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잡지 <현대>에 실린 소설가 박경리에 대한 기사. 당시 그가 갖고 싶어했던 것은 라디오 한 대였는데, 지금이라면 무엇을 갖고 싶어할까. 박경리는 2008년 세상을 떠났다.
1979년에 나온 ‘비디오가 라디오 스타들을 없애버렸네’(Video Killed the Radio Star)라는 팝송은 한국에서도 인기를 끌었다. 라디오 시대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노래한 이 곡은 얄궂게도 1981년에 미국의 유명 음악전문 채널인 엠티브이(MTV)가 개국하면서 최초로 방송한 뮤직비디오이기도 했다.
우리나라는 그래도 라디오 시대가 꽤 오래 지속하였다고 할 만하다. 1980년 말에 컬러텔레비전 방송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진정한 비디오 시대가 왔다고 보기 어려울 터이다. 한국의 라디오 방송은 일제강점기이던 1927년 경성방송국(KBS 제1라디오의 전신)이 시초이며, 195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전국에 30만대 정도의 라디오 수신기가 보급된 상태였다. 그러나 대부분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어서 정부가 농촌에 라디오를 나누어주는 사업을 벌였다고 한다.
1958년 4월호 <현대>에는 당시 신인작가였던 박경리의 몇 마디 말이 사진과 함께 실려 있다.
‘취미라고는 음악감상 하는 것, 그러나 음악감상실 같은 데 가기는 싫다. 수년래의 숙원은 라디오 사는 것에 있다. 그러나 아직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일몰의 시각이 오면 다방에 나가게 버릇되어 버렸다. 나의 가난한 문우들을 대함으로써 내게 이는 불안의식을 무마시키려는 것이다.’
몇 년째 라디오 하나 장만하는 게 소원이라는 대목이 눈에 띈다. 당시 박경리는 한국전쟁 때 남편을 잃고 혼자 딸 하나를 키우고 있던 32살의 홀어미였다. 등단 3년 차의 신인작가로서 그 전해에 제3회 현대문학상을 받아 문단에 이름을 알린 참이었다.
그가 숙원이라고까지 표현하면서 원했던 라디오는 어떤 의미였을까? 라디오가 없는 대신 동료 문인들이 있는 다방에 나가면서 불안의식을 무마시킨다고 했는데, 아마 그 불안감의 상당 부분은 세상과의 소통 욕구가 채워지지 못하는 허전함 아니었을까? 텔레비전이나 피시, 스마트폰, 인터넷, 에스엔에스 등이 아예 없던 시절이다. (당시 한국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인 HLKZ-TV라는 민간방송국이 있었지만 텔레비전 수상기가 1000대도 되지 않을 만큼 서민들과는 거리가 먼 매체였다) 다방에라도 나가 사람들을 만나지 않는 한 그는 자신을 둘러싼 일상 바깥의 세상과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음악감상은 좋아하지만 음악감상실에 가고 싶지는 않다는 말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가 된다. 혼자 즐기는 목적으로 나들이하기는 내키지 않았을 것이다.
박경리를 소개한 <현대>라는 잡지도 흥미롭다. 당시 인기 여성잡지 <여원>을 발행하던 여원사에서 1957년에 새로 창간한 종합교양지로서, 박경리가 등단했던 <현대문학>과는 다른 곳이다. <현대>의 창간 편집장을 했던 임방현이 훗날 회고한 바에 따르면 일본의 <문예춘추>나 <중앙공론>을 모델 삼아 야심 차게 시작했으나 기대만큼 판매되지 않아 결국 반년 정도 만에 폐간했다고 한다. (그 뒤 임방현은 일간지 기자로 활동하다가 박정희 정권 시절에 청와대 대변인을, 80년대에는 민정당 국회의원을 두 차례 지냈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사람들이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은 더 다양해지고 긴밀해졌다. 게다가 라디오나 텔레비전과는 달리 이제는 쌍방향 매체들이 주류이다.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이기도 훨씬 쉬워졌다. 그런 한편으로 에스엔에스 중독이나 인터넷의 신상털기 같은 폐해도 심각하다. 심지어 조직적 여론조작 같은 위험한 발상들이 실제로 자행되기도 한다.
지금보다 단순한 만큼 더 순수했던 소통의 시대에 젊은 작가 박경리는 라디오라는 기술의 힘을 빌려 소통을 확장하길 원했다. 21세기인 지금 이 땅에 숱하게 많은 가난한 젊은 작가는 무엇을 원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