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과학]
지난 4월 이공계 여성을 지원하는 소셜벤처 걸스로봇(대표 이진주·왼쪽 둘째) 등이 심상정 정의당 당시 대선 후보를 초청해 서울 역삼동 디캠프에서 젠더 정책 특별대담 행사를 열고 있다. 이진주 대표는 “이날 참석자 200여명이 신체적, 정신적 안전부터 성차별, 성폭력, 경력단절, 육아, 동성애 등을 주제로 울고 웃으며 열띤 대화를 나눴다”며 “특히 이공계 여성의 경력단절과 여고생에게 물리를 가르치지 않는 학교가 많다는 현실이 화제가 됐다”고 말했다. 걸스로봇 제공
여성들, 성차별 고통 더 깊어
페미니즘으로 돌파구 찾아나서
“남자인 제가 페미니즘에 관심 갖는 이유는 두 가지 같아요. 첫째는 앞으로 공동연구할 기회가 생길 텐데 실력 좋은 사람이랑 하면 좋겠어요. 여자라는 이유로 스트레스 받고 돌봄노동 떠맡는다면 잘하던 사람도 연구를 꾸준히 하기 어렵겠고, 그러면 주변에 실력 좋은 사람이 그만큼 줄어들 테니까요.” 지난해 ‘강남역 살인사건’이 일으킨 ‘여혐’ 논란으로 유난히 힘들어하던 실험실의 여자 동료, 그리고 공감하던 남자 동료들과 함께 책을 읽고 토론하며 ‘생물학 실험실의 페미니즘 공부’를 경험했던 대학원생 김준(서울대 생명과학부)씨는 “그리고 여성 또는 소수자 정체성을 지닌 연구자가 더 많아져야 연구 주제도 더 다양해질 거니까”라고 이유를 꼽았다. 대학원의 남자 연구생이면서 페미니즘에 관심을 보이는 김준씨처럼, 요즘 이공계에선 성평등을 말하는 젠더나 페미니즘이라는 말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이공계 페미니즘, 테크노 페미니즘이라는 말도 익숙해지고 있다. “이공계 분야에 더 많은 여성이 진출해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돕는” 문화 사업을 펼치는 소셜벤처 ‘걸스로봇’의 이진주 대표는 이런 흐름에 대해 “그동안 인문계 페미니즘이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견인해온 한국 페미니즘의 역사를 이제 이공계 페미니스트들이 받아 요즘 시대에 맞는 언어로 번역하고 있는 중”이라고 평했다. 같은 연구자이면서도 이공계에서 소수자로 살아야 하는 여자 과학기술인들의 차별 해소 요구가 이제는 페미니즘의 언어와 결합해 더욱 힘을 얻고 있는 셈이다. 지속성과 전문성이 더 요구되는 과학기술계의 특성 때문에 여성 과학기술인이 겪는 어려움은 흔히 ‘유리천장’, ‘새는 파이프라인’, ‘엘(L)자형 생애 주기’ 같은 표현으로 요약되곤 한다. 결혼·육아 등으로 전문 인력군에서 점차 빠져나가는 ‘새는 파이프라인’ 현상이나, 경력단절 뒤에 아예 복귀를 포기하는 바람에 일반적인 ‘엠(M)자형’이 아니라 ‘엘(L)자형’ 생애 곡선을 보여준다는 것이다.(표) 이진주 대표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 한국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 같은 단체의 언니 세대들이 실태 조사, 멘토링 지원, 경력단절 뒤 복귀 지원 같은 많은 활동을 벌였고 그런 것이 기반이 되어, 이제 젊은 세대의 목소리가 모여 나오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흐름에서 최근 눈에 띄는 것은 지난 3월 카이스트, 포스텍, 유니스트(울산과학기술원), 디지스트(대구경북과학기술원), 지스트(광주과학기술원) 같은 과학기술 중점대학들에 있던 페미니스트들이 모여 처음으로 조직적인 연합모임을 만든 일이었다. ‘페미회로’라는 이름으로 주로 페이스북(www.facebook.com/femicircuit)을 무대로 활동하는 이 단체에는 이공계 대학의 대학생, 대학원생, 졸업생들이 참여했다. 페미회로의 운영진은 “평등한 과학을 지향하기 위해 페미니즘 가치를 지지하고 이공계 소수자로서 연대의 목소리를 내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고 말한다.
이공계 페미니즘 그룹인 페미회로는 오프라인 회의도 자주 연다. 걸스로봇 제공
대학 연합 모임 ‘페미회로’ 결성
소셜벤처 ‘걸스로봇’과 의기투합
이공계 성차별 사례 수집도 활발 페미회로는 여성 연구자의 삶과 정체성을 듣고, 알리고, 얘기하는 활동을 벌이고 있다. 지난 1일엔 걸스로봇과 함께 ‘우리에겐, 결코 평등하지 않은 과학’이라는 주제의 두툼한 보고서인 <젠더서밋 10>을 펴냈다. 창작자와 후원자를 이어주는 다음 스토리펀딩에서 후원금 500만여원을 받아 과학기술 연구에 평등한 성과 젠더의 관점을 확산하고자 하는 ‘젠더 혁신’ 분야 연구자들의 학술회의인 ‘젠더 서밋’ 일본 행사에 참여한 경험, 그리고 여성과 과학의 이야기를 담은 보고서였다.
페미회로 회원이 그린 캐릭터. 누구나 과학자가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았다고 한다. 페미회로 제공
이공계 여성 인력에 나타나는 엘(L)자형 생애 주기의 문제는 최근 들어 완화됐다. 한국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WISET)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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