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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과학 과학

한국판 해적당 생긴다면 ‘순시리’는 사라질까

등록 2016-11-14 09:24수정 2016-11-14 09:54

아이슬란드 해적당 당원들이 당 로고가 새겨진 깃발을 들고 배 위에서 해적과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다. 아이슬란드 해적당 제공
아이슬란드 해적당 당원들이 당 로고가 새겨진 깃발을 들고 배 위에서 해적과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다. 아이슬란드 해적당 제공
[미래] 아이슬란드 해적당 메신저 인터뷰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의 대통령으로 뽑히던 지난 9일 나는 해적과 인터넷 채팅을 하고 있었다.

-권오성 기자(이하 권): 충격이다.

-하콘 헬기(H?kon Helgi, 이하 하콘): 아마 세계 모든 사람이 충격 아닐까.

-권: 해적의 눈에 트럼프 당선은 어떻게 보이나.

-하콘: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트럼프와 해적은 서로 비슷한 점이 있다.

-권: 어떻게?!

-하콘: 사실 이상한 말도 아니다. 서로 완전히 다른 정치 관점을 지녔지만 둘은 닮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좋은 정치인’이 아니야. 사람들이지. 바로 보통 사람.”  하콘 헬기는 아이슬란드 수도 레이캬비크 인근에 사는 두 아이의 아빠, 평범한 세일즈맨, 그리고 해적당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좋은 정치인’이 아니야. 사람들이지. 바로 보통 사람.” 하콘 헬기는 아이슬란드 수도 레이캬비크 인근에 사는 두 아이의 아빠, 평범한 세일즈맨, 그리고 해적당원이다.
하콘 헬기는 바다를 누비며 배를 약탈하고 보물을 숨겨두는 그런 해적은 아니다. “디지털 바다를 누비며 권력을 약탈해서 대중에게 나눠준다”고 주장하는 해적이다. 그는 아이슬란드 해적당원이다. 지난달 30일 치러진 아이슬란드 총선에서 순번 16번째의 해적당 국회의원 후보였다. 아이슬란드 총선은 정당에 투표하고 의석을 배분한다.

창당한 지 고작 4년 되는 해적당은 이번 총선에서 전체 의석 63석 가운데 10석을 차지했다. 하콘은 아쉽게 떨어지긴 했지만, 해적당은 3석에서 3배 넘게 의석을 차지하며 원내 제2당으로 뛰어올랐다. 아이슬란드는 국회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는 다수당이 내각을 구성하는 나라인데, 이번 총선에선 다수당이 나오지 않았다. 따라서 해적당이 연정을 통해 정부 구성에 참여할 수도 있다. ‘처음 해적이 다스리는 나라’가 나올 수도 있다는 뉴스는 트럼프 당선만큼은 아니지만 국제 뉴스를 제법 뜨겁게 장식했다. <한겨레>는 해적당에 인터뷰를 제의했고, 하콘이 대변자로 나서면서 우리는 11일까지 페이스북 채팅·전자우편 등으로 수차례 이야기를 나누었다.

포퓰리즘 정치의 두 종류

-하콘: 세상에는 지금 거대한 흐름이 있다. 사람들, 그러니까 ‘보통 사람들’은 갈수록 기성 정치권이 자신의 권리를 박탈한다고 느낀다. 세계 모든 정치인을 봐라. 선거 때면 늘 똑같은 말을 한다. ‘희망’, ‘변화’, ‘어제보다 나은 내일’. 선거 뒤? 변화는 없다. 미친 소리 같지만 트럼프와 해적당은 같은 사람들에게 통했다. 이렇게 권리가 박탈되고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 말이다.

