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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과학 과학

당신의 뇌에 속지 말라

등록 2017-09-15 19:38수정 2017-09-18 14:07

[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젊은 뇌과학자 장동선 박사

“성찰과 반문이 필요하죠. 내가 보고 느낀 그 순간의 인지와 감정들이 사실일까 되묻는 것. 신문기사에서 어떤 아이를 보고 ‘쟨 나쁜 애다’ 생각이 들었을 때 ‘그 이면엔 무엇이 있을까? 나의 어떤 경험들이 이렇게 보게 하는 건 아닐까?’ 생각해 보는 것.” <뇌 속에 또 다른 뇌가 있다>의 저자 장동선 박사는 “뇌가 믿는 것이 다가 아니며, 우리 뇌도 늘 속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성찰과 반문이 필요하죠. 내가 보고 느낀 그 순간의 인지와 감정들이 사실일까 되묻는 것. 신문기사에서 어떤 아이를 보고 ‘쟨 나쁜 애다’ 생각이 들었을 때 ‘그 이면엔 무엇이 있을까? 나의 어떤 경험들이 이렇게 보게 하는 건 아닐까?’ 생각해 보는 것.” <뇌 속에 또 다른 뇌가 있다>의 저자 장동선 박사는 “뇌가 믿는 것이 다가 아니며, 우리 뇌도 늘 속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두 눈 멀쩡히 뜨고서 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자기 관심영역 바깥의 상황이나 사물이 변하는 걸 알아차리지 못하는 현상이다. 뇌과학에서는 이것을 ‘변화맹’(change blindness)이라고 부른다. 미국 일리노이대학의 크리스토퍼 셔브리와 대니얼 사이먼스 교수팀은 학생들에게 농구경기 영상을 보여주며 선수들의 패스 횟수를 세게 했다. 게임 중간에 고릴라 복장을 한 기괴한 인물이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 선수들 사이를 유유히 가로질러 지나갔으나 참가자의 절반가량은 고릴라의 출현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게 아니라, 알고 싶어 하는 만큼만 보인다.

지구상에서 가장 영리한 영장류인 인간의 뇌는 이렇게 잘 속는다. 같은 것을 보고 같은 시공간 속에 있어도, 우리의 뇌는 각기 다르게 코딩된 정보를 접수하고 저장한다. 내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내 눈앞에 고릴라가 몇 마리나 지나갔을지, 내가 몇 번이나 성난 고릴라가 되었을지 나는 알지 못한다. 잘 속는 뇌와 무의식적인 자기합리화, 토막 난 기억과 예민한 자존심 대결 속에서 사람 사이의 진정한 소통이란 어떻게 가능한 걸까? 이질적인 그룹 사이의 이해와 공감, 협력은 가능할 수 있을까?

<뇌 속에 또 다른 뇌가 있다>의 저자 장동선(37) 박사를 만나고 싶었던 건, 뇌과학에 대한 학문적 호기심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인지와 행태를 연구한 사람과 이런 세상 고민을 나눠보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의 책 목차에 ‘돈, 권력, 종교는 우리를 어떻게 좌우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자신과 남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와 같은 매력적인 화두가 담겨 있다는 점에 더욱 마음이 끌렸는지도 모르겠다. 지난 7일 저녁, 서울 삼성동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국제 과학토크 대회에서 두각
주목받는 과학 커뮤니케이터
뇌과학은 심리학 등 융합학문
“뇌·인공지능 지나친 믿음
잘못이라 말하는 것도 내 역할”

뇌과학은 심리학·의학·생물학·컴퓨터공학·철학 등이 합쳐진 대표적인 융합 학문이다. 장동선 박사는 뇌가 다른 사람을 어떻게 인지하고, 그것이 사회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연구한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뇌과학은 심리학·의학·생물학·컴퓨터공학·철학 등이 합쳐진 대표적인 융합 학문이다. 장동선 박사는 뇌가 다른 사람을 어떻게 인지하고, 그것이 사회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연구한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뇌과학을 과신하지 마세요’

-독일에 계신 줄 알았는데 한국에서 이렇게 뵙게 되니 반갑습니다.

“올봄에 들어왔습니다. 딱 6개월째네요.”

-아주 들어오신 건가요?

