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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과학 기술

“2008년 광우병 사태 때 다음 아고라 서버 터져 정신없었죠”

등록 2015-09-11 20:45수정 2015-12-22 14:37

지난 1일 서울 중구 퇴계로 사무실에서 만난 권오현 유에프오팩토리 대표가 밝게 웃고 있다. 그는 인터넷을 통해 즐겁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프로그램 개발자다.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지난 1일 서울 중구 퇴계로 사무실에서 만난 권오현 유에프오팩토리 대표가 밝게 웃고 있다. 그는 인터넷을 통해 즐겁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프로그램 개발자다.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권오현 유에프오팩토리 대표
사람들은 자신이 직접 체험하는 만큼만 기술에 의미를 부여한다. 더글러스 애덤스라는 영국 작가는 1999년 <선데이 타임스>에 새로운 기술을 대하는 사람들의 통념을 이렇게 요약했다.

1. 우리가 태어났을 때부터 세상에 있었던 것은 모두 정상이다.

2. 우리가 태어난 이후부터 서른살이 될 때까지 발명된 것은 매우 흥미진진하고 창조적이다.

3. 우리가 서른살을 넘어 발명된 것들은 하나같이 자연의 질서에 어긋나고 문명 종말의 징조다. 발명된 지 한 10년쯤 지나면 차츰 괜찮은 것으로 여긴다.

인터넷이 처음 한국에 들어왔을 때도 그랬다. 장년세대가 컴퓨터를 비싼 장난감이나 성능 좋은 타자기로 여길 때, 청년들은 신천지를 발견한 양 새롭게 열린 공간에 열광했다. 그들에게 온라인 공간은 더 나은 민주주의를 기약하는 교두보였다. 20여년이 흐르면서 이제는 모든 세대가 이메일을 쓰고 채팅을 한다. 인터넷은 더 이상 진보적인 청년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인터넷과 소셜미디어가 일상의 한 영역이 되었지만, 인터넷을 둘러싼 자본은 더 거대해졌고 권력은 촘촘한 감시망으로 더 막강해졌다.

인터넷이 가능케 한 더 많은 소통의 기회가 반드시 더 좋은 세상을 가져다주는 건 아니라는 걸 이제 사람들은 안다. 인터넷 기술로 일확천금을 한 거부들의 성공신화를 흠모할 뿐, 그 기술이 권력의 판도를 바꿀 거라고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래도 여전히 도전을 포기하지 않은 이들이 있다. 돈이 되는 기술보다는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기술을 꿈꾸는 사람들. 인터넷으로 “즐겁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프로그램 개발자들의 벤처회사가 있다고 했다. 이들은 지금 어떤 실험을 하고 있을까.

지난 1일 오후 남산 기슭의 가파른 골목길을 오르내리며 회사 팻말을 찾는 데 한참 걸렸다. ‘유에프오(UFO)팩토리’. 널찍한 코워킹 스페이스 한구석에서, 컴퓨터를 마주하고 10여명이 작업하고 있었다. 창업자 권오현(39) 대표는 일하는 직원들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우리 일행을 조용히 2층 회의실로 인도했다.

‘정체불명의 재미’를 찾아서

-오기 전에 열심히 뒤져봤는데 개인 신상에 관한 자료가 거의 없더군요. 비영리 분야에선 많이 알려지신 분인데, 언론과 접촉한 적이 별로 없나 봐요.

“딱히 해야 한단 생각을 못 해봤고요, 별로 티내며 일하는 스타일도 아니고….”

쑥스러운 미소로 말끝을 흐렸다. 나지막하고 차분한 목소리였다.

-근데, 유에프오팩토리에 유에프오는 없네요.

“아? 네! 허허허….”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 농을 건넸는데 그는 여전히 수줍은 낯빛으로 웃기만 했다.

-유에프오팩토리가 무슨 뜻이에요?

“미확인비행물체(Unidentified flying object), 그 유에프오는 아니고요, 언아이덴티파이드 펀 오거니제이션(Unidentified fun organization)의 약자예요.”

-그럼 ‘정체불명의 재미있는 조직’? 무슨 뜻인지 진짜 정체불명인데요.(웃음)

“사람들마다 자기가 재밌어하는 일들이 각자 있는데 그걸 혼자서 찾으려고 하면 힘들잖아요. 같이 뭉쳐서 해보자는 거죠.”

