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살균제 피해자 박준석(15)군이 쓴 책 <내가 하고 싶은 여덟가지>의 일부. 가습기살균제 피해를 입은 후 누릴 수 없는 평범한 일상에 대해 적었다.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그냥 이 조정안을 받아들이고 끝내면 속이 편하겠죠. 정부가 피해자들 불러서 사과하고 해결될 것처럼 보였는데 왜 이렇게 조정을 서두를까. 이 문제는 국가 책임이 없을 수가 없는데 국가 책임이 빠져있어요. 정부가 피해자 도와주는 척만 하는 것 아닌가요.”
13일 가습기살균제 피해조정을 위한 조정위원회의 조정안을 본 추준영(51)씨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아들 박준석(15)군이 태어나던 2007년부터 가습기살균제를 쓰기 시작했다. 아이에게 최고로 좋은 것만 주고 싶어 타사 제품보다 비싼 옥시레킷벤키저 제품을 택했다. 박군이 돌을 넘겨 18개월이 됐을 무렵, 심한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주변에선 가습기를 잘 틀고 가습기살균제도 쓰라고 했고, 추씨도 의심 없이 권유를 따랐다. 그 기침이 가습기살균제에서 비롯됐을 줄은 그땐 알지 못했다. 이후 박군이 간질성 폐렴, 만성 폐쇄성 폐질환, 기흉, 천식을 얻게 될 줄도 미처 몰랐다.
어느덧 박군은 중학교 3학년생이 되었지만 여전히 일상은 회복되지 못했다. ‘죽어도 학교에서 죽자’는 각오로 하루도 수업을 빼먹지 않지만 책가방에는 흡입용 스테로이드제와 비상약이 상시대기 중이다. 주말이면 병원에서 면역주사를 맞는다. 심장 초음파 등 각종 검진까지 받게 되면 한달 병원비만 수백만원에 달한다.
“기업들이 이 조정안 아니면 (조정하지) 말라고 하는데, 미래 어떤 치료까지 받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기업이) 미래 치료권을 보장해주는 것은 (피해자들의) 기본적 권리입니다.” 추씨가 말했다.
가습기살균제를 제조·판매한 기업과 피해자 양자가 지원책을 논하는 사적 조정기구인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를 위한 조정위원회’는 지난해 10월 김이수 전 헌법재판관이 조정위원장을 맡으며 정식 출범했다. 기업 쪽은 옥시RB, 롯데쇼핑, 애경산업, 이마트, 홈플러스, 에스케이(SK)케미칼, 엘지(LG)생활건강, 지에스(GS)리테일 등 9개 기업과 12개 피해자 단체(7천여명)가 참여하고 있다. 지금까지 2차 조정을 거쳐 이달 중 최종 조정안이 확정된다. 피해자들은 이번 조정안 역시 잘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14살 초고도 피해자 기준 5억여원, 50살 고도 피해자 기준 3억여원
<한겨레>가 입수한 2차 조정안(이달 11일 기준)을 보면, 최종 피해등급을 받은 생존자들에게는 요양급여·요양생활수당·장해급여 등을 포함한 지원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폐활량 같은 폐기능을 기준으로 6개 피해등급을 나누고 이 피해등급과 연령에 따라, 초고도 피해자 기준 최소 8392만원에서 최대 5억3522만원까지 주어진다. 고도 피해자는 최대 4억730만원, 중등도 등급은 최대 3억1053만원, 경도 등급은 최대 1억8326만원을 지급받는다. 2차 조정안은 초안에 비해 연령 구분을 세분화했다. 1살부터 84살 이상까지 구분해 피해자가 나이가 어릴수록 많은 지원금을, 나이가 많을수록 적은 지원금을 받도록 했다. 소아 피해자 지원금 2000만원, 고액 치료비 지급 대상자에 대한 지원금 3000만원도 이번 조정에서 추가됐다.