“네. 국내 연구소에 취업했어요. 미래기술 연구하는 파트인데, 사람들한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걸 만들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요.”

장동선은 1980년 독일 하이델베르크에서 유학중인 한국인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7살 때 한국으로 이주했고, 다시 스무살 무렵부터 독일에서 유학하며 콘스탄츠대학에서 생물학을 전공하고, 막스플랑크연구소에서 사회인지 신경과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14년과 2015년, 독일 ‘사이언스 슬램’과 ‘세계 페임랩 인터내셔널’에서 연이어 두각을 드러내며 독일과 유럽에서 매우 주목받는 ‘과학 커뮤니케이터’로 이름을 알렸다. 그의 책은 지난해 독일에서 먼저 출간되어 독일 <슈피겔>과 아마존 과학 분야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한국어판은 올해 3월 그가 귀국할 즈음 나왔다. 지금은 경기도 화성에서 아내와 아들 태오(3)와 함께 산다.

-뇌과학자를 만난다고 생각하니, 왠지 내 속내를 꿰뚫어볼 것 같고, 인간의 두뇌 회로를 까뒤집어 보여줄 것 같고, 내가 궁금해하는 삶의 해답을 들려줄 수 있을 것 같다는 끝 모를 기대감이 무의식중에 자꾸 생기더라고요. 신탁을 받은 역술인이나 예언자를 찾아가는 사람처럼.(웃음) 이거 문제죠?

“사람들이 요즘 ‘세상에서 누구를 가장 신뢰하는가’ 조사해보면, 거의 최고 순위에 뇌과학자가 꼽힌대요. 실제로 이런 연구도 있어요. 무작위로 신문기사 100개를 뽑아서 사람들한테 보여주고 그중에 제일 신뢰가 안 가는 기사들, 거짓기사나 ‘뻥’ 같은 얘길 찾아보라고 하죠. 그러곤 기사들 앞머리에 이런 구절을 하나씩 붙여요. ‘뇌과학에 의하면…’ ‘뇌스캔을 해봤더니…’ ‘브레인사이언스에 의하면…’. 그러면 사람들이 뻥 같다고 했던 기사의 신뢰도가 확 올라간다는 거예요.”

-하하하, 뇌과학의 마술이군요.

“재밌는 건, 이걸 다양한 사람들한테 실험했는데요, 일반인, 교사, 그리고 뇌과학자…. 일반인과 교사는 큰 차이가 없었고요. ‘다행히’ 뇌과학자들은, ‘뇌과학’이란 수식어를 붙여도 ‘이건 말이 안 되지’ 했대요.(웃음)”

-다행입니다.

“사람들은 늘 뭔가를 믿고 의지하려고 해요. 중세엔 신부님 말씀, 성경 말씀, 혁명기에는 유명한 학자나 사상가들…. 지금 트렌드는 뇌, 인공지능 이런 걸 굉장히 신봉하는데, 뇌과학에 대한 지나친 기대나 믿음은 잘못된 거죠. 그런 과신은 잘못되었다고 확실히 말해주는 것도 뇌과학자가 해야 할 역할이라고 전 생각해요.”

-미래 산업과 관련해서 뇌과학이 엄청나게 중요한 역할을 할 거라고 하는데, 이 뇌과학이란 게 정확하게 뭔가요? 일반 의학이나 심리학, 행동과학하곤 어떻게 다른 거죠?

“뇌과학은 대표적인 융합학문입니다. 크게 다섯 가지 학문영역이 들어가 있어요. 심리학, 의학, 생물학, 컴퓨터공학, 그리고 철학. 같은 뇌과학자라고 해도, 어디서 누구 밑에서 공부했느냐에 따라서 접근방식이나 관심영역이 크게 다르죠. 제 백그라운드는 생물학인데 사회인지 뇌과학을 공부하고 있어요. 뇌가 다른 사람을 어떻게 인지하고, 그것이 사회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연구합니다.”

독일에서 태어나 7살때 한국으로
초등학교 때 질문하자 체벌이…
출석 줄이고 홈스쿨링 공부
집안 어려워지면서 가출·방황
고교에서 서클 만들고 청소년운동

뇌과학자 장동선 박사는 2014년, 2015년 독일 ‘사이언스 슬램’과 ‘세계 페임랩 인터내셔널’에서 두각을 드러내며 독일과 유럽에서 주목받는 ‘과학 커뮤니케이터’로 이름을 알렸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뇌과학자 장동선 박사는 2014년, 2015년 독일 ‘사이언스 슬램’과 ‘세계 페임랩 인터내셔널’에서 두각을 드러내며 독일과 유럽에서 주목받는 ‘과학 커뮤니케이터’로 이름을 알렸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내 안에 너 있다?