-뭐가 재미있는 건데요?

“사회적으로 꼭 필요한데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하는 게 재미죠. 좋은 일을 하는 소셜벤처나 비영리단체를 도와서 일을 하기도 하고요.”

2013년 5월 설립된 유에프오팩토리는 그간 그린피스, 유니세프, 아이쿱생협 등의 온라인 캠페인을 기획하거나 청년허브, 열정대학 같은 비영리단체의 홈페이지를 디자인하고 제작했다. 텀블벅(크라우드펀딩 플랫폼), 열린옷장(의상 공유·대여), 집밥(식사를 함께 하는 커뮤니티), 키플(아이옷 공유·대여) 등 사회적 기업 80여곳의 사이트를 설계하고 만든 것도 이들이다.

-지금 직원 수가…?

“20명입니다.”

-그래요? 자리를 비우신 분이 많군요.

“저희는 리모트(Remote) 근무라고 해서 직원들이 각자 원하는 장소에서 일을 할 수 있어요. 지금은 두명이 제주에 내려가 있고….”

-그럼 항공료와 숙박비는요?

“회사에서 부담하죠. 전 40시간 근무가 비인간적이라고 생각해요. 서울에서 출퇴근하기 위해서 시간을 낭비하는 것보다 에너지를 본인 업무에 집중하는 게 효과적이라고 봅니다. 일의 결과만 체크하고 나머지는 팀별로 자율 운영해요. 어떤 팀은 일주일을 몽땅 빼서 리모트를 하기도 하는데, 자기가 원하면 집이나 외부에서 근무할 수 있습니다. 워킹맘으로 일하는 여자분은 애들 방학 동안 리모트를 하시고요. 미취학 아동을 둔 남자 개발자도 애들 돌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리모트를 하고 계세요. 제 꿈 중에 하나가 개발자를 유럽의 고성이 있는 마을 같은 데 보내는 거예요. 오키나와, 발리, 그다음에 유럽, 그렇게 보내려고요.”

-직접 얼굴 보고 일하는 것에 비해서 업무효율이 떨어지지 않나요? 서로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지 못하면 팀워크에도 문제가 생길 텐데요.

“저희같이 메신저나 온라인으로 얘기하는 사람들은 하루 종일 메신저에 붙어 있거든요. 새벽이나 밤늦게까지 앉아서 메신저로 얘기할 때도 있어요. 얼굴 보고 하기 힘든 내밀한 얘기도 더 많이 나누고. 친밀감이 떨어진다곤 생각하지 않아요.”

-돈 안 되는 일을 많이 하는데, 직원들 처우는 어떻게 하세요?

“주니어나 중견 개발자는 업계 평균쯤 되고요, 시니어 개발자는 대기업 평균의 80% 정도? 대기업 수준에 맞추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럼 사장은 얼마나 가져가죠?

“저는 뭐….”

난처한 듯 그가 또 말끝을 흐렸다. 반복해 물으니 마지못해 “이전 대기업에서 받던 연봉의 60%쯤” 받는다고 했다. 인정받는 개발자로서 안정된 연봉을 포기하고 자신이 추구하는 재미를 선택한 셈이다.

교회오빠, 세습의 벽에 절망한 뒤
민주노동당 자원봉사하면서
세상에 상처와 부조리에 눈떠
제일 먼저 눈에 잡힌 일이
컴퓨터 기술로 사회 도움 주는 것

자유 토론과 온라인 청원에 주력한
다음 아고라 2차 버전 개발 주도
2008년 광우병 사태 때 서버 폭발
‘독립 플랫폼’에 대한 문제의식
맨주먹으로 유에프오팩토리 설립

‘단잠교회’ 목사가 되고 싶었던 교회 오빠

권오현을 만든 시간들
권오현을 만든 시간들
권오현은 2006년 다음에 입사해 개발리더와 기획자로 일하면서 토론방 ‘아고라’와 블로거들의 콘텐츠를 유통시키는 ‘블로거 뉴스’를 만들었다. 이후 삼성 계열의 대형 기획사에서 광고 플랫폼을 만드는 일도 했지만, 오래지 않아 자진 퇴사했다.

-왜 그만두셨어요?

“재미가 없었어요. 월급도 많이 받고, 점심시간도 두시간이나 쓰고, 일을 할 때도 늘 ‘갑’이 되는 곳인데….(한숨)”

-근데 왜 한숨이에요?