그러나 추씨는 “1살에 피해를 받은 아이도 현재 14살이다. 최고 지원금을 받을 1살된 피해자는 없다”고 지적했다. 조정위 사무국(법무법인 한결)도 15일 <한겨레>에 “피해발생 시점을 고려하면 1~10세 조정 대상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확인했다. 10대 피해자들은 1살이 받을 최고 금액보다 1천만원 이상 덜 받게 된다. 최대로 5억원을 받는다고 해도 한 달에 수백만원의 병원 치료비가 들어갈 경우 약 25년 정도면 다 소진된다. 그때도 피해아동의 나이는 30대 중반~40대 중반이다. 성인의 경우 현재 50살인 고도 피해자는 3억3800만원을 받고 중등도 등급을 받은 40살 피해자는 2억5천만원을 받는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박준석군이 자신이 쓴 책 <내가 하고 싶은 여덟가지>를 엄마인 추준영씨와 함게 보고 있다.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사망자 유족에 대한 지원금은 최소 2억원에서 최대 4억원을 받을 수 있도록 정리했다. 초안보다 5천만원 상향됐다. 그러나 가습기살균제피해구제특별법에 따라 이미 지급된 특별유족조위금(1억500만원) 등을 공제하기에 이 역시 실제 받는 금액은 1~3억원 수준이라는 게 피해자들 설명이다. 나아가 가습기살균제 피해로 아내를 떠나보낸 유가족 김태종(68)씨는 “사망은 피해가 그만큼 심각했다는 것인데, 현재 2차 조정안 기준으로 사망자 지원금은 중도 등급의 피해를 입은 생존자에도 미치지 못한다. 최소한 고도 등급 생존자에 준해 지급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사망자 지원금 여전히 부족…미성년 피해자 미래 질병 고려해야”
피해자들은 이번 조정안이 그동안 겪고 향후에도 치를 고통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가령 피해 지원금이 80살 이상 기대 여명까지의 치료비를 충당하기에 부족하다는 우려다. 최대 지급액이 5억3000여만원으로 초안(4억8000만원)보단 늘었지만, 세부적으로 보면 적은 금액을 받을 피해자가 상당수라는 것이다.
게다가 미성년 피해자들 경우 향후 노화가 진행되면서 질병이 악화할 위험이 큰데, 이러한 상황의 발생 비용을 다시 청구할 장치도 조정안에 없다는 걱정도 크다. 피해자 김경영(46)씨는 “아이들은 신체적 기능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의학적 노화 시기에 어떤 일이 나타날지 모른다”며 “이를 선제적으로 계산할 수 없으니 미성년에 대해선 추가 심사를 요청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씨의 딸 정유주(13)양은 김씨가 임신 중 노출돼 폐기능이 떨어져 계속 치료받고 있다. 추씨도 “아이들이 추후 질병이 악화해 폐 이식을 받는 가능성 등을 고려해, 적어도 1회 이상은 의료급여 청구권을 줘야 한다. 이는 아픈 사람의 최소 권리”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이들이 추후 겪을지 모를 노동력 상실, 정신적 피해 등에 대한 비용도 제대로 계산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가습기살균제 피해 유가족인 송기진(59) ‘가습기살균제 합의를 위한 피해자단체’ 실무 대표는 “70세 이상이 되면 지원금 액수가 매우 큰 폭으로 떨어지고, 오히려 초안보다 낮은 금액을 받게 된다”며 “에스케이(SK) 등 대기업에서는 이에스지(ESG) 경영을 실천하겠다고 말한다. 이에스지 경영을 하려면 가습기살균제 문제에서부터 책임 있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가습기살균제의 유해성은 2011년 4~5월 서울아산병원에서 산모 4명이 원인 미상의 폐 손상으로 목숨을 잃으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이듬해 정부가 가습기살균제를 원인으로 확정했다. 지난 2월 기준 환경부에 피해구제를 신청한 이는 7696명, 사망자는 1742명이다. 이중 4291명이 피해자로 인정됐다.
기업에 법적 책임을 지운 사례도 있으나 일부다. 옥시·롯데마트·홈플러스 관계자들은 2018년 대법원에서 업무상과실치사상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에스케이(SK)케미칼·애경산업·이마트는 지난해 1월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가습기살균제 속 클로로메틸이소티아졸리논·메틸이소티아졸리논(CMIT·MIT) 성분과 폐질환 간 인과관계 입증이 부족하다는 이유다. 가습기살균제피해구제를위한특별법을 제정해 기업 분담금과 정부 출연금 등으로 구성된 기금으로 피해자의 치료비를 지원했지만, 정부의 피해 인정을 받아야 하고 인정 질환도 호흡기 쪽에 한정되어 한계란 지적도 있어왔다.
