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 동굴처분시설 터널 내부. 맨 위에 1번 사일로와 2번 사일로를 가리키는 표지가 붙어 있다.
지난 26일 한국원자력환경공단이 준비한 버스를 타고 야트막한 산 중턱쯤에 난 터널 입구로 진입해 잠시 달렸다. 이내 멀리 터널 천장에 ‘해수면 -95M·입구로부터 1450M’라고 쓰인 표시가 눈에 띄었다. 국내에서 발생하는 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방폐물)의 종착점인 지하 동굴처분시설에 도착한 것이다. 버스가 멈춘 곳은 표시대로 해수면 95m 아래, 해발 30m에 있는 터널 입구에서 지하로 125m 내려간 곳이다.
동굴처분시설은 문무대왕 수중릉에서 멀지 않은 경북 경주시 문무대왕면 봉길리 일대 206만㎡에 터 잡은 중·저준위 방폐물 처분시설의 1단계 시설이다. 200리터 짜리 방폐물 드럼 10만개를 저장할 수 있는 규모로 지어져 2015년부터 운영되고 있다. 버스에서 내려 터널 안 쪽으로 걸어 들어가니 좌우로 짧은 터널이 나왔다. 방폐물을 저장하는 사일로(SILO)는 중심 터널에서 그렇게 분기된 3쌍의 터널 양 끝에 하나씩 모두 6개가 설치돼 있다.
높이 50m, 내부 직경 23.6m의 거대한 원통형 콘크리트 사일로 6곳에는 26일 현재 방폐물 2만5578드럼이 저장돼 있다. 운영을 시작한지 7년 만에 전체 저장용량의 약 4분의1 가량을 이미 채운 셈이다. 방폐물은 방사능 농도와 열 발생률에 따라 사용후핵연료인 고준위, 원전 해체 과정에서 많이 나오게 되는 중준위, 방사능 농도가 낮은 저준위와 극저준위로 구분된다. 동굴처분시설에는 이 가운데 원자력시설의 방사선 관리구역에서 작업자들이 사용한 작업복, 장갑 등과 같은 저준위 방폐물이 저장되고 있다. 현장을 안내한 조병조 원자력환경공단 소통협력단장은 “동굴처분시설은 중준위 방폐물도 3만 드럼 가량 저장할 계획이지만 배출자가 물량이 많은 저준위부터 보내면서 아직 중준위 저장까지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앞으로 원전 해체가 이뤄지면 중준위 폐기물이 많이 발생해 반입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경주 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 동굴처분시설 모형도. 한국원자력환경공단 제공
드럼에 밀봉된 상태로 처분장에 도착한 방폐물은 일단 인수검사시설에서 검사를 받게 된다. 여기서 표면 방사선량률 측정, 엑스선 검사, 핵종분석 등의 검사를 통과한 방폐물 드럼은 10㎝ 두께의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직사각형 처분용기로 옮겨진다. 이 처분용기는 드럼 16개가 들어가도록 제작돼 있다. 처분용기를 실은 트럭이 지하 사일로 옆 터널 끝에 와 멈추면 사일로 위에 설치돼 있는 거대한 크레인이 밖으로 나와 처분용기를 집어올려 사일로 안에 차곡차곡 쌓는다. 사일로에 처분용기가 가득 차면 쇄석과 콘크리트로 빈 공간을 메워 폐쇄하게 된다. 이 폐쇄 작업은 아직 먼 미래 이야기다. 동굴처분시설은 현재 가동 중인 모든 원전의 폐쇄 과정에 발생할 중준위 방폐물까지 수용하고 나서야 폐쇄될 것이기 때문이다.
동굴처분시설은 건설 공사 당시부터 다량의 지하수 누출로 논란이 됐다. 해수면 아래에 위치해 염분기가 많은 지하수가 사일로 안에 침투해 방폐물이 담긴 드럼통을 부식시키고, 그 결과 새 나온 방사성 물질이 지하수에 섞여 들어 주변 환경을 오염시킬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현장에서 브리핑을 한 원자력환경공단 관계자는 “지금은 굉장히 갈수기라서 물이 많이 줄었지만 평균적으로는 하루에 1500t 정도 발생한다. 안전을 위해 펌프를 삼중으로 설치해 사고가 났을 경우도 문제 없이 밖으로 물을 펌핑해 낼 수 있게 돼 있다”고 말했다.