해적당은 2006년 디지털 창작물에 대한 저작권법 강화 움직임에 반대하며 결성되기 시작한 국제적인 정치조직이다. 불법 복제 만화나 비디오를 말하는 ‘해적판’의 해적과 같은 뜻이다. 이들은 인간의 창작물을 법으로 규제하는 것은 정보의 자유로운 흐름을 거스르는 일이라며 반대한다. 이후 영국, 미국, 독일 등 세계 20여개 나라에 퍼졌는데 현재 국회에 진출한 나라는 아이슬란드가 유일하다. 당의 핵심 가치는 시민권 확대, 표현의 자유와 프라이버시 강화, 정부 투명성 높이기 등이다. “미국 우선”이 이념인 트럼프와는 전혀 다른 종류인 셈이다.

-권: 다른 데 비슷한 점이 있군. 트럼프도 ‘이단아’로 불렸지. 주류 언론은 너희들을 세계적으로 약진하고 있는 포퓰리스트(대중주의) 운동의 하나라고 말한다. 동의하나?

-하콘: 응, 동의해. 하지만 그냥 ‘포퓰리스트’ 하면 의미가 잘못 전달될 수 있어. 두려움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고 하는 사람에게 투표하지. 그럴 수 있지만, 그건 때로 무서운 일이야. 사람들은 자신의 공포를 적용할 희생양을 찾기도 하거든. 이민자나 이슬람교도가 대표적이지. 프랑스의 극우정당이나 영국의 브렉시트, 트럼프가 대중에게 쓴 방법이 그런 것이야. 하지만 우리는 달라. 우리는 희생양이 아니라 문제 자체로 돌격하거든. 바로 기성 정치 시스템이지.

포퓰리즘 하면 국내에선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하여 대중들을 선동하는 부정적인 의미로 주로 쓰이는데, 하콘 헬기가 말하는 포퓰리스트 운동은 반부패·반엘리트주의를 내걸고 기존 전문 정치인과 자신들을 구분하며 등장한 신흥 정치세력의 뜻에 가깝다. 이탈리아의 ‘오성운동’, 스페인의 ‘포데모스’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지배적인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정치 시스템은 대의민주주의다. 이 제도는 인류의 위대한 업적이다. 18세기 프랑스 혁명과 미국 혁명을 거치면서 서구 사람들은 자신의 권리를 발견하고 숱한 피를 흘리며 1인 권력자, 왕으로부터 권리를 뺏어왔다. 오늘날 민주주의 정치 시스템은 대체로 이 투쟁이 맺은 결실이다. 그런데 하콘과 다른 많은 전문가는 이 민주주의가 ‘업그레이드’되어야 할 때가 왔다고 믿는다. 기존 방식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사실, 트럼프와 해적당은 비슷해”
“어떻게?!”
“봐, 직업정치인들 번드르르한 말…
바뀌는 게 없으니, 우리를 찍는 거지”

“어떻게 바꿀 건데?”
“누구나 제안하고, 토론하고, 고치고…
인터넷으로 민주주의 할 수 있잖아
모든 과정이 투명하기 때문에
잇속 차리기나 권력행사 못할 걸”

민주주의 사회에서 권리 박탈을 느끼는 사람은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일자리를 잃은 미국 백인 노동자들, 금융위기 때 시위에 나선 아이슬란드 사람들, 은행에 집을 뺏긴 스페인 사람들, 정치인 부정부패에 지긋지긋한 이탈리아 사람들이 그렇다. 그토록 “그만두라”고 외쳐도 버티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을 바라보는 한국 사람들도 여기 포함될 것이다. 지난 9일 정치 스타트업 ‘와글’의 이진순 대표는 인터뷰에서 그 원인을 경제와 정치체제의 복합적인 문제로 진단했다.

“시장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난동을 부릴 때 제어할 수 있는 것은 정치뿐이다. 그런데 의회주의가 200년 이상 지속되면서 정치인이 일종의 직업 계급이 되고 자신들만의 블록(집단)을 구성해 버렸다. 다수가 시민을 대표하기보다 자신들의 권력 연장에 몰두한다. 자본과 이해를 상당 부분 같이하면서… 그들은 99%를 대변하지 못한다.”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는 건 착각”

극우와 개혁 세력을 막론하고 포퓰리스트 운동이 약진하는 세계 모든 곳은 국가부도 같은 경제적 재난이 앞서 발생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사실 요즘 글로벌 자본주의 체제에서 어느 나라도 경기가 좋지 않기는 매한가지다.