정부, 국회, 사법기관에서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이 있었으나 한계에 부딪혔고, 그 기간 피해자들 상당수가 병마와 경제적 압박이라는 이중고를 견디고 있다. 이번 조정안의 적용 대상자는 피해자 외 단순 노출 또는 판정 대기자까지 포함해 총 7027명(피해구제 신청자 총 7696명 중 일부 제외)이다. 조정 대상자 가운데 생존자는 5493명, 사망자는 1534명이다. 3개월 이내 조정 대상자의 50% 이상이 동의하면 조정안의 효력이 발생하지만, 동의하는 이들이 절반을 밑돈다면 무산된다. 조정위는 조정의 기대효과로 “피해자들의 고통과 미래에 대한 불안을 최대한 제거”하고 “기업의 불확실성 해소와 지속경영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피해 개인과 기업 간 길고 긴 갈등의 ‘타결’이 조정안의 의의란 얘기다.
하지만 양간의 자율적 조정을 돕겠다는 환경부가 현 정부 임기 내 조정을 마무리하려고 속도를 냈다며 피해자들은 또 한번 마음을 삭힌다. 지난달 중순 김경영씨는 <한겨레>에 “10여년 억울한 세월들을 조정위가 깊게 이해하며 임할 수 있을까. 5개월 중 준비 과정을 빼면 3개월 남짓인데, 무리한 일정이었다 생각한다. 참사 해결을 위한 공정은 피해자 구제가 우선인데 ‘사회적 합의’로만 접근하다 보니 기업까지 양쪽을 챙기는 모습”이라면서도 “피해자들끼리 통일된 의견은 아니다. (우리의 경우) 돈만 좇는다고 보일 수 있지만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치료비 마련을 위해) 배·보상을 먼저 받고 이후 진상규명과 사과가 순차적으로 이뤄지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조정 막바지로 향하는 14일엔 “이런 조정안을 받아들고 수용해야 하는지 고민”이라고 말했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박준석군이 13일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집에서 자신이 쓴 책 <내가 하고 싶은 여덟 가지>를 보고 있다.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피해자들은 조정위에 조정과정에서 기업이 부담한 비용을 공개할 것을 요청했지만 이를 약속받지 못한 상태다. <한겨레>도 지난 1월과 지난 14일 조정위 사무국 쪽에 조정위 운영 비용과 참여 기업의 부담금 등을 질의했으나 보안 상의 이유로 답변을 듣지 못했다. 조정 대상자의 평균 연령과 이들이 지급받게 될 지원금의 평균 액수에 대해서도 “파악이 어렵다”고 답했다. 애초 조정위 운영 기한이 2월말이었던 점을 볼 때 새 정부 출범 전에 조정을 서둘러 마무리 짓기 위해 기업들 입장을 적극 고려하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도 피해자들 사이에서는 피어나고 있다. 이런 인식 차이를 두고, 조정 과정을 잘 아는 관계자는 14일 “기업이 원래 특별법으로 분담한 금액 1250억원 이외에 피해자들이 동의할 경우 최대 8~9천억 정도를 더 부담하도록 조정한 것이다. 피해 소아의 연명까지 계산해 최대한 피해자를 지원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조정을 통해 폭넓은 구제와 미래 치료 가능성까지 고려한 세심한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한다. 임종한 인하대 보건대학원장은 “그동안은 호흡기 질환에 국한돼 피해자 인정이 이뤄져 왔지만 피해는 그뿐만이 아니다. 면역 질환, 심혈관 질환, 발달장애, 만성 피로감 등 다양한 질환을 호소하는 사례도 제대로 평가받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특히 어렸을 때 노출이 많이 된 경우 폐기능 이외의 여러 가지 장기적인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 향후 이러한 질환에 대한 세밀한 평가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민제 기자
summer@hani.co.kr 최우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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