경주 중·저준위 방폐물 동굴처분시설에 설치돼 있는 2번 사일로 상부 모습. 노란색 크레인 아래 쪽에 붙여 있는 사각형 물체가 방폐물 드럼이 들어간 콘크리트 처분용기다.
경주 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분시설 방문객센터인 코라디움 전시관에 설치돼 있는 방폐물 드럼과 콘크리트 처분용기 실제 크기 모형.
하지만 경주 지역 환경단체와 주민들은 최근 지하수 배수관 부실시공 의혹까지 제기하고 나선 상태다. 원자력환경공단이 2021년 5월 지하수 배관추가 설치를 끝내고 8월부터 본격 운영에 들어갔으나, 12월부터 배관에서 누수가 발생하는 등 부실시공이 드러났다는 주장이다.
이날 착공식을 한 표층처분시설은 이미 운영 중인 동굴처분시설에 이은 2단계 시설이다. 저준위 방폐물 12만5천 드럼을 저장할 수 있는 용량으로 설계됐다. 땅 위에 가로·세로 각 20m, 높이 10m 크기의 처분고 20개를 설치해 처분용기를 쌓다가, 처분고가 가득 차면 폐쇄한 뒤 지속적으로 관리한다는 것이 원자력환경공단 계획이다.
문제는 현재 원전에서 보관 중인 사용후핵연료 처리다. 중준위와 저준위 이하 방폐물 처분장과 달리 사용후핵연료인 고준위 방폐물 최종 처분장은 부지 선정 논의의 첫 발도 떼지 못한 상태다. 지난해 말 문재인 정부는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중간저장시설을 부지 선정 착수 시점부터 20년 안에, 영구처분시설을 37년 안에 확보하도록 하는 내용의 ‘제2차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 기본계획’을 확정했다. 이 계획은 박근혜 정부 때의 제1차 기본계획이 일방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시민사회 주장에 따라 공론조사를 거쳐 마련됐다. 하지만 시민사회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했다. 사용후핵연료의 원전 부지 내 임시 저장을 공식화해 원전 지역을 영구처분장으로 만들려 한다는 의심을 지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준위 방폐물 관리는 윤석열 정부가 지난 7월 확정한 에너지정책 방향에도 담겨 있다. 고준위 방폐물 처분을 위한 특별법을 마련하고 컨트롤타워로 국무총리 산하에 전담조직을 신설해 추진하기로 한 것이다. 26일 동굴처분시설을 찾은 이창양 산업부 장관은 “고준위 방폐물 처리 특별법에 처분장 위치 선정 절차, 주민협의 절차, 주변지역 지원에 대한 법적 근거 등을 다 담고, 그 법에 따라 투명하고 객관적인 절차를 거쳐나갈 것”이라며 “올해가 고준위 폐기물 처분의 원년이 되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한국수력원자력의 사용후핵연료 저장 현황 자료를 보면, 2분기말 현재 전국 원전에서 보관 중인 사용후핵연료는 저장용량 68만5460다발의 약 75%인 51만6071다발이다. 여기에서 지난해 확충돼 다소 여유를 갖게 된 월성원전 건식저장시설(맥스터) 저장분을 제외하면, 18만7460다발인 전체 원전 저장용량의 97%가 이미 채워져 있는 상태다.
2021년 한국방사성폐기물학회는 문재인 정부 말 수립된 9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따른 원전 가동을 반영한 분석을 통해 고리와 한빚원전에서는 2031년, 한울원전에서는 2032년부터 사용후핵연료 저장 용량 포화상태에 들어갈 것으로 전망했다. 윤석열 정부가 밝힌대로 설계 수명이 만료된 모든 원전에서 계속 운전을 추진한다면 포화 시점은 더 당겨질 수밖에 없다.
글·사진 김정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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