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8월 전남 구례군 마산면 일대 섬진강이 범람해 주택가와 농경지가 물에 잠겼다. 구례군청 제공
“20년 넘게 살아온 곳이지만 이제는 떠나고 싶습니다. 오막살이라도 좋으니 그저 수해 안전지대에서 살고싶다는 마음뿐이에요.”
지난 24일 전남 구례군 양정마을회관 앞에서 만난 한중희(79)씨는 22년 간 살아온 마을을 그만 떠나고 싶다고 말했다. 이 지역엔 지난해 8월8일 ‘500년에 한 번 올 만한’ 폭우가 쏟아졌다. 1년 강우량(1200㎜)의 40%가 넘는 비(500㎜)가 단 이틀 만에 온 것이다. 수위가 급격히 상승하자 섬진강댐은 평소보다 10배 넘는 물을 황급히 쏟아내기 시작했다. 강물은 구례 저지대 주택과 농경지를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한씨가 사는 광평마을도 물에 잠겼다. 그의 보금자리였던 25평 주택은 물에 잠겼다. 그는 아내와 함께 수재민에게 제공된 7평짜리 임시주택에 1년 넘게 머물고 있다. 고구마, 고사리, 참깨 등이 자라던 600평 밭도 침수됐다. 올해에도 이렇다 할 수확이 없다. 전에 없던 불안감이 생겼다. “비만 오면 조마조마해요. 차가 물에 잠길까봐 윗마을에 주차해 놓을 때도 있고.” 그는 마을에 다시 수해가 터져 이 고통을 또 겪을까 두렵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 5월 기후위기가 헌법이 보장한 국민 기본권을 침해하는지 알아보기 위한 연구용역을 발주해 관련 조사를 진행 중이다. 지난해 12월 “기후위기가 건강권·생명권·자기결정권 등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을 침해한다”는 인권·환경단체 진정을 받은 데 따른 것이다.
<한겨레>는 국가인권위 연구용역을 맡고 있는 사단법인 두루의 지현영·김성우 변호사와 함께 24일 구례를 찾아 한씨 등 수해 피해 주민 25명을 만났다. 지난 1년 동안 여러 언론과 인터뷰를 한 주민들은 여전히 할 말이 많아 보였다. 이상기후로 빈번해진 재난은 재난 당시의 끔찍했던 기억에만 머물지 않았다. 미래를 살아갈 희망과 용기도 빼앗아가 버렸다.
물과 함께 떠내려간 보금자리와 일터
지난 24일 전남 구례군 양정마을에 자리한 빈 집 터. 구례/김민제 기자
전남 구례군 오일시장에서 생활용품 할인매장을 운영하던 이두례(59)씨가 지난해 8월8일 수해로 침수된 가게를 지난 24일 돌아보고 있다. 구례/김민제 기자
양정마을에는 직사각형 모양 집터만 휑하게 남은 곳이 여기저기 있다. 지난해 8월8일 아침 6시30분 섬진강댐 초당 방류량이 800∼1000t가량으로 급증하면서 마을 전체가 물에 잠겼다. 대부분 주택 1층 천장까지 물이 찼는데, 집이 통째로 주저앉은 곳도 있다. 이처럼 피해가 큰 주택은 허물어져 터만 남았다.
마을 주민 ㄱ씨는 수해가 닥치기 전 새 집에서 새 출발을 앞두고 있었다. ㄱ씨는 남편, 고등학생 딸과 20년 간 살던 20평 조립식 주택을 지난해 8월 초 리모델링했다. ㄱ씨는 “아이가 크면 방을 만들어주려고 6000만원을 들여 처음 리모델링을 했다. 아이 방, 옷방도 만들고 겉면에 벽돌도 쌓았다. 딱 세 밤 자고 물이 들어왔다”고 했다. ㄱ씨 가족이 정성껏 쌓은 벽돌은 물살에 허물어졌고 집을 떠받치던 기둥과 문짝은 뒤틀려 다시 세울 수 없게 됐다.
지난 24일 찾은 구례군 공설운동장에 설치된 7평 남짓한 컨테이너 임시주택. 구례/김민제 기자
구례군에서 수재민들에게 제공한 7평 남짓한 컨테이너 임시주택 내부. ㄴ씨는 이곳에 지난해 9월30일께 입주해 약 10개월 간 아내와 둘이 생활하고 있다. 구례/김민제 기자
구례군은 ㄱ씨처럼 집을 잃은 수재민에게 7평 컨테이너 임시주택 50채를 지원했다. 이날 주민들 안내로 찾은 구례 공설운동장에는 임시주택 18채가 모여 있었다. 거실과 미닫이문으로 구분된 방과 화장실 하나가 한눈에 들어올 만큼 작았다. 벽걸이 에어컨과 바닥 난방 설비는 갖춰져 있었으나 얇은 컨테이너 외벽은 웃풍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성인 혼자 살기도 좁은 공간인데 서너 식구가 함께 지내기도 한다. 아내와 함께 생활 중인 ㄴ씨는 “공간이 적어 짐을 다른 데 맡겨야 한다. 집이라기 보단 어딘가 붕 떠 있는 느낌”이라고 했다.
