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S 뉴스레터를 구독해주세요. 검색창에 ‘에스레터’를 쳐보세요.
사춘기 때 참 외로웠다. 중학교 진학을 앞두고 신축 아파트에 입주하러 들어간 낯선 동네에 끝내 적응하지 못했다. 학교는 더 따뜻하고 깨끗했고 새 선생님은 몹시 친절했지만, 왠지 새 친구들이 너무 무서웠다. 아마 사춘기여서 더 그랬을 것이다. 몇년이 지나도 나 혼자만 고향 친구들을 떠나온 느낌이 들었고, 뿌리내리지 못한 채로 6년을 흘려보냈다. 그 시절의 기억은 회색빛이고, 남들이 이야기하는 학창 시절의 추억이 어떤 건지 잘 모른다. 그래서 종종 ‘그때 그 동네를 떠나지 않았더라면’, ‘그 친구들과 헤어지지 않았더라면’ 상상하곤 한다.
어린이가 건강하게 자라나는 데에 친구 관계는 매우 중요하다. 당연한 얘기 같지만, 어른들 생각보다 그 영향이 훨씬 이른 시절부터 나타난다. 예를 들어, 취학 전 친구와 노는 법을 잘 배운 유아들은 이후 정신건강 문제의 징후가 더 적다는 연구가 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연구팀은 아이들의 발달을 추적하는 장기 연구에서 1676명의 데이터를 뽑아 3살 때 ‘또래 놀이 능력’을 평가했다. 블록 탑 쌓기 같은 목표 지향적 놀이나, 숨바꼭질 같은 협력 게임을 얼마나 잘하는지 점수를 매긴 것이다. 그리고 4년 뒤 아이들이 7살이 됐을 때 문제 행동이 얼마나 나타나는지 분석했다.
그 결과, 3살 때 또래 놀이 능력이 한 단계 높아지면 7살 때 과잉 행동 문제는 8.4%, 품행 문제는 8%, 정서 문제는 9.8%, 또래 문제는 14% 적었다. 빈곤 수준이나 산모의 심리적 고통, 형제자매 및 양육자와 놀 기회가 충분한지 여부와 상관없이 경향이 일관되게 나타났다.
이는 아마 유아가 친구와 놀 때 감정 자제력이나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고 반응하는 능력 등이 발달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사회 인지는 평생 안정적인 우정을 쌓는 데 기본이 되는 능력이다. 사회관계가 좋을수록 정신건강이 더 좋다는 증거도 이미 많다. 연구팀은 “정신건강 위험군 아이들에게 양질의 또래 놀이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린이의 또래 관계는 성인기 신체건강에도 영향을 준다. 이전의 수많은 연구에서 사회적 웰빙, 즉 친밀한 관계나 사회적 지원 여부가 심혈관 질환 등 신체건강과 연관성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는데, 미국 피츠버그대 연구팀은 이런 연관성이 훨씬 더 어린 시절부터 나타나는지 의문을 품었다. 연구팀은 피츠버그 공립학교의 남학생 집단을 추적하는 ‘피츠버그 청소년 연구’에서 267명의 데이터를 조사했다. 양육자는 아이가 6살에서 16살이 될 때까지 친구와 얼마나 자주 어울리는지 보고했다. 이 연구에는 어린 시절의 외향성이나 적대감, 건강 상태 같은 다양한 개인 특성뿐만 아니라 아동기 사회경제적 상태, 성인기 사회적 교류 정도 등 가족 및 환경 데이터도 포함됐다.
분석 결과,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에 친구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낸 남자아이들은 32살이 됐을 때 혈압과 체질량 지수가 더 건강했다. 어린 시절의 건강 상태나 성인기의 사회적 교류 정도 같은 다른 잠재적 요인을 고려해도 같은 결과가 나왔다.
어린이의 우정도 소중하다. 어른들은 이를 자주 간과한다. 그리고 또 하나, 어른이 어린이의 우정에 얼마나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지도 자주 과소평가하곤 한다.
