태양이 가라앉는 순간, 모두들 박수치며 환호했다. 지구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석양이 이렇게나 특별할 수 있을까.
산토리니/글·사진 음성원 기자
esw@hani.co.kr 인포그래픽 노수민 기자
bluedahlia@hani.co.kr
해양문화 콘텐츠로 성공한 사례를 돌아봄으로써 우리 바다의 미래를 가늠해보는 이 시리즈는 한국해양수산개발원과 공동 기획으로 매주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