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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과학 과학

“성평등이 과학 발전 밑거름” 이공계에 페미니즘 바람

등록 2017-08-07 08:55수정 2017-08-11 10:04

[미래&과학]
지난 4월 이공계 여성을 지원하는 소셜벤처 걸스로봇(대표 이진주·왼쪽 둘째) 등이 심상정 정의당 당시 대선 후보를 초청해 서울 역삼동 디캠프에서 젠더 정책 특별대담 행사를 열고 있다. 이진주 대표는 “이날 참석자 200여명이 신체적, 정신적 안전부터 성차별, 성폭력, 경력단절, 육아, 동성애 등을 주제로 울고 웃으며 열띤 대화를 나눴다”며 “특히 이공계 여성의 경력단절과 여고생에게 물리를 가르치지 않는 학교가 많다는 현실이 화제가 됐다”고 말했다.  걸스로봇 제공
지난 4월 이공계 여성을 지원하는 소셜벤처 걸스로봇(대표 이진주·왼쪽 둘째) 등이 심상정 정의당 당시 대선 후보를 초청해 서울 역삼동 디캠프에서 젠더 정책 특별대담 행사를 열고 있다. 이진주 대표는 “이날 참석자 200여명이 신체적, 정신적 안전부터 성차별, 성폭력, 경력단절, 육아, 동성애 등을 주제로 울고 웃으며 열띤 대화를 나눴다”며 “특히 이공계 여성의 경력단절과 여고생에게 물리를 가르치지 않는 학교가 많다는 현실이 화제가 됐다”고 말했다. 걸스로봇 제공
전문성 더 요구하는 과학기술계
여성들, 성차별 고통 더 깊어
페미니즘으로 돌파구 찾아나서

“남자인 제가 페미니즘에 관심 갖는 이유는 두 가지 같아요. 첫째는 앞으로 공동연구할 기회가 생길 텐데 실력 좋은 사람이랑 하면 좋겠어요. 여자라는 이유로 스트레스 받고 돌봄노동 떠맡는다면 잘하던 사람도 연구를 꾸준히 하기 어렵겠고, 그러면 주변에 실력 좋은 사람이 그만큼 줄어들 테니까요.”

지난해 ‘강남역 살인사건’이 일으킨 ‘여혐’ 논란으로 유난히 힘들어하던 실험실의 여자 동료, 그리고 공감하던 남자 동료들과 함께 책을 읽고 토론하며 ‘생물학 실험실의 페미니즘 공부’를 경험했던 대학원생 김준(서울대 생명과학부)씨는 “그리고 여성 또는 소수자 정체성을 지닌 연구자가 더 많아져야 연구 주제도 더 다양해질 거니까”라고 이유를 꼽았다.

대학원의 남자 연구생이면서 페미니즘에 관심을 보이는 김준씨처럼, 요즘 이공계에선 성평등을 말하는 젠더나 페미니즘이라는 말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이공계 페미니즘, 테크노 페미니즘이라는 말도 익숙해지고 있다.

“이공계 분야에 더 많은 여성이 진출해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돕는” 문화 사업을 펼치는 소셜벤처 ‘걸스로봇’의 이진주 대표는 이런 흐름에 대해 “그동안 인문계 페미니즘이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견인해온 한국 페미니즘의 역사를 이제 이공계 페미니스트들이 받아 요즘 시대에 맞는 언어로 번역하고 있는 중”이라고 평했다. 같은 연구자이면서도 이공계에서 소수자로 살아야 하는 여자 과학기술인들의 차별 해소 요구가 이제는 페미니즘의 언어와 결합해 더욱 힘을 얻고 있는 셈이다.

지속성과 전문성이 더 요구되는 과학기술계의 특성 때문에 여성 과학기술인이 겪는 어려움은 흔히 ‘유리천장’, ‘새는 파이프라인’, ‘엘(L)자형 생애 주기’ 같은 표현으로 요약되곤 한다. 결혼·육아 등으로 전문 인력군에서 점차 빠져나가는 ‘새는 파이프라인’ 현상이나, 경력단절 뒤에 아예 복귀를 포기하는 바람에 일반적인 ‘엠(M)자형’이 아니라 ‘엘(L)자형’ 생애 곡선을 보여준다는 것이다.(표)

이진주 대표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 한국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 같은 단체의 언니 세대들이 실태 조사, 멘토링 지원, 경력단절 뒤 복귀 지원 같은 많은 활동을 벌였고 그런 것이 기반이 되어, 이제 젊은 세대의 목소리가 모여 나오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흐름에서 최근 눈에 띄는 것은 지난 3월 카이스트, 포스텍, 유니스트(울산과학기술원), 디지스트(대구경북과학기술원), 지스트(광주과학기술원) 같은 과학기술 중점대학들에 있던 페미니스트들이 모여 처음으로 조직적인 연합모임을 만든 일이었다. ‘페미회로’라는 이름으로 주로 페이스북(www.facebook.com/femicircuit)을 무대로 활동하는 이 단체에는 이공계 대학의 대학생, 대학원생, 졸업생들이 참여했다. 페미회로의 운영진은 “평등한 과학을 지향하기 위해 페미니즘 가치를 지지하고 이공계 소수자로서 연대의 목소리를 내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고 말한다.

