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조건의 일부 동물실험에서는 실험하는 연구자가 남자인지 여자인지에 따라 다른 연구결과가 나타날 수도 있다는 지적이 나와 눈길을 끈다. 게티이미지뱅크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는 아직 분명치 않다. 그렇지만 실험실에서 동물실험을 하는 연구자가 남자냐 여자냐에 따라 실험동물의 반응이 달라진다는 보고가 심심찮게 이어져 관련 연구자들을 당혹스럽게 하고 있다. 이른바 ‘클럽약물’로 불리며 국내에선 마약류로 분류되는 ‘케타민’이라는 물질이 항우울 효과를 내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실제 임상에선 효과가 오락가락해 논란이 이어져왔는데, 바로 이 물질의 효능에 관한 알쏭달쏭한 실험 결과가 최근 화제가 됐다.
과학저널 <네이처>의 뉴스 보도를 보면, 미국 메릴랜드대학의 신경과학 실험실에서 한 여자 연구자는 남자 연구자의 의뢰를 받고서 쥐를 대상으로 케타민의 항우울 효과 실험을 되풀이했으나 남자 연구자의 실험에선 뚜렷이 나타났다는 항우울 효과를 확인할 수 없었다고 한다(
go.nature.com/2hOD8mF). 그런데 이는 우연한 현상이 아니었다.
“남자 연구자 실험에선 나타나던 반응이…”
이 실험실의 연구진은 혹시 연구자 성별에 따라 동물실험 결과가 달라지는 것은 아닌지를 확인하는 실험에 나섰다. 널리 통용되는 항우울 효능 실험으로서, 건강한 쥐에게 케타민을 주사한 다음에 이 쥐를 물통에 넣고서 얼마나 오래 헤엄치는지를 측정하는 방식이었다. 항우울 효과가 있다면 실험쥐는 더 오래 헤엄칠 수 있다.
실험실 책임자인 신경과학자 토드 굴드 교수는 비슷한 경험을 보고했던 예일대학의 다른 연구진과 함께 같은 실험을 본격적으로 되풀이했다. 이번엔 남자 8명과 여자 8명이 각각 실험에 참여했는데 같은 결과를 얻었다고 한다. 즉, 여자 연구자가 행한 실험에선 쥐에게 케타민의 항우울 효과가 잘 나타나지 않았으나 남자 연구자가 수행한 실험에선 효과가 나타났다. 연구진은 지난달 14일 미국 워싱턴디시에서 열린 국제신경과학회(SfN)에서 이런 희한한 사례를 보고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를 추적하는 데 도움이 될 단서는 있었다.
연구진은 남자가 입었던 옷가지 등을 쥐 근처에 놓았을 때도 남자 연구자가 실험할 때와 마찬가지로 케타민의 항우울 효과가 관찰됐다고 한다. 물론 아직은 확실한 결론을 얻기 어려운 상황이다. 다른 항우울 후보물질에 대한 실험에선 연구자 성별이 실험동물의 반응에 영향을 끼쳤다는 보고는 아직 없기 때문이다. 또한 여자 연구자들이 케타민 효능 실험을 벌여 이미 보고한 실험논문도 꽤 있었기에, 연구자 성별 효과가 케타민 물질에만 한정된 것인지, 쥐에만 한정된 것인지, 또는 아직 모르는 실험실의 다른 환경 요인 때문인지 알 수 없다. 굴드 교수는 이런 발표 내용을 바탕으로 연구자 성별 효과의 직간접적 의미를 살펴보는 정식 논문을 학술지에 낼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2014년 통증반응 실험에서 처음 보고돼
<네이처> 뉴스의 보도가 특별히 관심을 끄는 이유는 비슷한 사례가 이전에 정식 논문으로 학술지에 발표된 적도 있기 때문이다.
2014년 캐나다 맥길대학교의 제프리 모길 교수 연구진은 남자 연구자가 동물을 상대로 실험할 때 동물한테서 스트레스 호르몬의 수치가 높게 나타나고 이로 인해 통증에 반응하는 행동 표현이 둔화되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결과를 <네이처 메소드>에 발표한 바 있다(
go.nature.com/2ju9WBP). 이런 결과는 남자와 여자 연구자 각 4명이 암수컷 쥐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 과정에서 얻어졌다.
‘연구자 성별 효과’를 처음 보고해 크게 주목받은 이 논문에서 동물의 후각은 중요한 요인으로 다뤄졌다. 연구진은 남자가 입었던 티셔츠나 남자 겨드랑이 분비물, 수컷 포유류의 잠자리 재료 등을 실험용 쥐의 근처에 놓아둘 때도 마찬가지로 ‘남자 연구자 효과’가 나타난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보고했다. 스트레스 효과는 암컷 쥐들에게 더 크게 나타났다.
연구를 이끈 모길 교수는 <한겨레>에 보낸 전자우편에서 이런 현상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는 간단한 문제이지만 ‘왜’ 일어나는지는 여전히 추정할 뿐이라며 “실험동물이 특정 성분의 냄새를 맡을 때 스트레스 반응을 일으킨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런 반응이 ‘수컷만의 냄새’가 날 때 어떤 폭력적 상황이 곧 일어날지 모른다는 걱정이 일기 때문에 나타나는 건 아닐까 추정할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발표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현상이 사람들한테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남을 보여주는 데이터가 있다”면서도 “하지만 통상의 조건들에서도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에 관해선 알지 못한다”고 덧붙였다.
“동물 스트레스 실험 땐 연구자 성별 밝혀야”
동물실험과 관련한 ‘성별 문제’는 그동안 주로 실험 대상인 동물을 중심으로 제기돼왔다. 기존의 동물실험들을 돌아볼 때 그동안 실험들이 다루기 편한 수컷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바람에 신약 개발의 초기 자료가 되는 동물실험 기초연구에서 여성의 생리학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뤄질 수밖에 없었다는 지적이 제기돼왔다. 이 때문에 남녀 모두를 위한 신약 개발을 위해선 암수컷의 실험동물을 사용하는 ‘양성 균형’이 이루어져야 하며 실험동물의 성별을 논문에 명시하도록 하는 새로운 관행도 생겨나고 있다.
이에 비해 실험을 행한 연구자가 남자인지 여자인지에 따라 동물 반응이 달라질 수 있다는 보고는 아직 많지 않다. 하지만 이런 보고와 관심이 이어지면서, 모든 동물실험은 아니지만 특히나 동물의 스트레스 반응과 행동을 자세히 관찰해야 하는 실험에선 동물을 다룬 연구자의 성별도 논문에 밝혀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발표된 실험 결과를 재현하려는 다른 연구자들의 후속 연구를 위해서도 이런 정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한국여성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부설 젠더혁신연구센터의 백희영 센터장(서울대 명예교수)은 “동물이 실험자 성별에 따라 다른 반응을 보일 수 있으므로 실험에 남녀 연구자가 모두 참여해야 비로소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며 “남자 연구자가 대부분이었던 예전엔 관찰되지 못하다가 여자 연구자들이 많아지면서 전에 몰랐던 이런 현상들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오철우 선임기자
cheolwo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