-우린 보통 한국인이나 한국인 피가 흐르는 동포가 세계 무슨 대회에서 수상하거나 유명세를 떨쳤다고 하면 특별한 의미를 두고 환호하는데, 저도 뭐 예외는 아닙니다.(웃음) 저자 소개에 ‘2014년 독일 사이언스 슬램 최종 우승자, 2015년 세계 페임랩 인터내셔널 독일 대표로 최종 9인에 선정’되었다는 대목이 특별히 기억에 남는 걸 보면…. 근데 한편으론, 전문 연구자가 출전하는 이런 식의 과학토크대회가 있다는 게 더 부럽고 신기했어요. 어떤 행사인지 소개해 주세요.

“유럽에서 생긴 지 10년쯤 되었고요. 사이언스 슬램은 독일 전역의 60~80개 대학도시마다 지역별로 개최되는데 도시 단위, 주 단위를 거쳐서 전국대회에 나가죠. 사이언스 슬램은 첫째, 과학적인 정보를 5~10분 사이에 전달해야 하고 둘째, 누구나 이해하기 쉽도록 재밌게 전해야 해요. 셋째, 평가는 관객들이 해요. 1점에서 10점까지.”

-‘나가수’처럼?

“하하하, 맞아요. 그렇다고 사람들이 오락적이거나 자극적인 강연에 높은 점수를 주진 않더라고요.”

-거기서 전국 1등을 한 거예요?

“네. 페임랩도 비슷한 목적인데, 이건 세계 대회이고 30개국에서 나라별 한 명씩 대표가 나와서 3분 안에 말로만 설명해야 해요. 독일 대표로 나가서 최종 엔트리 9명 중의 한 명으로 뽑혔죠.”

사이언스 슬램 수상자들은, 순식간에 출판계와 방송계의 ‘아이돌’이 된다. 선인세를 받으며 대형 출판사와 계약을 맺고, 자기 이름을 내건 티브이 과학쇼의 진행자로 캐스팅되거나, 강연 에이전시가 붙어서 전용기를 타고 세계 각국에 강연을 다니기도 한다. 장동선에게도 명성과 고액 연봉이 보장된 제안이 있었으나 그는 올해 초 한국으로 귀국했다. 그가 사랑하는 가족들이 한국에서 살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부와 명성 대신, 그는 가족들과 ‘함께 행복해지는’ 길을 기꺼이 택했다.

-책 제목이 <뇌 속에 또 다른 뇌가 있다>인데 원래 독일어 제목도 이래요?

“엄밀히 말하면 좀 달라요. ‘내 뇌는 자기만의 세상이 있어’ 의역하자면 이런 말인데, 한국말로 더 적합하게 의미를 담을 수 있도록 ‘뇌 속에 또 다른 뇌가 있다’로 바꿨죠.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것, 가장 큰 위협이 뭘까요? 천재지변? 호랑이?”

-전 사람이 제일 무서워요.

“그렇죠. 다른 사람! 인간의 최고의 친구이자 최고의 적이죠. 인간의 생존에 가장 중요한 건 다른 사람의 행동을 예측하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미리 알고, 다른 사람과 공감하는 거예요. ‘날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끄덕하는 건 무슨 의미일까? 내 얘기가 재밌어서 빠져들고 있나?’ 지금 무의식중에도 내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죠. 실제로 브레인 스캐너에 넣어서 측정하면 제 뇌파의 패턴이 한 6~7초 차이를 두고 선생님 뇌파와 비슷하게 나타날 겁니다. ‘장동선은 뭐라고 할까?’ 그걸 예측하고 대화를 따라가려고 하시니, 둘의 뇌가 공명하고 이해와 공명이 일어나는 거죠. ‘뇌 속에 또 다른 뇌가 있다’는 건, 우리 뇌가 끊임없이 다른 사람의 뇌를 시뮬레이션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뇌 편가르기 좋아해
사람 자체 들여다보기 전에
낙인·꼬리표에 따라 평가
돈 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약자에 대한 공감능력 떨어져

지난 7일 서울 삼성동에서 뇌과학자 장동선 박사와 이진순씨가 대화를 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지난 7일 서울 삼성동에서 뇌과학자 장동선 박사와 이진순씨가 대화를 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영재소년이 거리의 아웃사이더들에게 배운 것?