-권: 해적당은 어떻게 시스템을 바꾸겠다는 것인가?

-하콘: 우리는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고 착각한다. 그래, 모두에게 평등한 선거권이 주어지는 거야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의 헌법을 구상할 때 우리 선조들은 사실 한 명의 지배자, 왕으로부터 권력을 뺏어오는 것이 주목표였다. 그렇게 탄생한 이 체제는 사실 대중이 아니라 소수 귀족의 지배를 염두에 두고 설계됐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당시 직접적인 민주주의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대중의 다수는 글을 읽지 못했고, 적절한 판단을 내릴 정보를 얻기도 불가능했다. 하지만 지금은 가능하다. 혁명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바로 인터넷 혁명이다.

우리는 인터넷이 세상을 바꾼다는 이야기를 수십년 전부터 들어왔다. 물론, 놀라운 변화들이 있었지만 전자상거래나 핀테크, 모바일 광고 등 주로 경제 분야 성장기술들로 들어왔다. 헌법이 낡았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이런 ‘오래된’ 인터넷 기술이 정치 시스템마저 바꿀 능력이 있을까? 하콘이 설명한 해적당의 작동 방식과 해적당의 개헌에서 그 실마리를 엿볼 수 있다.

해적당은 조직이 없다. 지위도 없다. 모두가 평당원이다. 아이슬란드 해적당 창립자이자 보통 지도자로 소개되는 비르기타 욘스도티르(49)마저 그렇다고 한다. 어떻게 돌아갈 수 있을까? 자발성과 시스템이다.

해적당은 모든 결정을 온라인 시스템을 통해 내린다. 어떤 해적당원이 좋은 아이디어가 있어서 당이 실행하거나 법안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하자. 그는 이를 당의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제안하고 의안결정 시스템(x.piratar.is)에 등록할 수 있다. 그리고 관심 있는 동지들을 모아 온·오프라인 토론을 거친다. 이 과정에 어느 당원이 어떤 의견을 냈는지는 인터넷 댓글처럼 기록된다. 좀 정리되면 문서로 만드는데, 최종 결정 전에는 누구나 수정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집단지성이 발휘된다. 다른 생각을 지닌 사람은 다른 문서를 만든다. 정해진 시간이 되면 어떤 문서를 당론으로 결정할지 투표한다. 투표는 토론에 참여한 사람만 할 수 있다. 투표권은 다른 이에게 위임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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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보면 단순한데 이는 ‘유동적(리퀴드·액체) 민주주의’ 또는 ‘위임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정리된 일종의 직접민주주의 철학이 반영된 방식이다. 대의민주주의는 당 대표나 대통령 같은 대표자에게 정해진 기간 포괄적인 권한을 맡기는 방식으로 실행된다. 이 방식은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대표자가 자기 잇속이나 권력 연장을 꾀할 수 있고, 어떤 일에 대해선 무능력할 수도 있다. 유동적 민주주의에선 이슈마다 대표가 다르다. 환경 문제에 관심이 많아 먼저 제안을 하고 토론을 이끈 해적당원은 환경 분야에서 가장 많은 위임을 받은 대표가 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노동 문제에는 다른 해적당원이, 경제 문제에는 다른 당원이 대표가 될 수 있다. 권력이 분산된다. 이 과정은 모두 투명하게 기록으로 남는다. 누구나 열람할 수 있기 때문에 자기 잇속을 차리는 일은 원천적으로 어렵다. 누가 재량껏 권력을 행사하는 일도 불가능하다. 그래서 자리를 두고 다툴 일도 없다. 해적당 소속 국회의원도 이런 시스템 안에 속해 있다. 지도자인 비르기타 욘스도티르도 마찬가지다.