이공계 페미니즘 그룹인 페미회로는 오프라인 회의도 자주 연다.  걸스로봇 제공
이공계 페미니즘 그룹인 페미회로는 오프라인 회의도 자주 연다. 걸스로봇 제공

“소수자들 연대해 목소리 내자”
대학 연합 모임 ‘페미회로’ 결성
소셜벤처 ‘걸스로봇’과 의기투합
이공계 성차별 사례 수집도 활발

페미회로는 여성 연구자의 삶과 정체성을 듣고, 알리고, 얘기하는 활동을 벌이고 있다. 지난 1일엔 걸스로봇과 함께 ‘우리에겐, 결코 평등하지 않은 과학’이라는 주제의 두툼한 보고서인 <젠더서밋 10>을 펴냈다. 창작자와 후원자를 이어주는 다음 스토리펀딩에서 후원금 500만여원을 받아 과학기술 연구에 평등한 성과 젠더의 관점을 확산하고자 하는 ‘젠더 혁신’ 분야 연구자들의 학술회의인 ‘젠더 서밋’ 일본 행사에 참여한 경험, 그리고 여성과 과학의 이야기를 담은 보고서였다.

페미회로 회원이 그린 캐릭터. 누구나 과학자가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았다고 한다.  페미회로 제공
페미회로 회원이 그린 캐릭터. 누구나 과학자가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았다고 한다. 페미회로 제공
주변의 현업 연구자 또는 예비 연구자들한테서 남성 중심의 과학기술계에서 일상으로 겪어온 이야기들을 듣는 특별한 인터뷰 프로젝트(‘사이언티스트 ∩ 페미니스트’)는 “그동안 여성 연구자의 롤모델은 ‘연구와 가정을 동시에 지키는 슈퍼맘’ 정도였는데, 다양한 여성 과학자들이 실제 살아온 이야기들은 여성 연구자들이 겪는 우리의 문화적인 어려움을 보여준다.”(페미회로 활동가 조희수씨, 유니스트 대학생) 인터뷰를 함께 기획하고 진행한 이진주 대표는 “일상에서 겪는 잔잔한 난관들, 그래서 더욱 길고 지난한 싸움의 과정을 전하고, 여성 과학기술인의 평범성을 드러내고자 했다”고 덧붙였다. 인터뷰는 걸스로봇 누리집(girlsrobot.co.kr)에 실려 있다.

페미회로 활동가인 강미량(포스텍 대학생)씨는 “모두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어 대부분 온라인으로 협의하는데, 저마다 바쁜 실험이나 학업 속에서도 카카오톡은 물론이고 구글 행아웃, 트렐로, 슬랙, 아사나, 잔디 같은 갖가지 온라인 협업 도구를 사용해 교류한다”고 말했다. 페미회로엔 남자 페미니스트도 참여하고 있다.

소셜미디어 공간에선 이공계의 성차별·성희롱 사례를 수집하는 활동도 벌어지고 있다. 페미회로와 협력하면서도 별도 그룹에서 운영되는 ‘이공계 내 성차별 아카이빙 프로젝트’라는 페이스북 페이지(www.facebook.com/STEMGenderEquality)의 운영진은 “페이지를 연 지 3주 만에 100건 넘는 사례가 들어왔다”고 말했다. 이공계 대학생과 대학원생 4명으로 이뤄진 운영진은 “여성 연구자의 성차별 논의는 많지만 여러 자료를 찾아봐도 과학자를 꿈꾸며 교육을 받는 예비 연구자들이 현실에서 겪는 성차별 이야기는 거의 찾기 힘들다는 걸 알고서 이런 페이지를 열었다”고 말했다.

이공계 여성 인력에 나타나는 엘(L)자형 생애 주기의 문제는 최근 들어 완화됐다.  한국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WISET) 제공
이공계 여성 인력에 나타나는 엘(L)자형 생애 주기의 문제는 최근 들어 완화됐다. 한국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WISET) 제공
심각한 성희롱 사건을 고발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많은 경우엔 일상적인 언어폭력이나 남성 중심 문화에선 보이지 않는 성차별이 이공계 여성이 과학기술 연구자로 성장하는 데 큰 장벽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운영진은 사례를 계속 모으면서 사례를 분석해 결과를 발표할 계획이라고 한다.

페미회로의 조희수씨는 “남자 비율이 매우 높은 남초 사회, 그리고 연구·실험실 개개의 독립적인(폐쇄적인) 문화 때문에 여성 연구원이 겪는 문제를 개인 문제로 여기는 일이 잦아, 이공계의 젠더 문제에 대해 더욱 논의하고 연대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진주 대표는 “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와 함께 하반기엔 국회 같은 상징 공간에서 이공계 페미니스트들이 1박2일 동안 밤샘 정책토론을 펼치는 그런 행사도 구상중”이라고 말했다.

오철우 선임기자 cheol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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