최근 미국 애틀랜틱대 심리학과 연구팀은 교실의 좌석 배정이 우정에 중요한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밝혔다. 사우스플로리다의 공립 초등학교에 다니는 3~5학년 학생 235명을 대상으로 좌석 배치를 바꾸고 일정 기간이 흐른 뒤 누구와 가장 친한지 물은 결과, 아이들은 자리 배치를 바꾼 뒤 근처에 남은 급우나 멀리 앉게 된 급우보다, 새롭게 가까운 자리에 앉은 아이들과 친구가 될 가능성이 더 큰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학생들이 내내 자리에 붙어 있었던 건 아니다. 쉬는 시간이나 자유 활동 중 멀리 떨어져 앉은 아이와 놀기도 했다. 그럼에도 새로 가까이 앉은 급우와 친한 관계가 된다는 건 아이들의 우정 형성에서 ‘근접성’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 노출만으로 우정 형성을 설명할 수 없다는 기존 주장과 일치하는 결과다.
이런 근접성은 특히 초등학교 시절에 중요하다. 이 나이의 아이들은 사회생활의 제약 탓에 대부분 같은 반 아이들과 친구가 되기 때문이다. 이 연구에 따르면, 특히 친한 사이는 아마 가까이 앉은 아이들이었을 것이다. 연구팀은 “교사는 좌석 배치를 통해 어린이의 대인 관계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며 “어른들이 아이들의 사회생활에 개입할 때 의도치 않은 사회적 결과가 발생함을 유의해야 한다”고 밝혔다.
반대로 어린이의 우정을 깨는 건 주로 부모다. 미국 애틀랜틱대와 핀란드 이위베스퀼레대 공동 연구팀은 1~6학년 어린이 1523명의 데이터를 통해 부모의 양육 방식으로 자녀의 우정 안정성을 예측할 수 있는지 분석했다. 연구팀은 육아 방식을 세가지로 나눴다. 통금 시간을 정하거나 수시로 감시하는 행동 통제 유형, 수치심이나 죄책감을 심어주는 심리적 통제 유형, 마지막은 따뜻함과 애정 유형이었다. 양육자의 우울증도 함께 평가했다.
분석 결과, 우울증에 걸린 부모를 둔 아이들은 가장 친한 관계가 단절될 위험이 최대 104%까지 높았다. 심리적으로 통제하는 부모를 둔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반면, 따뜻함과 애정과 같은 긍정적인 양육 행동이 자녀의 우정을 안정적으로 변화시킨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연구팀은 “우울하고 심리적으로 통제하는 부모를 둔 아이들은 타인과 교류하는 건전한 방법을 배우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어른으로 자라보니 이해가 된다. 분양에 당첨돼 다세대 주택에서 신축 아파트로 이사하는 건 크나큰 희망이었을 것이다. 정돈된 동네, 좋은 학교는 자식에게 가장 바람직한 변화라고 믿었을 것이다. 흔히 “애들은 금방 적응한다”고들 하니까, 오랜 친구들과 헤어지는 게 큰 문제가 아니라고 봤을 수도 있다.
어느덧 나도 학군과 집값을 따져보는 양육자가 되어, 중학교 배정에 영향을 미치는 초등학교 전입 날짜를 남들보다 빠르게 확정 짓기 위해 당장 내일이라도 이사하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그럴 때마다 나의 어린 시절을 되새기며 심호흡을 한다. 만으로 네살 반, 아이는 이미 자신만의 사회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반에서 누가 좋고 싫은지, 방학이 되면 누가 보고 싶은지 스스럼없이 이야기한다. 아무리 어린 나이라도 정든 친구들과 헤어지는 게 결코 편할 수는 없다. 어른들은 곧잘 잊곤 하지만.
과학칼럼니스트
육아를 하며 과학 관련 글을 쓴다. 과학 전문지에서 기자로 일했다. 저서로 <아기 말고 내 몸이 궁금해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