“한국의 똑똑한 사람들 다 모아서 아무 일도 못하게 하려고 만든 회사처럼 느껴졌어요. 아침부터 회장님 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회장님을 위해 일하는.”

-원래 어떤 개발자가 되고 싶었는데요?

“2003년 다음에 입사할 때 면접을 보는데 ‘10년 후에 뭘 하고 있을 것 같냐?’고 묻더라고요. ‘좋은 서비스를 독립적으로 만들어내는 개발자 재단을 만드는 게 꿈’이라고 답했죠.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서비스를 하고 싶었어요.”

-10년 만에 그 꿈을 이루셨네요.(웃음) 언제부터 개발자가 될 생각을 하셨어요?

“중1 때부터 피시통신을 했어요. 게임에 푹 빠져서 중3 때는 부산에 게임동호회를 만들고 시솝(운영자)도 했고요. 게임을 만드는 개발자가 되려고 공고로 진학하겠다고 고집을 부린 적도 있어요.”

-게임에 몰두하는 것 때문에 부모님은 걱정 많으셨겠어요.

“글쎄요. 그때 저희 집 분위기가 좀…. 어머니가 많이 편찮으셨거든요. 지병으로 폐기종을 앓으셔서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는 돌아가실 뻔도 했어요. 폐 한쪽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고 살아나셨는데 길거리에서도 자주 쓰러지시고 겨울만 되면 아프시고. 게다가 형도 어려선 몸이 아파서 학교 공부를 제대로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거든요.”

-형 신경 쓰느라 동생한테까지 관심 둘 여유가 없으셨겠군요.

“네가 알아서 잘해라 하는 입장이셨죠. 고2 때 교회에 나가면서부터 게임을 멀리했는데 안 그랬으면 계속 게임에 빠져 지냈을지 몰라요.”

-독실한 신자였나요?

“초등학교 때부터 어머니 따라 다니긴 했는데 고2 때 문득 ‘신이 있으면 좋겠다. 그럼 사람들한테도, 내게도 큰 위로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때부터 착실한 ‘교회 오빠’가 되었죠. 매주 교회를 가려고 대학도 집과 가까운 포항공대를 택했을 만큼 열심이었어요.”

신발공장을 하던 아버지의 사업은 부침이 심했고 겨우 자리잡을 무렵 공장에 불이 나서 잿더미가 된 적도 있었다. 유난히 우환과 풍파가 많았던 성장기를 거치며, 공부는 곧잘 했지만 가족들의 관심권 밖에서 늘 외롭고 감수성 예민했던 소년은 ‘선한 의지로 이웃을 돌보라’는 기독교적 세계관에 깊이 매료되었다. 로널드 사이더의 <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인>, 슈테판 츠바이크의 <폭력에 대항한 양심>, 김두식 교수가 기고하던 잡지 <복음과 상황>을 읽으며 기독교인의 양심과 평화에 대해 고민했다.

-마음 붙일 곳을 찾았군요.

“사람들이 한 주간의 괴로움을 교회 와서 풀고 가는 게 좋았어요. 내가 교회를 만들면 ‘단잠교회’라고 이름을 지어야지 했어요. 교회에 볕이 쫙 들어오면 사람들이 아침 10시부터 12시까지 목사님이 무슨 얘길 하든 다들 자다 가는 교회!”

-하하, 그런 교회 있음 좋겠네요.

“목사가 되고 싶었던 적도 있어요.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뭔가 해야 할 가치 있는 일이 있다면 먹을 게 없어서 죽는 사람들이 없어지도록 돕는 일이다 생각했거든요. 교회에 빈 공간도 많고 악기도 많고 사람도 많고 자원이 많으니까 할 수 있는 일이 많다고 여겼죠. 스물다섯까지는 엄청 열심히 다녔어요.”

-스물다섯에 무슨 일이 있었어요?

“한국에 세습을 하는 데가 세군데 있다는데 북한과 대기업과 교회. 그 벽을 내가 넘어설 수 없겠다는 걸 깨달았죠. 사람을 선출하는데 부정이 개입해서 다 같이 문제제기를 하기로 했는데 당일이 되니 사람들이 우물쭈물 뒤로 물러나는 거예요. 목사님은 돈 얘기를 막 하고 신도들은 아멘으로 응답하고….”

