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돈룩업>(Don’t Look Up). 넷플릭스 제공
돈룩업(Don’t Look Up)은 모든 인간을 쓸어버릴 수 있는 혜성 충돌에 관한 영화다. 이 영화 제목은 대통령이 챙이 있는 모자를 쓴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지구를 향해 내달려오고 있는 혜성을 올려다보지 말고 땅을 내려다보게 하기 위해 외치는 선동 구호이다. 이는 맹수에게 쫓기는 타조가 머리만 모래에 처박고서 이제 안전해졌다고 여기는 것과 마찬가지다.
영화의 핵심은 기후위기로 인해 인류가 직면한 위험에 대한 은유이다. 천문학자(기후과학자)는 혜성 충돌(기후변화)이 예측되어서 대통령과 언론에 그 위험을 알리려고 한다. 하지만, 위험에 대해 책임이 있는 사람들은 과학적으로 명백한 위험을ᅠ고의로 회피하여 잘못된 길로 이끌어 간다. 기후위기 역시 그러하다.
위험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 정도가 위험하고 안전한가를 결정하는 것은 순전히 과학적인 질문은 아니다. 이는 위험에 대한 사회적 합의와 정치적인 판단을 포함한다. 대통령은 과학자에게 혜성이 지구와 충돌할 수 있다는 설명을 들은 뒤 “그래서 이것이 얼마나 확실한가?”라고 묻는다. 과학자가 그 확률이 99.78%라는 데도 불확실성이 남아 있으니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인간에 의한 기후위기가 파국으로 몰고 갈 수 있는 과학적 확률이 100%에 가깝다고 해도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위험에 대한 일상 언어는 흑백을 원한다. 당장 위험한지 아닌지를 알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학에서 절대는 없다. 그 어떤 과학적 성취도 늘 동료 과학자들의 검증과 반증에 놓여 있어야 한다. 이는 인간 이성이 완벽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과학의 강점은 100% 확실하지 않다는 데 있다. 증거가 한 방향을 가리킬 때조차도 과학자들은 계속 더 탐구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과학을 통해 파악한 위험 전망은 100% 확실해서 대응해야 하는 게 아니다. 과학은 인류가 찾아낸 물질세계를 이해하는 가장 합리적 체계이므로 그 결과에 따라 대응해야 한다.
혜성 충돌을 막을 수 있는 시간이 6개월 남아 있는 것처럼, 기후위기를 피하려면 2050년까지 탄소중립에 도달하는 급격한 전환이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 대부분은 멀리 또는 미래에 있을 위험을 심각하게 느끼지 못한다. 우리는 나중에 이 문제를 다룰 수 있다고 여기고, 우리에게 가까이 있거나 또는 바로 일어날 문제에 더욱 관심을 갖는다. 그러므로 정치인은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기존 체계를 급변적으로 전환해야 하는 부담을 지려 하지 않는다.
영화에서 정부는 혜성을 파괴하기 위해 미사일을 발사하지만, 곧 그 계획은 철회된다. 대신 대통령은 혜성에서 희귀 광석을 채굴할 우주 드론을 보내려는 민간업자가 제시한 대안을 받아들인다. 대통령은 자신을 지원하는 거대 회사가 제안한,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방법을 독단적으로 채택한 것이다. 위험이 이윤으로 전환되어 정작 위험의 본질은 흐려진다. 과학 전문성보다는 특정 이익집단의 이해득실에 따른 정치적 선택이 파국으로 몰고 간다.
기후위기로부터 인류를 구하는 것보다 경제 성장이 떨어지는 것이 더 걱정인 세상은 구할 방법이 없다. 기후위기를 받아들이는 사람조차, 성장을 추구하는 경제 체계가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현재 화석연료 산업을 그대로 두어도 새로운 기술이 나타나서 기후위기를 해결할 거라고 기대한다.
