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쿄에서 활동하는 미술가 겸 엔지니어 카메론 베카리오(Cameron Beccario)가 ‘어스 프로젝트’(Earth project)란 이름으로 개발한 사이트 ‘어스널스쿨’ 갈무리. 제19호 태풍 ‘솔릭’과 제20호 태풍 ‘시마론’이 근접해 움직이고 있다.
1994년 제13호 태풍 ‘더그’는 ‘효자태풍’이라 불린다. 1994년 7~8월 전국 평균 폭염일수는 28.7일, 열대야 일수는 17.3일로 역대 가장 더운 여름으로 모두 지쳐 있을 무렵인 8월8일 더그는 전국에 폭염을 식혀줄 단비를 선사하고 물러갔다. 당시 더그는 ‘사라호’(1959년 9월 한반도를 관통한 대형 태풍) 이후 최악의 태풍으로 표현되며 긴장시켰지만 8월9일 한반도에 접근할 때는 ‘이빨 빠진 호랑이’가 돼 있었다.
더그의 세력이 급격히 약화한 것은 제14호 태풍 ‘엘리’와 서로 간섭 효과, 이른바 ‘후지와라 효과’ 때문으로 분석됐다. 후지와라 효과는 일본 기상학자 후지와라 사쿠헤이가 1921년 유체에서 소용돌이치는 흐름이 2개 이상 나오고 이 흐름들이 상당 거리로 가까워지면 서로 간섭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으로, 논문으로 발표했다. 이후 두 열대성 저기압이 1000~1500㎞ 정도 근접해 간섭하는 현상을 가리켜 ‘후지와라 효과’라고 일컫게 됐다.
후지와라 효과의 대표적인 사례는 2012년 제14호 태풍 ‘덴빈’과 제15호 태풍 ‘볼라벤’이 꼽힌다. 덴빈은 8월19일 필리핀 동쪽 해상에서 발생해 대만 부근에 머물다 하루 뒤 발생한 볼라벤에 의한 후지와라 효과로 ‘알파(α)’ 형태의 이례적인 진로를 보이며 볼라벤을 따라 북상했다. 이때 덴빈은 볼라벤이 지나간 뒤 이어서 북상하면서 동쪽으로 편향했는데, 당시 기상청이 예보한 목포-대전-강원북부로 이어지는 경로가 아니라 고흥으로 상륙해 경북을 지나 울릉도로 진행했다. 진로 예측의 잘못으로 태풍 영향권에 들지 않을 것으로 예상됐던 부산에서 미처 대비를 못해 많은 피해가 발생했다. 볼라벤과 덴빈이 43시간 간격으로 상륙하면서 11명의 인명피해와 3830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하지만 이 경우를 ‘후지와라 효과’로 볼지는 논란이 있다. 하경자 부산대 지구환경시스템학부 교수는 “볼라벤의 영향으로 전남 앞바다의 해수면 온도가 10도 가까이 낮아지고, 이 급속하게 냉각된 해수면에 의해 덴빈의 강도가 약해졌음이 실험을 통해 입증됐다. 두 태풍이 근접해 직접 간섭 효과를 일으킨 것이 아니라 선행 태풍에 의해 후행 태풍에 변화가 발생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제19호 태풍 ‘솔릭’이 이동경로를 급격히 ‘변침’한 원인도 제20호 태풍의 ‘시마론’과의 후지와라 효과보다는 한반도 주변 기상장의 변화에서 찾는 것이 합리적인 것으로 보인다. 솔릭이 북위 20도 지역에 머물 때 시마론과 상호작용에 의해 진로에 변화가 생겼다면 이는 후지와라 효과로 볼 수 있지만 30도 이상 고위도에서는 두 태풍이 서로 간섭하기에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었다.
솔릭은 애초 예상보다 북태평양고기압 세력이 강화되면서 서쪽으로 편향해 북상하는 경향을 보여왔다. 하지만 23일 오후 제주도 서쪽 해상까지 진출한 솔릭은 그곳에서 6시간 이상 시속 4~6㎞의 느린 속도로 움직이며 전향을 시작했다. 이때 시마론은 시속 30~40㎞의 빠른 속도로 북상해 우리나라 동쪽에 머물던 북태평양고기압 세력을 크게 약화시켜놓은 상태였다. 솔릭은 북태평양고기압이 약화한 동쪽으로 ‘급변침’을 해 남부지방을 북동 방향으로 가로질러 갔다. 이때 솔릭은 이미 에너지가 많이 감소한 상태였다. 제주도 서쪽 해상에 오래 머물게 되면서 따뜻한 해수와 바닷속 찬물이 섞이는 현상(저온수 용승)으로 해수면 온도가 내려가고, 전남 해안에 근접해 육지와의 마찰로 힘을 잃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유희동 기상청 예보국장은 “태풍 솔릭의 속도가 급격히 느려진 것은 시마론이 시속 30~40㎞의 빠른 속도로 북상하면서 북태평양고기압 세력을 약화시키고 이에 따라 솔릭이 동쪽으로 전향하는 힘을 얻었다. 솔릭이 동쪽으로 향하려는 힘과 현재 진행방향인 북서 방향의 관성력이 균형을 이루면서 이동 속도가 느려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유 국장은 또 “두 태풍 사이의 간격이 1100㎞ 이상이고 대기 하층의 기상 상황을 고려할 때 두 태풍의 연계성을 찾기 어려워, 이른바 두 태풍의 상호작용에 의해 역회전이 발생하는 ‘후지와라 효과’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덧붙여 설명했다.
이근영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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