포항공대 수학과를 다니다가 병역특례로 컴퓨터 일을 했다. 홈페이지도 만들고 간단한 프로그램도 만드는 일이었다. 교회를 그만두니 시간은 남는데 “갈 길을 잃고 목표를 상실한” 청년이 되어 의기소침해 있었더니, 어느 날 교회에서 알던 형이 “민주노동당이라는 데가 있는데 시간 되면 가서 좀 도와주라”고 했다. 부산 서면에 있는 옥탑방에 무작정 찾아가 자원봉사를 시작했다.

권오현 대표가 서울 중구 퇴계로에 있는 사무실 2층의 협업공간에서 노트북을 이용해 업무를 보고 있다.  탁기형 선임기자
권오현 대표가 서울 중구 퇴계로에 있는 사무실 2층의 협업공간에서 노트북을 이용해 업무를 보고 있다. 탁기형 선임기자

전자민주주의를 꿈꾸다

-진보정당에 대해 우호적인 감정을 갖고 있었나 봐요.

“뭘 알고 시작한 게 아니에요. 그냥 ‘세상에 좋은 일 하려는 사람들이 있다니까 좀 도와줘야지’ 생각한 것뿐이죠. 전 그때까지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었어요.”

-스물다섯 될 때까지 5·18을 몰랐다고요? 정말이요?

“네 몰랐어요. 그때 처음 임철우의 소설 <봄날>을 읽고 5·18을 알았어요. 거기서 여름캠프를 하면서 ‘나와 우리’라는 단체를 따라서 베트남 민간인 학살 현장에 가기도 했어요. 베트남 중부의 ‘빈즈엉(빈영)’이라는 마을이었는데 일주일간 머물면서 무덤을 만드는 일을 했죠. 어휴~ 다녀와서 많이 앓았어요. 마음이 너무….”

-충격이 컸나 봐요.

“그 마을 할머니가 제게 되게 잘해주셨거든요. 근데 그 할머니가 알고 보니 한국군한테 아들을 잃은 거예요. 우릴 미워할 만도 하잖아요. 밤에 그 방에 누워 있는데, 30년 전 이렇게 평화로운 밤에 사람들이 죽어나갔고, 그걸 대한민국 사람들 대부분이 잘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무섭고 미안하고 괴로웠어요.”

모르고 지냈던 세상의 상처와 부조리에 눈을 뜨며 “내가 뭘 할 수 있을까?”를 다시 생각했다. 제일 먼저 눈에 잡히는 일은 그가 할 줄 아는 컴퓨터 기술로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는 것이었다. 민주노동당에 전자민주주의를 구현하기 위한 토론장을 만들고 싶었다. 당원들이 다양한 의견을 활발히 개진하고 제안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할 것 같아서. 그의 제안은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권오현은 더 큰 곳에서 경험과 기술을 쌓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때 한창 미디어 실험을 하고 있던 다음이 눈에 들어왔다. 2006년 다음에 입사한 권오현은 아고라 2차 버전의 개발리더가 되었다.

-아고라를 통해서 뭘 구현하고 싶었던 거예요?

“1차 버전이 기존 뉴스 콘텐츠에 대해 사람들이 자기 의견을 달 수 있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면 제가 만들 때는 이용자들이 자유자재로 토론을 벌일 수 있고 온라인 청원도 할 수 있게 하는 데 주력했죠. 정당 안에서 시도하려다 실패한 아이디어는 ‘블로거 뉴스’를 만드는 데 활용됐어요. 기자들만 기사를 쓰는 게 아니고, 블로거들이 생산한 뉴스를 직접 유통할 수 있게 했지요.”

-2008년 광우병 사태 때 사람들의 의견을 모으고 토론을 점화하는 데 아고라가 큰 구실을 했어요.

“그때 다들 정신없었죠. 서버가 계속 터지니까….”

-‘서버가 터진다’고 표현하나요? 접속이 폭주해서 마비되는 거요?

“네. 이런 일에 우리가 참여했다는 데 대해서 개발자로서 희열 같은 것이 있었지요. 운이 좋았다고 봐야죠. 우리가 엄청 잘 만들어서라기보다 마침 그 시점에 우리가 그 일을 할 수 있어서. 그때 열정적으로 토론에 참여했던 분들 덕입니다.”

-당시 “대통령님 하야하십시오”라는 온라인 청원에도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지요.