‘극단적 쏠림 현상’ 어떻게 막나

이런 시스템에도 취약점이 있는데 다수의 횡포와 집단 극화(의사결정 과정에서 애초 개인의 의사결정보다 더 극단적으로 이행하는 현상)가 대표적이다. 해적당의 방식이 이런 문제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완화할 장치들은 마련해 두고 있다. 다수의 횡포의 경우, 정해진 시간 동안 충분히 토론하고 결정문을 모두가 참여해서 고치는 방식은 소수 의견이라도 최종 결정에 반영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목소리 큰 사람의 주장으로 잘못된 결정에 이르는 집단 극화 문제의 경우, 결정된 사안이라도 누구나 자유롭게 제안을 내놓을 수 있고 다시 논의하고 결정하는 유동성이 보완하고 있다. 세를 과시하는 일사불란한 투표가 아니라 충분한 토론과 수정을 보장하는 시스템은 구성원이 모두 충분한 정보를 얻고 깊이 생각했을 때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의사결정이 가능하다는 ‘숙의민주주의’의 개념도 반영됐다.

아이슬란드는 2008년 금융위기 때 들고일어난 혁명 열기를 바탕으로 2010년 ‘크라우드소싱’ 개헌에 착수한 바 있다. 무작위로 뽑힌 국민대표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한 국민의 아이디어를 모아 헌법 개정안을 마련한 것이다. 당시 <뉴욕 타임스>는 “세계 최초의 집단지성 개헌”이라고 평한 바 있다. 하지만 이 개헌안은 정부가 질질 끌면서 통과가 불발하고 말았다. 해적당이 이번 국회 임기에 추진할 정책 1호는 바로 이 개헌안의 통과다. 이 개헌안에는 모든 국민의 인터넷 연결을 국가가 책임지고 국민이 15% 넘는 동의를 얻으면 직접 입법을 할 수 있는 조항 등이 포함됐다. 이 개헌은 해적당의 방식을 국가 운영에 일부 이식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디지털 직접민주주의 개헌이다. 하콘은 인터뷰 말미에서 말했다.

-하콘: 나의 진실함을 담아 말하건대 해적당의 방식은 민주주의의 미래다.

미래는 누구도 예측할 순 없지만 직접민주주의 실험이 이미 많은 나라에서 현실인 것은 사실이다. 오성운동, 포데모스 같은 디지털 기반 정당, 정부의 투명성을 높이는 대만의 거브제로, 아르헨티나의 데모크라시오에스(OS), 국민의 입법청원권을 북돋는 미국의 체인지닷오아르지, 핀란드의 오픈미니스트리 같은 운동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번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정국을 맞아 정치 스타트업 ‘와글’에서 온라인 시민정치 포털(박근혜게이트.com)을 준비중이다. 박명림 연세대 정치학과 교수는 이런 변화에 대해 “향후 민주공화국의 성패 여부는 직접 민주제의 요소를 얼마나 많이 정교하게 도입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그의 책 <다음 국가를 말하다>에서 지적했다. 비록 인구 33만명의 작은 나라지만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국회(930년 설립)를 지닌 아이슬란드의 정치 실험이 주목되는 이유다.

글 권오성 기자 sage5th@hani.co.kr, 인포그래픽 노수민 기자 bluedahlia@hani.co.kr 사진 아이슬란드 해적당 제공

technology_우리나라에서 ‘인터넷’과 ‘정치’를 함께 연상하면 기성 정치인의 트위터 홍보나 온라인 선거 부정 따위가 먼저 떠오른다. 세계 최고 정보기술(IT) 강국이라는 수식어를 한 꺼풀 까고 보면 최고 정보기술 ‘소비’강국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듯, 우리 정치는 기술을 변화의 도구로 쓰기보다 기존 정치의 장신구로 소비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변화를 일구는 아이슬란드의 ‘해적’에게 디지털 직접민주주의의 담대한 꿈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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