-인간의 뇌는 빠른 시간 안에 상대를 파악하기 위해서 직감에 의존한다고 쓰셨죠. 낯선 사람을 만날 때 직감으로 먼저 판단하고 그 뒤에 논리적으로 첫인상의 이유를 갖다 붙인다고요. 장동선이란 인물에 대한 저의 첫인상은 ‘아주 밝고 기쁜 눈동자를 가진 사람’이에요.(웃음) 이런 첫인상을 가지게 된 건 천성인가요, 노력의 결과인가요?

“천성이 밝은 건 맞고요. 근데 제 동창생들 말로는 고등학교 입학할 때 제 얼굴에 굉장히 어두운 아우라가 넘쳤대요.(웃음) 산전수전 다 겪은 아저씨 같았다고.”

장동선이 평탄한 가정에서 고이 자란 모범생이었을 거란 내 예견은 빗나갔다. 그가 인간관계와 소통에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된 건, 자신의 파란만장한 성장사와 무관하지 않은 듯했다. 리버럴한 인텔리 부모 밑에서 자유분방한 독일 영유아 교육의 세례를 받고 자란 그가 한국에 돌아왔을 때 학교는 그에게 너무나 낯선 곳이었다.

“80년대 초등학교에선 애들이 질문을 많이 하는 걸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제 질문에 대한 답변은 체벌이었죠. 왕따 문제도 있었고요. 친구들 사이에서 ‘독일 아이’로 불렸으니까요. 결국 학교 출석은 최소한으로 하고 부모님이 홈스쿨링으로 교육을 시키셨어요.”

-그때는 홈스쿨링이란 용어도 없었을 때 아닌가요?

“아마 제가 국내 홈스쿨러 1호일 거예요. 아버님 동료 교수님들한테 배우고 어머니한테 교육받고. 3개 국어, 5개 국어를 배우고, 철학책을 읽고, 여행을 다녔죠. 학교는 최소한으로 출석했는데 시험을 보면 만점을 맞으니까 선생님도 뭐라 하지 않으셨고.”

-천재였네요!

“초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중졸 검정고시를 봤는데 경기도 수석으로 붙었어요. 그리고 곧바로 고졸 검정고시를 보고 열네다섯에 카이스트에 간다는 계획이었어요.”

그러나 계획은 뜻하지 않은 데서 꼬이기 시작했다. 친가, 외가, 양쪽 집안에 줄줄이 변고가 닥치면서 부모님은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여유를 잃었고, 홈스쿨링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장동선은 혹독한 사춘기를 보냈다. 가출과 방랑으로 2년을 보냈다.

-집 나와서 어디서 지냈어요?

“처음 가출했을 때 갈 데가 없는 거예요. 서울역에서 첫 밤을 보냈는데, 바람이 많이 불고 몹시 추운 날이었어요. 라틴어 공부하고 세계여행 다니던 아이가 갑자기 서울역에서 노숙자들과 밤을 보내게 되었는데 뭘 알겠어요? 자리 임자가 있는 것도 모르고, 제일 바람 안 부는 곳에 박스 펴고 자다가 머리끄덩이 잡혀서 끌려 나가 죽도록 얻어터졌죠.(웃음) 그 아저씨는 때려놓곤 미안한지 소주 한 병 들고 다시 부르더라고요. ‘너, 술 먹어봤냐?’ 하면서.(웃음)”

-전혀 다른 세상을 경험한 거네요.

“나중엔 서울역보다 나은 데를 발견했죠. 피아노를 칠 줄 아니까 밴드부 형들을 알게 돼서 밤에는 거기서 잤어요. 나이트클럽 삐끼 하는 애들도 만나고, 본드 흡입하는 가출 청소년도 마주치고…. 그러다가 친한 친구의 죽음도 목격했어요. 나도 세상을 등질 생각까지 했는데 그것도 뜻대로 되는 게 아니더라고요. 그러곤 깨달았어요. ‘죽고 안 죽고는 내게 달린 일이 아니구나. 내가 이 세상에서 뭔가 해야 할 일이 있나보다. 그 미션을 풀 때까진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구나’ 하고.”