“청원이라는 게 사실 별거 아니거든요. 사람들이 공감하는 댓글을 남기는 건데, 거기 청원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순간 ‘뻘댓글’이 아니라 ‘서명’이 되는 거지요. 그럼 ‘힘’이 되거든요. 서비스를 만드는 개발자의 역할은 그런 데 있다고 믿어요. 사람들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일.”

-정치적으로는 기업에 부담이 되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래서 내심 미안했죠. 혼자 한 일은 아니었지만 내가 관여한 서비스들이 광고 영업하는 데도 방해가 된다고 하니까. 그때 생각했어요. 이런 공공적 목표를 가진 플랫폼이 독립적으로 있어야 되겠구나.”

그 경험과 깨달음이, 안정된 직장과 고액의 연봉을 버리고 빈주먹으로 2013년 유에프오팩토리를 설립하게 만든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가스비는 그렇게 잘 체크하면서
왜 사회적 이슈에 대한 의견은
정부가 트래킹하지 않을까요?
주민들 답변 받는 거 쉬워요
이건 의지의 문제라고요”

세상의 기본 뒤흔들 기술 많아져
10년 지나면 지금과 같지 않을 것
정치 플랫폼이라는 도구 만들어
인류가 어디로 갈지 결정하는
작업 참여할 개발자들 의외로 많아

권 대표는 인터뷰에서 “정치 플랫폼이라는, 엄청나게 강력한 도구를 만들어서 인류가 어디로 갈 것인지를 결정하는 작업에 참여할 사람들이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왼쪽은 인터뷰어 이진순씨. 탁기형 선임기자
권 대표는 인터뷰에서 “정치 플랫폼이라는, 엄청나게 강력한 도구를 만들어서 인류가 어디로 갈 것인지를 결정하는 작업에 참여할 사람들이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왼쪽은 인터뷰어 이진순씨. 탁기형 선임기자

정치시스템이 샤워기보다 후진적

-인터넷 초기에 개발자들은 단순한 기술자가 아니라 새로운 패러다임을 주장하는 혁신가에 가까웠지요. 자유로운 정보교환, 더 많은 정보에 대한 접근과 공유가 직접민주주의를 부활시킬 수 있다고 믿었잖아요. 그런데 대자본이 정보기술을 사업화하고 이윤 추구를 위한 비즈니스 장으로 만들면서 이런 환상이 무참히 깨졌어요.

“저는 그래도 인터넷의 가능성이 여전히 크다고 믿고 있습니다. 인터넷으로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비용이 엄청 낮아졌잖아요. 마음만 먹으면 인터넷을 활용해서 인생을 훨씬 풍요롭게 할 수 있어요. 예전엔 요리 같은 걸 배우려면 학원에 갔는데 이젠 검색해서 스스로 할 수 있어요. 최근엔 투포환 선수가 유튜브를 보고 배워서 금메달리스트가 되었다는 기사도 읽었어요.(웃음) 옛날에는 어떤 정치적 행동을 하려면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을 만나러 서울에 왔어야 되잖아요. 지금은 서울에 오지 않고도 사람을 만날 수 있어요. 이게 다 인터넷을 통해 가능해진 일이죠.”

-그렇지만 인터넷 초기에 꿈꾸던 전자민주주의의 이상은 아직도 요원해요.

“전 두가지가 해결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하나는 접근권이에요. 더 많은 사람이 망에 접근해서 더 많은 정보를 공유할 수 있어야 해요. 지금 통신비 비중이 높아서 20대들은 통신비 때문에 신용불량자가 되는 경우가 속출하고 있어요. 저는 통신권이 국민의 기본권으로 인정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내는 세금으로 통신비를 충당하면 안 되나요? 페이스북이 네팔에 풍선을 이용해서 전국에 무료 인터넷을 뿌린다고 하는데, 어떤 의도로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기술적으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거든요.”

-두가지가 해결되어야 한다고 하셨는데 두번째는 뭡니까?

“전자적인 시스템으로 사람들이 의견을 내고 투표를 할 수 있게 하는 시스템이죠. 제가 서울에 사는데 가스를 쓰면 한달에 얼마나 쓰는지 트래킹을 하잖아요. 가스 소비량은 매달 측정하면서 왜 사회적 이슈에 대한 사람들 의견은 정부가 트래킹하지 않을까요? 세월호 문제만 하더라도, 내 지역구 의원이 저 법안에 찬성했으면 좋겠다, 반대했으면 좋겠다, 주민들이 답변하도록 할 수 있잖아요. 이게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요? 가스비는 그렇게 잘 체크하면서 왜 이런 건 안 할까요? 기술적으론 이보다 훨씬 복잡한 트래킹 시스템이 이미 사회에 다 깔려 있어요. 이건 의지의 문제예요.”

