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를 극복한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분명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일 것이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으로 널리 알려진 신영복 전 성공회대 석좌교수는 “중심부는 변방의 자유로움과 창조성이 없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반드시 무너지게 되어 있다”라고 했다. 기후위기로 인한 전환시대에 새 세상에 대한 이야기들이 변방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김병권 전 정의정책연구소장의 <기후를 위한 경제학>이 바로 그렇다. 이 책은 무한 성장이 아니라 지구의 물리적 한계 안에서만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생태경제학적 관점을 다룬다.
경제과정만 보면 마치 생산으로 무에서 유가 창조된 후 소비로 사라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물리학적 관점에서 경제를 보면, ‘생산’으로 창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소비’로 사라지는 것 역시 아무것도 없다. 자본(시설)과 기술은 자연에서 얻는 물질을 변환시킬 뿐이다. 물질은 기술이나 자본으로 대체할 수 없다. 물론 기술 혁신으로 폐기물을 줄이고 재활용 비율을 높일 수는 있지만, 오직 자본과 기술만으로 무언가를 생산해낼 수는 없다. 우리는 1kg의 밀가루와 식재료를 가지고 2kg의 피자를 만들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기후위기는 ‘필요의 결핍’ 아닌 ‘욕망의 과잉’ 탓
성장은 물질의 사용 증가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현재 전 세계 연평균 경제 성장률은 약 3%이다. 2000년을 시작으로 매년 3%씩 성장한다면 경제 규모가 2100년 20배, 2200년에 370배, 2300년에 7000배에 이르게 된다. 문제는 경제성장을 하는데 인간의 두뇌와 근육의 힘만으로 될 수 없다는 데 있다. 성장하는 그만큼 더 물질을 지구로부터 빼 써야 하고 그만큼 더 온실가스와 오염먼지를 뿜어내고 쓰레기를 내다 버려야 한다. 물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무한 성장은 결국 불가능한 망상일 뿐이다.
화폐경제는 복리로 늘어나는 투자 수익에 따라서 수학적으로 무한 성장할 수 있지만, 실물경제는 물리학의 지배를 받아 성장에 한계가 있다. 성장은 공짜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지구는 인간의 이기적이고 파괴적인 수탈을 견딜 만큼 크지 않다. 지구의 삼림, 바다, 경작지, 담수, 자원과 에너지에는 모두 한계가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만든 이 세상은 시작부터 끝까지 자연에 의존하면서도 그 모태인 자연을 파괴하고 고갈시킨다.
인간의 무한한 욕망이 지구의 유한함을 넘어서면, 지구는 인류 진보를 위한 착취 대상이 아니라 인류 문명을 붕괴시킬 수 있는 주체로 바뀐다. 지구는 우리가 숨 쉬는 공기, 마시는 물, 먹는 식량과 삶의 거주지를 공격한다. 지구 스스로 인류 생존의 기반을 무너뜨린다. 성장이 빠를수록 한계에 부딪히는 시간도 그만큼 빠르고 그에 따른 부작용도 그만큼 크고 위험하다.
글로벌 생태발자국 네트워크(GFN)는 2018년 기준으로 전 세계 생산과 소비를 유지하려면 지구가 1.7개 필요하다고 발표했다. 지금 우리는 미래 세대가 쓸 것까지 가져와서 쓰고 있다. 우리 욕망이 자연 흐름을 넘어섰고 이는 더 지속할 수 없다. 우리가 농부라면 다음 봄에 밭에 뿌릴 씨앗을 먹고 있는 꼴이고, 은행가라면 이자가 아닌 원금으로 살아가고 있는 꼴이다. 지금 이대로라면 인류가 생존할 수 있는 지구 여건이 우리 욕망보다 먼저 고갈될 것이다. 머지않아 파산과 더불어 공멸할지도 모른다.
특히,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미국과 호주 다음 순위로 자원을 과도하게 사용 중이다. 전 세계인이 한국인처럼 살면 지구가 3.5개 필요하다. 또한, 한국인은 우리 국토 기준으로 1인당 평균 생태용량의 8.5배가 넘는 생태 발자국을 남기고 있다. 이 생태 발자국은 우리나라의 생존 여건이 세계 최고 수준으로 취약함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자원, 에너지와 식량의 공급이 부족하거나 그 가격이 폭등하면 우리나라가 가장 어려운 상황에 부닥치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지구, 인간의 파괴적 수탈 견딜 만큼 크지 않아
주류경제학은 시장기능과 기술혁신을 통해 계속 성장할 수 있다고 여긴다. 생산과정에 투입되는 자원은 그 희소성 여부에 따라 시장에서 적절한 가격이 매겨진다. 고갈 위험이 높아진 자원은 가격이 올라 수요가 줄어들게 된다. 그리고 가격이 오르면 더 적은 자원으로 더 많이 생산을 할 수 있는 기술혁신이 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영국의 경제학자 제번스는 기술혁신이 기대와 달리 오히려 더 많은 소비로 귀결되어 자원 고갈을 재촉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기술혁신에 의한 효율성 향상으로 비용이 하락할 것이고 비용 하락은 수요를 촉발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술혁신이 자원 소비를 줄이지 못한다. 지난 30년 동안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은 무려 308% 증가했고 탄소 배출은 소비 기반으로 볼 때 117% 증가했다.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생산단위 당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줄어들고 있지만 총배출량은 증가했다. 가속화되고 있는 기후위기를 보건대 시장 기능과 기술혁신으로는 기후위기를 막을 수 없다.