마음을 다잡고 다시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3년 월반하고 3년 묵었다가 제 나이에 고등학교에 입학을 한 셈이었다. 그가 입학한 안양고는 당시 성적우수자가 대거 몰리는 비평준화 학교였다. 입시 준비엔 별 관심 없었지만 하고 싶은 공부, 하고 싶은 활동을 펼치는 데는 누구보다 열성적이었다. 1년 동안 학교 쪽을 집요하게 설득해서 음악서클을 만들고, 피시통신으로 전국 고등학교 과학서클을 모아서 55개교 1000여명이 함께하는 전국 고등학교 과학서클연합을 조직해서 초대 회장이 되었다. 이들의 활동이 언론에 소개되고 주목을 받으면서 김대중 정부 때 만들어진 대한민국 청소년위원회의 초대 위원장으로 뽑히기도 했다. 체벌 금지를 법제화하고 선거권 연령 인하 운동을 펼쳤다.

-10대의 5~6년간 정말 극과 극 체험을 했군요.

“내 삶에 뭔가 미션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미친 원동력’이 되어준 것 같아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삶인데, 후회하지 않으려면 다른 사람들한테 뭔가 도움이 되는 인생이 되어야겠다, 누구에게나 변화를 만들 능력은 있다, 죽을 것 같으면 한번 미쳐보자! 그런 마음이었죠.”

그에겐 영재교육 홈스쿨링 못지않게, 거리에서 만난 밑바닥 인생, 아웃사이더들과의 교감도 인생의 큰 자양분이 되었다. 장동선의 책 한국어판 서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우리 모두는 한 사람 한 사람이 특별합니다. 아주 특별한 뇌를 가졌거든요. 우리의 뇌는 다른 사람 없이는 살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는 다른 사람들이고,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야 우리는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9쪽)

장동선 박사, 뇌과학자, <뇌 속에 또 다른 뇌가 있다>의 저자. 2017년 9월 7일 삼성동.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장동선 박사, 뇌과학자, <뇌 속에 또 다른 뇌가 있다>의 저자. 2017년 9월 7일 삼성동.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티셔츠 색깔 하나에 우왕좌왕하는 뇌
이진순의 열림
이진순의 열림

-우리 뇌는 같은 정보를 모두 다르게 인지하지만 동일한 주제에 집중할 때는 뇌파의 패턴이 일치하는 경향이 있다고 쓰셨죠. 이게 이해와 소통의 근거가 된다고요. 세월호 참사 때 우리가 느낀 무력감과 분노, 죄책감 같은 게 그런 경우 같아요. 그런데 한편에선 희생자와 유가족을 조롱하고 폭식 퍼포먼스를 벌이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대체 어떻게 이런 반응이 나오는 걸까요?

“두 가지 설명이 가능해요. 첫째, 인간의 뇌는 편 가르기를 잘해요. 처음 보는 사람들 20명을 모아놓고 열 명한테 파란색 티셔츠를, 다른 열 명한테 빨간색 티셔츠를 나눠 줘요. 그리고 평가를 해보라고 하면 신기하게도 티셔츠 나눠 준 대로 평가가 엇갈려요.”

-색깔에 따라 편이 갈린다고요?

“그렇죠. 빨간 옷을 입은 사람들은 빨간 티 입은 사람을 호의적으로 평가하는 반면, 파란 티셔츠를 입은 애들은 더 못생기고 더 공격적이고 더 멍청하고 더 더럽다고 부정적 평가를 하는 거예요. 상대편도 마찬가지고요. 그냥 무작위로 나눠 준 건데, 티셔츠 색깔이 뭐라고. 이 연구가 보여주는 건, 사람한테 어떤 낙인이나 꼬리표가 붙으면 그 사람 자체를 들여다보기에 앞서서 내 편 네 편으로 나누는 메커니즘이 작동을 한다는 거예요. 이런 메커니즘은 상대편에 대한 인간의 공감능력을 뚝 떨어뜨리죠. 정치권에서 빨갱이 좌파다 꼴통 우파다 이런 태그를 붙이면, 같은 결과가 나타나는 거예요.”

