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울진 신한울 원전 전경. 한국수력원자력 제공
오는 21일부터 원자력발전소에서 발생한 사고에 대한 원전 사업자의 손해배상 책임 한도가 3배 올라갑니다. 국제통화기금 특별인출권(SDR) 3억 계산단위로 돼 있는 기존 책임 한도를 9억 계산단위로 개정한 원자력손해배상법이 이날 시행됩니다. 원전 사고 때 인근 지역에서 입을 손해에 대한 사업자의 배상책임 한도가 상향 조정되기는 2002년 이후 처음입니다. “(기존 한도로는) 대규모 사고 시 피해자가 입은 손해를 온전히 배상하기에는 매우 부족”하다는 것이 국회가 법을 개정해 한도를 상향 조정한 이유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한도가 상향 조정돼도 원전 사고에 따른 피해를 우려하는 주민들 입장에서 실제로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배상 책임을 더 부담해야 하는 한국수력원자력도 마찬가지입니다. 20년이나 묶여 있던 배상 책임 한도가 한꺼번에 3배나 높아지는 것은 큰 변화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만약의 경우, 배상을 받아야 할 쪽이나 배상을 해야 할 쪽 입장에서 달라지는 것이 없는 이유는 뭘까요? 그 이유를 살펴보면 원자력업계가 드러내기 꺼리는 원전의 불편한 진실을 일부 엿볼 수 있습니다.
‘후쿠시마’ 복구·배상비 최대 780조원…고리는 무려 2492조원
우선 원전 사고로 발생할 수 있는 피해 규모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듬해인 2012년 일본의 ‘원자력 손해배상 및 폐로지원기구’가 추산한 후쿠시마 사고 복구와 배상 비용은 5조엔(53조원)이었습니다. 이 추산치는 2년 뒤인 2014년에 11조엔으로, 2017년에는 25조엔(267조원)으로 늘었습니다. 같은해 일본경제연구센터(JCER)는 73조엔(780조원)으로 추산하기도 했습니다. 제염 폐기물의 최종 처분비 등 폐로지원기구가 빠뜨린 비용들을 포함시키고 원자로 해체·철거비 등을 현실화한 결과입니다.
만약 고리 원전에서 후쿠시마 원전 사고와 같은 규모의 사고가 발생하면 어떻게 될까요? 한국전력은 이 경우 피해액이 1735조원(일본 폐로지원기구 기준)에서 2492조원(일본경제연구센터 기준)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습니다. 한전이 2018년 낸 ‘균등화 발전원가 해외사례 조사 및 시사점 분석’ 보고서를 보면, 후쿠시마에서 104조원 정도인 손해배상액이 고리에서는 무려 1668조원까지 올라가는 것으로 나옵니다. 고리원전 반경 20~30㎞ 안 방사선비상계획구역 안에 거주하는 인구가 382만명으로 후쿠시마(53만명)보다 7배 이상 많은데다 항만과 공단 등 산업시설이 집중돼 있기 때문이죠.
상향 조정된 한수원의 손해배상 책임 한도액 9억 에스디아르(SDR)는 우리 돈 약 1조5천억원에 불과합니다. 최악의 경우에 나올 수 있는 손해배상액의 0.1%도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손해배상 책임 한도를 설정한 것은 뒤집어 보면, 한도 이상의 손해배상 책임은 면제해준다는 뜻입니다. 원전 사업자에게 그 이상의 손해배상은 국가가 책임질테니 걱정말고 원전을 돌리라는 의미입니다.
한국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 등 원전을 가동하는 대부분의 국가가 마찬가지입니다. 일본과 스위스 등 책임 한도를 설정하지 않는 나라도 사업자가 원자력책임보험 가입 등을 통해 자력으로 확보해야 하는 배상조치액 규모는 정해 놓고 있습니다. 에너지경제연구원이 조사한 자료를 보면 배상조치액은 제일 많은 일본도 1200억엔(1조2800억원)에 불과합니다.
국내 원전에 단지별로 적용되는 배상조치액은 3억 SDR(5000억원)입니다. 2014년에 정해진 이 배상조치액은 개정 법 시행에도 그대로 갑니다. 원자력안전위원회 관계자는 “배상 한도와 배상조치액이 꼭 일치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며 바로 조정되지는 않을 것임을 내비쳤습니다. 이번에 손해배상 책임 한도가 상향 조정돼도 한수원 쪽에서 달라질 것이 없는 이유입니다. 배상조치액이 따라서 올라가지 않는 한 원자력책임보험료 지출액은 크게 바뀌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수원 가입 책임보험으론 후쿠시마급 피해액 0.03%만 보장
한수원이 원자력책임보험 가입으로 확보하는 배상조치액 5000억원은 한국전력이 고리에서 후쿠시마 수준의 원전사고가 발생하는 것을 상정해 추산한 손해배상 비용 1668조원의 0.03%에 불과합니다. 한수원의 원전 운영이 국가의 보증 아래 사실상 무보험 운전을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이유입니다.
국내 원전단지는 모두 4곳이지만 원전 수가 6개를 초과하는 월성 단지는 보험계약상 2개 단지로 계산됩니다. 이에 따라 한수원은 코리안리 등 12개 손해보험사로 구성된 한국원자력보험 풀과 총 15억 SDR(약 2조5천억원) 규모의 책임보험 계약을 맺고 있습니다. 한수원이 이 보험 풀에 내는 책임보험료의 구체적 액수는 공개되지 않고 있습니다. 한수원은 <한겨레>에 “보험료 협상전략상 정확한 수치 공개는 불가하다”며 ‘연간 100억~200억원’이라는 범위만 밝혔습니다. 원전 단지별 배상조치액 3억 SDR에 20억~40억원 꼴이란 얘기입니다.
지난해 한국전력의 원자력 전기 정산단가는 ㎾h당 평균 60.96원이었습니다. 한수원은 한전에 15만6717기가와트시(GWh)의 전기를 공급하고 9조5530억원을 받았습니다. 연 100억~200억원의 책임 보험료는 한수원에 아무런 부담이 되지 않을 수준입니다. 하지만 만약 한수원이 원전사고로 발생하는 모든 손해를 자력으로 배상해야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4개 단지 중대사고 때 피해액 최대 5684조원 추산
한전의 2018년 보고서를 보면, 국내 4개 원전단지에서 후쿠시마 원전사고와 같은 중대사고가 발생했다고 가정했을 때의 손해액은 최대 5684조원(일본 경제연구센터 기준)으로 추산돼 있습니다. 여기에 현재 배상조치액에 적용된 보험요율이 그대로 적용된다고 가정하면 한수원이 부담해야 할 보험료는 22.7조~45.5조원이 됩니다. 지난해 전기 판매액의 2~4배 규모입니다. 국가와 지불하는 보조금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비용을 모두 한수원이 치러야 한다면 원자력 전기 값은 그만큼 비싸져야 합니다.
이 대목에서 원자력계에서 말하기를 꺼리는 원전의 한계가 잘 드러납니다. 국가와 국민이 지불하는 숨은 보조금 없이 원전은 지어지기도 운영되기도 어려울 것이란 사실입니다.
김정수 선임기자
jsk21@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