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21일 ‘과학의 날’의 원조는 ‘과학데이’였다. 1935년 ‘과학데이’ 포스터.
4월21일은 제50회 과학의 날이다. 1967년에 과학기술처가 발족한 날을 기념하며 시작되었다. 그런데 과학의 날은 원래 일제강점기였던 1934년이 원조다. 당시는 ‘과학데이’라고 했으며 찰스 다윈이 세상을 떠난 4월19일을 기념일로 정했다.
그에 앞서 1933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과학잡지 <과학조선>이 창간되었다. 처음에 발명학회 출판부에서 냈다가 발명학회 내 과학조선사로 명의가 변경되었으며 나중에는 과학지식보급회로 다시 바뀌었다. 이렇듯 이 잡지의 발행 주체가 변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당시 과학대중화 운동이 어떤 모습으로 흘러갔는지 알 수 있는데, 그 중심에 바로 ‘과학데이’가 있었다.
과학데이는 1934년 2월28일에 각계 인사 31인이 모여 ‘전 사회적으로 자연과학 지식열을 고취 앙양함’을 내세운 ‘과학데이실행회’라는 임시단체에 의해 성사되었다. 그리고 4월19일 제1회 과학데이 사흘 뒤인 4월22일에 다시 각계 인사 18인이 모여서 ‘과학지식 보급 좌담회’를 열었다. 주제는 ‘현실에서 절대다수의 대중에게 과학지식을 보급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인가?’였다.(이 행사의 속기록은 <과학조선> 1934년 6월호에 발췌 수록되어 있다.) 이 자리에서 참석자들은 과학지식 보급기관을 설치해야 한다는 데 의견 일치를 보았고, 이에 따라 발명학회 이사진 및 서울(당시는 경성)의 중등학교 교사들을 중심으로 한 발기인단이 모여 마침내 ‘과학지식보급회’가 출범하게 된다. 이들의 목표는 ‘생활의 과학화! 과학의 생활화!’였다.
과학지식보급회 간부들 모습. 1936년 <과학조선> 1월호에 실렸다. 서울SF아카이브 제공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과학잡지 <과학조선> 창간호(1933년 6월). 서울SF아카이브 제공
과학지식보급회는 당시의 사회적 명망가들이 다수 참여한 단체로서 상당한 영향력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36년 1월호 <과학조선>에 실린 과학지식보급회 간부진 소개에는 회장 윤치호와 함께 고문으로 몽양 여운형과 인촌 김성수가 나란히 제일 위에 나와 있다.
과학데이에는 자동차 퍼레이드와 대중강연, 과학관·연구소·기업 등 관련 시설 견학을 망라하는 다양한 행사가 잇달았고 홍난파가 과학의 노래를 작곡하기도 했다. 1935년 6월호 <과학조선>은 제2회 과학데이 기념호로서 포스터 2종을 실었다. 그중 하나는 1934년의 제1회 과학데이 포스터 도안을 거의 그대로 쓴 것인데, 독일의 카를차이스사에서 만든 마르크스(Marks) II 모델로 추정되는 천체투영기가 그려져 있다. 아시아 최초의 천체투영관(플라네타륨)이 생긴 것은 1937년 일본 오사카 시립전기과학관이므로, 이 포스터의 천체투영기는 당시 한반도에서는 아직 실물을 접할 기회조차 없는 그야말로 최첨단 과학기술의 상징이었을 것이다.
포스터에 박힌 문구도 흥미롭다. ‘과학의 승리자는 모든 것의 승리자다. 한 개의 시험관은 전 세계를 뒤집는다.’
이 구호에 담긴 강렬한 의지는 당대의 과학만능주의를 잘 드러낸다. 과학기술이 인류에게 낙원을 선사할 것이라는 믿음이 지배적이었던 시절이다. 올더스 헉슬리가 1932년에 발표한 소설 <멋진 신세계> 정도를 제외하면 당시엔 과학기술에 대해 의심과 불안을 느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러한 장밋빛 미래 전망은 그로부터 10년 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지면서 산산조각이 나는 듯했지만, 인류는 다시 원자력이라는 엄청난 가능성에 열광하게 된다.
1934년에 나온 <과학조선> 창간호에는 눈에 띄는 책 광고가 하나 실려 있다. ‘이십몇년 전에 조선 청년 안중근이 총 한 방에 이등박문을 명중시켜 동양이 흔들리고 세계가 움직였던 것을 아느냐? 비밀로 감춰졌던 이 사실이 소설로 나왔으니 조선 청년들은 읽으라’는 내용이다. 처음부터 <과학조선>과 과학데이 등 당시의 과학대중화 운동을 주시했던 일제는 결국 1938년에 핵심인물인 김용관을 체포, 수감했고 과학데이도 5회를 마지막으로 사라졌다. 과학지식보급회에 참여했던 인물들 상당수는 친일파로 변절했다.
1944년에 폐간되고 만 <과학조선>은 우리 과학문화사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차지하는 선구자로서 의의를 지닌다. 과학과 기술의 모든 분야에 걸친 지식은 물론이고 언어학처럼 인문사회과학까지도 아우르는 다양한 글에다 번역 및 창작 과학소설(SF)도 수록했다. 해방 이후 몇몇 과학잡지들이 선을 보였지만 <과학조선>만큼의 수준을 회복한 것은 세월이 한참 더 흐른 뒤이다. 소년잡지를 제외하면 실질적인 성인용 대중과학잡지의 맥은 1964년에 창간된 <과학세기>에 이르러서야 이어진다. <과학조선> 창간으로부터 무려 31년 뒤의 일이다.
박상준 서울SF아카이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