구례 오일시장 상인 이두례(59)씨의 500평짜리 생활용품 할인매장은 수해 때 1층 전체가 토사가 뒤섞인 물로 가득 찼다. 1년이 지난 지금도 매장 곳곳에 수해 흔적이 남아있었다. 입구 유리문 위쪽으로 흙탕물이 쓸고 간 자국이 보였다. 지하 창고에는 수해 때 물에 잠긴 벌꿀통, 고로쇠물통 등 각종 플라스틱 용기 수백개가 쌓여 있었다. 이씨 부부에게는 흙 묻은 생활용품과 가게 복구를 위해 대출 받은 12억원 가량의 빚이 남았다. 이씨가 물건을 닦으며 말했다. “아무리 지워도 흙 묻은 흔적이 지워지지 않아요.”
구례 오일시장 상인 이씨의 생활용품 할인매장 인근 창고에 쌓인 수해 피해 물품들. 구례/김민제 기자
양정마을 인근 광평마을 주민 박정래(50)씨의 600평 비닐하우스는 수해로 완파됐다. 박씨는 “호박을 심어놨는데 하우스가 호떡처럼 납작해져서 하나도 수확을 못 했다. 수해 때 하우스 연료로 쓰던 벙커에이(A) 기름이 새서 땅에 흐른 것 같다. 지난 3월까지 밭을 어떻게든 다시 일구려고 했는데 복원이 안 됐다”고 말했다.
양정마을 주민 이복순(66)씨는 수해로 70마리 소 중 60마리를 잃었다. 40마리는 물살에 쓸려갔고 다친 20마리는 도축장에 보냈다. 이씨는 “평생 모은 재산 3억∼4억원이 떠내려간 것과 마찬가지인데, 남은 노후를 어떻게 보내야 하냐”고 토로했다.
섬진강수해참사피해자 구례군비상대책위원회는
지난 2일 환경부 중앙환경분쟁조정위원회에 배상 신청을 했다. 주택·상가·농지·가축 피해 등 1042억원이다.
기후재난이 남긴 트라우마 “비오는 날엔 잠 못 이뤄”
주민들은 미래를 준비하고자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다. 모든 것을 휩쓴 맨땅에서 새로 시작하려니 두렵고 막막한 데다 비만 내리면 불안하고 초조해진다. 재난 트라우마가 깊게 남은 것이다.
조사단이 구례를 찾은 날은 제12호 태풍 ‘오마이스’로 전국에 많은 비가 내렸다. 주민들은 “어젯밤 빗소리에 잠을 통 못 잤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불안하다”고 호소했다. 직장을 다니는 ㄱ씨는 “비가 내리면 마을이 잘 있나 봐야겠다는 생각부터 든다. 근무 중에 마을을 둘러보겠다며 나갔다 온 적도 있다”고 말했다.
지난 24일 구례 양정마을 인근에 걸려있던 소 위령제 알림 현수막. 김성우 사단법인 두루 변호사 제공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기억때문에 여전히 고통스러운 이들도 있다. 강물이 범람한 지난해 8월8일 거동이 불편한 아내와 집 2층으로 피신했던 광평마을 주민 한씨는 수해 이후 버릇 하나가 생겼다. 삽시간에 물이 1층 처마까지 들어차 20∼30분 간 오도가도 못했던 한씨는 ‘이대로 죽겠다’ 싶을 때 구조보트를 만나 겨우 탈출했다. 그날 이후 한씨는 수시로 숨을 몰아쉰다고 했다. 집 근처 섬진강을 더는 보고 싶지 않다. 한씨는 “하루에도 열댓번씩 ‘헥’하는 한숨이 난다. 그때 많이 놀란 건지 서러움이 복받친 건지 이유는 모르겠다. 물을 쳐다보기도 싫어서 섬진강 다리를 건너지 않는 길을 찾아다닌다”고 말했다.
“기후위기, 인권 문제로 접근해야”…인권위 정책권고 나올까
조사단은 지난 5월부터 다양한 기후위기 민감계층을 만나왔다. 고수온으로 피해를 입은 어민, 폭염·한파에도 야외에서 일하는 건설노동자·가스검침원·택배노동자, 이상기후로 농작물 피해를 입는 농민, 폐기물 처리업 종사자 등을 상대로 집단 심층면접(FGI)과 개별 인터뷰를 진행했다. 지현영 변호사는 “증언을 들어보면, 기후변화는 단순히 한 번 발생한 피해를 복구하면 끝날 문제가 아니다”라고 했다. “이들은 트라우마, 우울감 같은 심적 타격을 호소하고 앞으로 생업을 지속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고 했다.
국가인권위는 오는 10월께 나올 조사 결과를 받아본 뒤 정책 권고 여부를 정한다. 인권위 관계자는 <한겨레>에 “필요한 경우 인권위 차원의 정책 권고나 의견표명을 할 수도 있다”고 했다. 인권·환경단체에서는 ‘기후위기=인권위기’라는 판단이 나오길 기대하고 있다. 박수홍 녹색연합 기후행동팀장은 “인권위 차원 정책권고가 나오면 탄소중립이나 기후변화와 관련한 법과 제도를 구축할 때, 국민 기본권 차원에서 보다 입체적인 고려가 이뤄질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구례/김민제 기자
summ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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