-여성 혐오나 이민자,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도 같은 맥락인가요? 나와 다르다고 낙인찍힌 자들에 대한 배타성?

“그렇죠. 논쟁이 많은 연구결과긴 하지만, 빈부격차나 사회적 부조리가 높은 사회일수록 사회적 약자에 대한 무차별 폭력과 살인이 늘어난다는 보고도 있어요. 먹이사슬의 맨 밑바닥으로 스트레스가 가중되어 내려오면서 터지는 거죠.”

이진순의 열림
이진순의 열림
-아까 세월호 문제에 두 가지 설명이 가능하다고 했는데 또 하나는 뭡니까?

“또 다른 실험이 있는데, 당신이 지금 굉장히 많은 돈을 갖고 있거나 굉장히 큰 권력을 갖고 있다고 상상해보세요. 보통 누군가 맞아서 아파하면 우리도 모르게 움찔하면서 그 고통에 공감을 하잖아요. 근데 당신에게 권력이 있다, 돈이 있다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아픈 사람, 약한 사람에 대한 공감능력은 확연히 떨어져요. 높은 지위에 있거나 많은 걸 가진 사람들은, 내가 이 위치에 있어서 공감을 못하는 건 아닐까 수시로 되짚어봐야 해요.”

-이렇게 편 가르기를 하고 이미 적대감이 형성되어 있는 상태에서, 서로간의 소통과 공감이 가능할까요?

“사람들은 ‘샌드위치를 좋아해? 김밥을 좋아해?’나 ‘개가 좋아? 고양이가 좋아?’ 같은 취향의 차이에 대해선 대부분 너그럽지만, 정치적 견해의 차이로 누군가 건드렸을 땐 자기 아이덴티티 자체가 부정당한 것처럼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는 게 밝혀진 적이 있어요. 정치적, 종교적 신념은 단순한 취향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의 핵심이라고 착각하는 거죠.”

-이해됩니다. 우린 정치적 ‘다름’을 ‘틀림’으로 동일시하니까요. 내가 믿는 정보가 사실이고 나와 정치적 견해가 다른 이들은 가짜뉴스에 빠져 있다고 생각하죠.

“이게 어떻게 풀릴 수 있을까요? 전 이번 대선을 굉장히 재밌게 봤는데, 가까운 지인한테 ‘어떤 후보가 맘에 드냐?’고 하니까 ‘홍준표와 심상정이 젤 마음에 든다’고 하더라고요. 충격적이죠.(웃음) 어떻게 이런 조합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이게 양자대결이면 절대로 불가능했을 거예요. 5자대결이 되니까, 굉장히 다른 견해를 가진 두 사람에게서 장점을 찾는 거죠.”

-뇌의 편 가르기 속성을 극복하기엔 양당제보다는 다당제가 훨씬 유리하겠네요?(웃음)

“훨씬 낫죠. 단순 편 가르기가 작동하지 않으니까. 그런 다양성을 만드는 게 뇌의 공감능력을 닫아버리지 않게 하는 한 방법이 되지 않을까요?”

우리 뇌에 속지 않으려면
순간의 인지와 감정들이
사실인지 되묻는 성찰 필요해
누군가 ‘나쁘다’란 생각 들 땐
그 이면은 무엇인지 짚어봐야

장동선 박사, 뇌과학자, <뇌 속에 또 다른 뇌가 있다>의 저자. 2017년 9월 7일 삼성동.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장동선 박사, 뇌과학자, <뇌 속에 또 다른 뇌가 있다>의 저자. 2017년 9월 7일 삼성동.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어마어마하게 잘못된 찬반논쟁

-‘집단지성이 제대로 작동되기 위해선 각 개인이 전문가나 다른 사람의 개입 없이 스스로 정보를 얻고 독립적으로 판단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고 쓰셨는데, 현실적으로 이게 가능합니까? ‘신고리 5, 6호기 공론화위원회’처럼 사회적 갈등을 빚는 쟁점에 대해서 전문가 양측의 견해를 충분히 듣고 시민들이 판단하게 한다는 게 기본 시나리오인데요.