기후를 조절하는 지구공학(geoengineering)은 화석연료를 태우는 세상을 지속하기 위해 개발되고 있다. 이는 경제와 기후 어느 쪽의 희생 없이도 기술을 통해 지구를 지켜낼 수 있기에 매혹적이다. 하지만 아직 실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안이 개발되지 않았고 그 개발 완료 시점이 언제인지도 모른다. 여기에 우리 미래를 맡길 수는 없다.
버트런드 러셀은 “오늘날 문제는 우리가 생존을 위하여 인류를 어떻게 설득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과학자는 자신의 위험 예측을 세상에 알리려 한다. 그런데 ‘알림’이 곧 ‘설득’이 되는 건 아니다. 알랑드 보통은 그의 책 <뉴스의 시대>에 “북극의 빙산이 녹는 것을 어떻게 하면 톱스타의 각선미만큼이나 흥미롭게 만들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라고 했지만 이게 말처럼 쉬운 일인가? 과학자는 위험을 예측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지만, 이를 설득할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다. 카산드라의 저주에 걸려 있는 것이다. 카산드라는 트로이에 목마를 들이면 위험하다고 예언했지만, 시민을 설득할 수 없어 결국 트로이가 멸망했다.
과학자는 보고 아는 대로 알리지만, 세상은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 받아들인다. 사람들은 새로운 사실이 자신의 신념과 모순될 때 불편해한다. 사실에 직면하더라도 신념을 바꾸는 것이 몹시 어렵다. 그래서 다양한 방식으로 사실을 무시하거나 부인한다. 이렇게 사람들이 자신의 편향에 의해 오류를 저지르는 방식을 사회심리학자 리어 페스팅어는 ‘인지부조화’라고 했다.
돈룩업에서 책임이 있는 사람들은 혜성 충돌을 위험으로 보지 않고 저마다 자기 이익에 따라 다룬다. 대통령은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려고, 민간업자는 희귀광물을 획득하려고, 언론인은 시청률을 올리려고 한다. 위험은 예측 가능했지만, 서로 다양한 인지부조화들은 그 위험을 막는 조치를 날려버린다.
이제 인류가 역사를 진보시킨다는 근대적 신념은 더는 유지될 수 없다. 기후위기로 변덕스러운 힘들이 작용하는 위험 공간으로 지구가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구는 인류 진보를 위한 착취 대상이 아니라 인류 문명을 붕괴시킬 수 있는 주체가 되려 한다.
이 상황에서 지구는 물론 우리 사회를 치유할 수 있는 계기가 있다면 그것은 기후위기이다. 기후위기의 미래가 ‘지금 그리고 여기’의 우리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현재의 이익이 아니라 미래 위험에서 우리가 깨닫지 못했던 가능성을 찾아내고 그에 따라 우리가 함께 움직여야 하는 데서 희망을 두어야 한다.
희망은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만드는 것이다. 누군가는 혼자가 아니라 함께 연대한다. 우리에게는 파국적 위험 그 자체가 아니라 홀로 그 위험에 직면하는 것이 공포다. 희망은 일이 잘될 것이라는 전망이 아니다. 그것은 함께 하는 느낌이다.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은 공공에 헌신하는 연대를 모색한다. 자기 자신이 그 공동체의 일원이라고 느끼면, 우리는 그 어떤 역경도 긍정적으로 맞이할 수 있다. 성공을 성취해서가 아니라 파멸에서도 화해하고 함께 식사하고 기도할 수 있기에 인간은 아름답다고 돈룩업은 이야기한다.
다행스럽게도 기후위기를 막으려고 애쓰는 사람은 혼자가 아니다. 많은 사람이 ‘기후위기 비상행동’ 연대에 참여하고 있다. 살아남는 게 희망이 아니라 함께 하는 게 희망이다. 사랑할 것이 있는 한 희망할 것이 있다.
경희사이버대학 기후변화 특임교수
cch0704@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