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조선박람회에서는 로봇, 보험, 놀이기구 등 근대적 상품이 소개됐다. 조선생명보험주식회사가 준비한 ‘보험가입자 가정의 행복한 모습’ 모형. 사진 서울SF아카이브 제공
1939년 뉴욕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 제너럴모터스는 ‘퓨처라마’(FUTURAMA)라는 이름의 전시관을 열었다. 그런데 자동차 제조회사인 이곳에서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전시물은 미래 콘셉트 자동차도, 대량생산 라인이 자리 잡은 자동차 공장의 위용도 아닌 ‘미래의 도시’ 모형이었다. 그들이 내놓은 20년 뒤 미래 도시는 오늘날 우리가 사는 대도시의 모습, 즉 고층 빌딩들과 그 사이를 격자처럼 사통팔달로 잇는 도로망을 그대로 예견한 것이다. 단순히 자동차의 미래를 전망한 것이 아니라 자동차가 일상화된 미래 도시환경 그 자체를 제시함으로써 대량생산과 소비가 미덕이 되는 자본주의 생활양식을 공고한 표준으로 각인시켰던 셈이다.
일본이 한반도를 강점한 뒤 추진한 정책도 본질에서는 위와 비슷한 맥락을 담고 있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조선은 일본의 주요 생산기지 기능을 담당했고, 조선총독부는 조선 인민들이 기업과 공장을 통해 대량생산되는 공산품을 소비하도록 장려했다. 그리고 이런 ‘계몽’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의 하나가 박람회였다.
일제는 조선을 강점한 지 5년째인 1915년에 조선물산공진회(始政五年記念朝鮮物産共進會)를 개최한다. 조선 통치 5년간의 성과를 집약해서 보여줌으로써 조선의 산업 발전을 도모한다는 명분으로 산업, 교육, 보건, 토목, 교통, 경제 관련 시설 및 통계, 조선 물산의 전시, 조선과 관계가 있는 일본 및 외국의 문물 전시가 이루어진 박람회였다. 바다 건너 구경하러 온 일본인 30만명을 포함해 총 116만명이 넘는 관람객이 몰리면서 커다란 성공을 거둔 이 행사는 실상 일제의 조선 강점을 정당화하는 과시적 퍼포먼스였다. 당시 행사장으로 쓰인 경복궁은 숱한 건물들이 철거되는 등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보았으며 1990년대 이후에야 일부 복원 사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1929년 조선박람회 때 전등을 달아 불을 밝힌 서울 남대문. 서울SF아카이브 제공
일제강점 20년이 된 1929년에는 다시금 산업화 패러다임이 강화된 조선박람회가 열린다. 이 행사에는 조선 각 지역과 기업체들을 비롯해 도쿄, 오사카, 나고야, 사할린, 홋카이도, 규슈 등등의 지역과 일본 육군, 해군까지 독립적인 전시관을 설치했다. 전시물 중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보험사인 조선생명보험주식회사가 준비한 ‘보험가입자 가정의 행복한 모습’ 모형이나 마이니치신문사가 전시한 동양 최초의 로봇 ‘학천칙’, 또 탑승 놀이기구인 ‘유희비행기탑’ 등등이 있어 관람객 연인원이 140만명에 이르렀다. 이 박람회의 홍보를 위해 서울역 앞에 커다란 환영 게이트 구조물이 세워졌고 남대문은 전등으로 장식되어 휘황찬란한 야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사실상 1929년의 조선박람회는 흔히 ‘근대화’로 표현되는 현대 사회의 일상이 어떤 면면들인지를 조선 사람들에게 하나의 표준으로 제시한 셈이다.
이러한 박람회, 또는 엑스포(EXPO)는 1851년 영국에서 개최된 제1회 세계박람회를 실질적 시초로 꼽는다. 산업혁명 이후 과학과 기술이 비약적으로 성장하면서 각 분야에 축적된 성과를 한자리에 모아 전시하는 행사로 시작된 것이다. 당시 행사는 ‘수정궁’이라 불리는 세계 최초의 철골구조물에서 열렸는데, 길이 500미터가 넘으면서도 다른 자재 없이 유리와 철제 빔만으로 세워진 놀라운 건축기술을 보여주었다. 그 뒤로 프랑스, 미국, 영국, 스페인, 벨기에 등이 경쟁적으로 엑스포를 개최하면서 사실상 강대국들의 국력 과시용 행사라는 성격이 짙어졌다. 20세기 초반까지 이러한 박람회의 영향력은 대단해서 올림픽 같은 행사가 오히려 초라해 보일 정도였다고 한다.
1929년 조선박람회 포스터. 서울SF아카이브 제공
박람회가 과열 양상을 띠면서 국력 소모가 우려될 지경에 이르자 결국 국제적인 전담 기구가 탄생하여 속도 조절을 하게 되었다. 1928년에 프랑스에 본부를 두고 창설된 국제박람회기구(BIE)는 ‘엑스포’라는 명칭을 쓸 수 있는 박람회 인증권을 행사하면서 개최 기간 및 행사 주기 등을 엄격히 관리하게 된다. 이에 따르면 엑스포는 ‘등록박람회’와 ‘인정박람회’ 두 가지만 허용되며 5년 정도의 주기로 개최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1993년 대전엑스포, 2012년 여수엑스포는 모두 박람회기구가 승인한 ‘인정박람회’로서 특정한 주제를 잡고 관련된 내용으로만 전시물을 구성한 경우이다. 현재는 부산시가 2030년에 등록박람회 개최를 추진하고 있다.
최근의 엑스포는 엄청난 예산 투입에 비해 입장 수익이나 사후 인프라 활용 등에서 채산성이 떨어져 인기가 예전만 못한 편이다. 2012년 여수엑스포도 3400억원의 적자를 기록하여 사실상 실패한 행사가 되었다. 냉정히 따져보면 엑스포는 과학기술 산업사회라는 패러다임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 없이 일방적으로 표준을 강요하는 성격이 없지 않다. 그 시작은 근대화의 상징이나 다름없었지만 21세기에 접어든 지금은 오히려 전근대적인 일회성 과시 행사로 변질된 것 아닐까.
1929년 조선박람회 때 소개된 놀이기구 유희비행기탑. 서울SF아카이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