“기후변화에 대해 맞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고 기후변화를 부정하는 분들이 있어요. ‘우리는 양쪽 의견을 듣기 위해서 찬성론자, 반대론자 모셔서 토론하겠습니다.’ 이게 과연 올바른 토론일까요?”

-지금 국내 대부분의 방송 토론이나 공청회도 그렇게 진행돼요.

“어마어마하게 잘못된 토론이죠. 99.999%의 과학적 증거는 기후변화가 존재한다는 걸 입증하잖아요. 0.001%의 소수가 아니라고 우기는 건데, ‘양쪽 전문가를 초청한다’는 건 양쪽 신뢰도를 50 대 50으로 보이게 만드는 거죠. 절대로 있어선 안 될 일이에요.”

-과학적 논쟁이 되어야 할 걸 정치적 논쟁으로 만들려고 하니까 그런 일이 생깁니다. 대안이 있을까요?

“하나의 솔루션은, 모든 걸 완벽하게 오픈하는 민주적 시스템이에요. 모든 사람들이 의견을 올릴 수 있게 전면 공개해서 가장 많은 관심과 댓글이 붙는 의견을 중요 의견으로 받아들이고, 쓸데없는 데이터는 도태되도록 하는 것. 또 다른 방안은, 전문가그룹을 뽑을 때 진짜 전문가들을 잘 가려 뽑아서 그 그룹이 정말 잘 작동되도록 하는 것. 어떻게 보면 직접민주주의와 간접민주주의의 장단점하고도 맞닿아 있을 거예요.”

-박사님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이 구절이었어요. “뇌는 우리에게 보여지는 것을 바탕으로 판단을 내리도록 지시한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뇌가 믿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 뇌도 늘 속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우리 뇌에 속지 않으려면 뭐가 필요할까요?

“성찰과 반문이 필요하죠. 내가 보고 느낀 그 순간의 인지와 감정들이 사실일까 되묻는 것. 신문기사에서 어떤 아이를 보고 ‘쟨 나쁜 애다’ 생각이 들었을 때 ‘그 이면엔 무엇이 있을까? 나의 어떤 경험들이 이렇게 보게 하는 건 아닐까?’ 생각해 보는 것. 촛불집회 나간 사람이 태극기집회 나간 사람을 미워하기만 해선 소통이 안 되죠. ‘어떻게 나오시게 됐어요? 촛불집회 하는 사람들이 왜 미우세요?’ 이렇게 물어보면 태극기집회 나온 사람들 나름대로 다 스토리가 있을 거예요. 내가 꼭 동의할 필요는 없지만, 저 사람들한테 이런 외부적 요인이 있었구나 아는 건 중요해요. 그 소리를 들어주고 나면, 그 사람도 나를 대하는 태도가 조금 달라질지도 모르고요.”

장동선 박사, 뇌과학자, <뇌 속에 또 다른 뇌가 있다>의 저자의 인터뷰 사진들로 <뇌>자를 만들어 보았다. 2017년 9월 7일 삼성동.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장동선 박사, 뇌과학자, <뇌 속에 또 다른 뇌가 있다>의 저자의 인터뷰 사진들로 <뇌>자를 만들어 보았다. 2017년 9월 7일 삼성동.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마지막 질문이자 당부 말씀. 이런 뇌과학 연구가 빅데이터를 소유한 정보산업이나 권력층의 이익을 위해서 소비되지 않고 더 나은 세상, 더 많은 사람을 위해서 두루 쓰이면 좋겠습니다. 그럴 방법이 있습니까?

“우리가 늘 질문해봐야 할 게 이 기술이 모든 사람에게 공유되는가 하는 점이죠. 극소수의 사람들만 발전된 기술을 가지고 있으면, 또 다른 의미의 정보 프롤레타리아가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질문. 저는 기술이 사회를 바꿀 수 있는 큰 힘이라고 생각해요. 스마트폰 생기면서 그간 제도 변화만으로 해결되지 못하던 폭력이나 체벌을 막는 데 큰 제동장치가 되었죠. 그런 기술을 더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공유하도록 하는 게 제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한 기술을 연구하고, 그 기술의 위험성이 있다면 널리 알리고 소통하는 일, 그게 과학자로서, 커뮤니케이터로서 제가 하고 싶은 두 가지 일입니다.”

이진순 풀뿌리정치실험실 '와글' 대표 언론학 박사
녹취 심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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