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남부 슈바벤 지역의 펠스 동굴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구석기 비너스 조각상. 3만5천년 전 무렵 크로마뇽인이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위키미디어커머스 제공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의 대표 전시물인 ‘밀로의 비너스’는 그리스 남부에 있는 밀로스섬에서 발견됐다. 작가 미상의 이 조각상은 기원전 130∼100년께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 그리스 조각가 프락시텔레스가 기원전 350년께 조각했다는 ‘크니도스의 아프로디테’ 역시 유명하다. 로마신화의 비너스와 그리스신화의 아프로디테는 ‘미의 여신’이다. 비너스는 아름다움의 상징하는 소재로 예술작품에 단골로 등장한다.
19세기 중엽 구석기 여성 조각상을 발견한 프랑스 아마추어 고고학자 폴 우로르는 크니도스의 아프로디테에서 따와 자신의 조각상에 ‘야한 비너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후 일련의 구석기 시대 조각상들은 ‘비너스 작은 조각상’이라 불리며, 미를 상징하는 인류 초기 예술품들로 여겨져왔다.
‘구석기 비너스’들은 대부분 손으로 제작됐으며 길이 6∼16㎝의 작은 조각상들이다. 재료는 맘모스 송곳니나 돌, 뿔 등을 썼으며 간혹 진흙으로 빚기도 했다. 일부는 끈을 달 수 있도록 돼 있어 부적처럼 사용됐던 것으로 보인다. 상아와 돌에 낀 녹청으로 미뤄, 몇 세대에 걸쳐 유품으로 대물림됐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젊은 여성의 이상적인 신체 크기가 후대에 전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비너스 조각상들은 그동안 성적 특징이 강조돼 다산과 아름다움의 상징으로 해독되고, 좀더 상상력을 발휘하면 여신으로 해석됐다. 개성을 생략하기 위해 얼굴의 특징은 강조되지 않아, 조각상들은 일종의 견본처럼 보였다.
‘밀로의 비너스’(왼쪽)와 ‘크니도스의 아프로디테’. 위키미디어커머스 제공
하지만 미국 콜로라도대 연구팀은 3만년 전 구석기 시대에 만들어진 ‘뚱뚱한’ 비너스 조각상들이 미와 풍요의 상징이 아니라 혹한의 기후변화 시기에 생존에 대한 염원을 담아 제작됐다는 새로운 이론을 제시했다.
논문 주저자인 리처드 존슨 콜로라도대 의대 교수(신장병·고혈압 전공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예술품인 이 뚱보 여인들 조각상은 전혀 살이 찔 수가 없는 유럽 빙하기 수렵채취인 시대에 등장했다“며 “이들 조각상이 극한의 영양 결핍 시기와 연관이 있음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연구팀 논문은 저널 <비만>(Obesity)에 실렸다.
유럽에 현대 인류가 등장한 것은 온난한 시기인 4만8천년 전으로 추정된다. 오리냐크인들로 알려진 고대 수렵채취인들은 여름철에는 산딸기와 물고기, 견과류 등으로 근근이 살아갔다. 또 뼈를 깎아 만든 창으로 순록이나 말, 맘모스 등을 사냥했다.
3만8천년 전께 빙하기가 도래해 혹독한 겨울이 찾아오고 빙하가 밀고 내려오자 수렵채취인들은 남하해 지금의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지역 숲속으로 피난하거나 사멸했다. 빙하가 진출함에 따라 대형동물들이 남획돼 씨가 마르고 생존을 위해 토끼, 새, 마멋 등 작은 동물들을 잡아먹었다는 사실이 화석들에 남아 있다.
기온은 2만8천년 전 무렵 4∼8도 내려갔으며 2만2천년 전께 마지막 최대빙하기(LGM)에 이르렀다. 가장 추운 겨울에는 영하 10∼15도에 이르렀다. 인구도 대폭 줄어 2만9천∼2만5천년 전에는 이전 시기(3만3천∼2만9천년 전)보다 3분의 1까지 감소했다. 이 시기에 영양 결핍으로 키가 7∼10㎝나 줄었다.
A. 체코 돌니 베스토니츠의 비너스(2만6천년 전) B. 이탈리아 샤비냐노의 비너스(2만4천~2만3천년 전) C. 러시아 자라이스크의 비너스(1만9천년 전) D. 프랑스 아브리 파투의 비너스(2만1천년 전). 빙하 진출기 비너스 조각상의 비만 비율이 빙하 퇴조기 비너스 조각상의 비만 비율보다 큰 것으로 조사됐다. 미국 콜로라도대 제공(위키키미디어커머스)
연구팀은 3만8천∼1만4천년 전 사이 기후 격변기에 제작된 ‘비너스 조각상’들을 위치와 크기별로 분류했다. 북프랑스, 중유럽, 러시아 등지에서 발견된 빙하기(3만8천∼2만2천년 전) 조각상 17개와 남유럽에서 발견된 빙하기 조각상 5개, 러시아에서 발견된 빙하기 이후(2만1천년 전 이후) 조각상 8개와 남유럽에서 발견된 빙하기 이후 조각상 11개를 비교했다.
연구팀 분석 결과 빙하 진출기에 빙하와 가까운 지역 곧 북·중유럽과 러시아의 조각상들은 가슴-어깨 비율과 가슴-엉덩이 비율이 남유럽에 비해 컸다. 마찬가지로 빙하 진출기의 조각상들은 마지막 최대빙하기 곧 빙하 퇴조기의 조각상들에 비해 가슴-어깨 비율과 가슴-엉덩이 비율이 컸다.
연구팀은 이런 차이에서 조각상 모양이 영양 결핍과 연관돼 있는 의미를 찾아냈다. 곧 체지방 비축을 통해 영향 결핍을 줄일 수 있다는 영적이고 마법적인 의미를 전달하는 예술품이라는 해석이다. 가임기 여성은 성공적인 임신을 위해 체중을 늘리려고 조각상을 몸에 지녔을 수 있다.
연구팀은 “조각상들은 산모와 태아의 건강, 수임기간, 임신, 출산, 수유 등을 잘 관리할 수 있는 힘을 주는 상징으로 여겨진 것 같다”며 “증가한 체지방은 혹한 날씨에 특히 초기 인류가 정착한 북위 49∼52도의 최북단에 위치한 빙하 최전선 지역에 적응하기 위한 전략이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신생아가 이유기에까지 이르려면 두번의 극한 겨울을 보내야 한다. 여성들은 월경을 위해 남성들보다 체지방이 17% 정도 더 필요하다. 임신을 위해서는 22%가 더 필요하다. 음식 없이 평균 몸집의 여성이 아이를 낳고 3개월 동안 수유를 하기 위해서는 16㎏의 체지방이 있어야 한다. 저체지방은 월경 불순뿐만 아니라 수유 능력을 잃은 엄마로 인해 신생아의 사망을 야기할 수 있다.
학부 때 인류학을 공부한 존슨 교수는 “구석기인들은 젊은 여성 특히 빙하와 가까이 살았던 여성들의 이상적인 신체를 조각했다고 생각한다”며 “신체 비율이 빙하가 밀려올 때 가장 커지고 온난화기가 다가와 빙하가 퇴조할 때 비만도가 감소했다”고 말했다.
이근영 기자
ky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