-정부가 맘만 먹으면 할 수 있다고요?

“예. 우리가 샤워를 하다가 물이 뜨거우면 찬물을 올리고 너무 차가우면 더운물을 올리잖아요. 근데 우리는 왜 4년에 한번씩만 찬물, 더운물을 바꿀 수가 있냐고요? 뜨거운 물 틀면 너무 뜨거워졌다, 찬물 틀면 너무 차가워지는데.(웃음)”

-그때그때 주민의 의견을 사안별로 물어서 지역구 국회의원이나 자치단체에 전달할 수 있게 하잔 말씀이군요.

“지금 우리 정치시스템이 샤워기보다 못한 거잖아요. 기술적으론 충분히 가능하거든요. 지금의 정치시스템을 바꾸려고 마음먹으면 할 수 있는 일이지요.”

-온라인을 통한 토론이 언젠가부터 극단화된 진영논리, 욕설과 혐오가 섞인 댓글전쟁의 쓰레기장으로 변했어요. 합리적인 토론과 의사결정을 끌어낼 수 있을까요?

“인터넷을 통해서 ‘우리 편’을 만들려는 사람들은 많은데 ‘어떻게 하면 좀더 합리적으로 싸울 수 있을까’ 시스템을 고민하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개발자들도 대개 이윤을 추구하는 회사에 소속되어 있다 보니, 돈을 만들려는 기업이나 정치적 지지자들을 모으려는 정당 편에 서서 일을 하는 경우가 태반이고요. 그런 권력이나 자본으로부터 독립된 개발자들이 공익적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에 참여해야 해요.”

그들의 도전은 시작되었다

-유에프오팩토리는 어떤 일을 하려고 합니까?

“단순히 찬성·반대로 의견을 묻는 게 아니라 어중간한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자기 생각을 표현하고 다른 집단의 의견에서 뭔가 배울 수 있게 하는 형태가 필요합니다. 토론의 결과만이 아니라 토론의 과정을 보여주는 시스템도 필요하고요. 그런 토론 플랫폼을 만들려고 기획하고 있어요.”

-재원은 어떻게 조달하려고요?

“저는 그걸 사회적 경제 영역에서 찾으려고 한 거죠. 우리가 사회적 기업들을 도와서 그들이 몇년 뒤 제 궤도에 오르면 우리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사회적 경제와 저희 같은 공익적 개발자들이 선순환 구조를 이루기를 바랍니다.”

-요즘엔 사람들이 아기들 돌상에 마우스를 놓잖아요. 개발자가 돼서 빌 게이츠나 마크 저커버그처럼 대박을 터뜨리길 소망하면서. 권오현씨 같은 일을 하고자 하는 개발자들이 더 있을까요?

“이런 일 하고 싶어 하는 개발자들은 의외로 많아요. 그들을 지원하고 키워주는 구조가 없어서 그렇지. 세상이 10년만 지나도 지금과 같지 않을 거거든요. 세상의 기본을 뒤흔드는 기술이 많아져서. 어떤 기술로 누구를 도울 것인가는 개발자가 선택하겠지만, 정치 플랫폼이라는 엄청나게 강력한 도구를 만들어서 인류가 어디로 갈 건지를 결정하는 작업에 참여할 사람들이 전 있다고 믿어요.”

수줍은 표정으로 조곤조곤 이야기하던 권오현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갈 길은 멀지만 이미 그들의 도전은 시작되었다.

녹취 박성희(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이진순 언론학 박사
이진순 언론학 박사
▶ 이진순 언론학 박사. 전직 교수. 살림하고 애 키우는 오십대 아줌마이자 공부하고 글 쓰는 열혈시민이다. 서울대 사회학과와 럿거스대 커뮤니케이션스쿨을 졸업했다. 미국 올드도미니언대학 조교수로 인터넷 기반의 시민운동을 강의했고 그 전에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등 다큐멘터리 작가로 다양한 인물을 취재했다. 세상의 새 지평을 여는 ‘열린 사람들과의 어울림’(열림)을 격주로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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