과거에는 성장 이익이 투자 비용을 초과했으나 이제는 그 반대가 되려 한다. 영양상태가 부족한 경우에는 잘 먹을수록 몸이 더 좋아지지만, 영양상태가 적정 수준을 넘어가면 잘 먹을수록 몸이 더 나빠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성장은 어린이에게 필요하지만, 그 이후엔 균형된 건강이 중요하다. 현재 영양 부족보다는 비만으로 더 많은 사람이 죽는다. 아이가 성장한 후에는 건강한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생명이 자라고 성숙하는 방식이다. 계속 성장한다면, 세포 스스로 계속 복제되는 암처럼 죽음에 이르게 된다.
기후위기도 ‘필요의 결핍’이 아니라 ‘욕망의 과잉’으로 일어난다. 이미 전 세계 80억 명에게 필요한 식량과 생필품을 과잉 생산하고 있다. 버려지는 음식물과 쌓이는 쓰레기 더미를 보면서도 세상의 온갖 문제가 어떻게 결핍 때문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 넘치도록 생산하는 이 세상에서 필요한 것이 결핍되었다면, 우리 공동체가 서로 돌보고 아끼고 나누는 일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자연환경은 인간에게 단지 경제성장을 위한 재료가 아니라 인류가 살아갈 터전이다. 과거 바다에서 고기를 많이 못 잡았다면 좋은 배와 그물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바다에서 어획고가 줄어드는 것은 바다에 고기가 줄기 때문이다. ‘생산’은 자연자원의 한계 안에서만 이루어진다. 이 자연자원은 스스로 ‘생성’되는 것이다. 인류가 사용하는 자원의 규모는 시장 소비자의 지불 의사가 아니라 지구의 생성 역량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 화석연료나 광물과 같은 재생할 수 없는 자원은 최대한 아껴 그 수요를 줄여야 하고, 숲과 바다와 같은 재생할 수 있는 자원은 그 순환 능력을 키우고 재생에너지로 전환해야 한다.
지구 환경은 경제 성장을 위하여 자원과 에너지를 공급해주는 ‘부차적인’ 위치가 아니라 그 위험을 넘어서면 안 되는 ‘최우선적인’ 위치에 놓여야 한다. 지구의 한계가 인간이 만드는 세상의 한계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한계는 우리가 목적을 전제로 할 때 드러난다. 중력은 우리가 낮은 곳에서 떨어질 때 아무 문제가 없지만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려 한다면 위험하게 작용한다. 위험하다고 중력가속도를 줄이자고 타협할 수는 없다. 중력 그 자체는 우리에게 한계가 아니라 자연법칙일 뿐이다. 한계는 자연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정한다. 더 안전하고 좋은 삶을 선택하려는 목적으로 한계가 정해진다.
물질 한계 안에서 살아야 하는 세상은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하는 길이 아니라, 더 좋은 삶을 살고자 하는 인간 본성에 더없이 충실한 길이다. 물질에 기반한 낭비적 소비에 탐닉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가치를 회복하고 서로 간에 공유와 협력을 증진하는 비물질적인 활동으로 행복을 키워야 한다. 나의 소비 기쁨보다는 우리의 관계 기쁨이 충만한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
생태경제학자인 허먼 데일리는 “우리는 지금 경제성장이 결코 무한히 계속될 수 없다고 하는 ‘물리적 불가능성’과 성장은 끊임없이 계속되어야지 멈출 수는 없다는 ‘정치적 불가능성’ 사이의 갈등을 목격하고 있는지 모른다”라고 했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가장 시급한 문제는 그 어떤 이념적인 문제가 아니라 물리적인 문제이다. 결국 자연은 우리와 타협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물리적 불가능성’이 이길 것이다.
이제 희망은, 욕망으로 은폐되어 끝없이 성장해야 하는 지금 체계를 긍정하지 않고 부수고 나가는 데서 열리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더 커지는 세상이 아니라 더 좋아지는 새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기후를 위한 경제학>은 지금과는 다른 좋은 세상에 대하여 다양한 구성 방식을 상상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준다.
조천호 전 국립기상과학원장 cch0704@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