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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종일 시달리다가 퇴근하면 말만 퇴근일 뿐 사실 또 다른 출근이다. 바로 육아라는 현장. 몸과 정신은 이미 녹초인데 할 일은 너무 많다 보니 말 그대로 빠르고 가성비 좋게 해치우곤 한다. 숙제 있니? 숙제하자. 다 먹었니? 빨리 먹자. 이 닦았니? 뭐 했어, 이 녀석아. 아홉시네? 샤워하자. 옷 입었니? 이제 눕자. 책 읽자고? 안 돼, 내일. 그사이 짬짬이 엄마도 씻고 옷 갈아입고 밥 먹고 이 닦고 유치원 식판도 닦아놓아야 한다. 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면서도 곤혹스러운 과제는 단연 아이 밥 먹이기다.
어른 마음에 쏙 들게 먹는 어린이는 없다. 잘 먹는 아이는 너무 잘 먹어서, 안 먹는 아이는 너무 안 먹어서 걱정이다. 잘 먹어도 채소만은 안 먹어서 걱정, 잘 먹어도 키가 안 크면 또 걱정이다. 우리 집 어린이는 대체로 제가 크는 데 필요한 양만큼은 먹는 것 같은데, 채소는 끔찍이 싫어한다. “키 쑥쑥 크려면 이거 먹어야 해.” 나도 채소를 잘 안 먹지만, 아이의 성장을 위해 먹여야 한다는 의무감에 휩싸인다. 주기도문이라고 생각하면 편한 것 같기도 하고.
미뢰(味蕾). 맛세포들이 꽃잎처럼 겹쳐진 형태라 맛봉오리라고 이름 붙은 이 기관에는 쓴맛, 감칠맛, 단맛, 짠맛, 신맛을 느끼는 다섯 종류의 수용체가 들어 있다. 인간은 살기 위해 필요한 맛, 즉 포도당의 단맛과 아미노산의 감칠맛과 소듐의 짠맛은 꿀떡꿀떡 삼키도록 진화했다. 반면 쓴맛은 식물이 방어기제로 내세우는 독의 맛이므로, 뱉고 싶은 게 본능이다.
그런데 이 맛봉오리가 어른의 혀에는 1만개가 있는 반면 어린이의 혀에는 무려 3만개가 있다고 한다. 인간의 삶에서 그 어느 때보다 체중 대비 많은 칼로리를 필요로 하는 시기이면서, 동시에 가장 취약한 시기이기 때문일까? 어린이는 모유처럼 달큼하고 감칠맛이 풍부한 음식을 더 민감하게 감지하고 탐닉하며, 반대로 채소는 더 쓰게 느껴져서 싫어한다. 흔히 말하는 ‘어린이 입맛’이다. 요컨대 어린이에게 먹는다는 건 어른의 생각보다 훨씬 강렬한 경험이다. 그러니 “이게 뭐가 쓰다고 그러니? 하나도 안 써. 한번 먹어봐”라는 종용은 어린이 입장에선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런데 어린이 입맛이라고 다 같은 입맛은 아니다. 단맛을 감지하는 어린이의 능력도 편차가 크다. 미국 모넬화학감각연구소는 7~14살 어린이 216명을 대상으로 증류수와 설탕 용액 중 어떤 것이 맛있는지 표시하게 했다. 설탕 용액의 농도를 점점 진하게 하면서 어린이가 물과 확실하게 구별하는 가장 낮은 농도를 그 어린이의 단맛 감지 임계값으로 봤다. 즉, 이 임계값이 낮을수록 어린이가 단맛에 더 민감함을 의미한다. 실험 결과 가장 예민한 어린이는 물 한컵에 설탕 0.005티스푼만으로도 단맛을 느낀 반면 가장 둔감한 어린이는 3티스푼이 필요했다.
단맛 민감도를 결정하는 유전적 영향을 조사하기 위해 어린이 168명의 디엔에이(DNA)를 분석한 결과 단맛 유전자 변이와는 별 관련이 없었고, 흥미롭게도 쓴맛 유전자 변이와 관련이 있었다. 쓴맛에 민감한 어린이들이 단맛에도 민감했으며, 식단 기록을 살핀 결과 더 달게 먹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사실 연구팀은 비만 어린이가 단맛에 둔감하고 훨씬 달게 먹을 거라는 가설을 세웠는데, 결과는 반대였던 것이다. 아이가 녹색 채소를 유독 거부한다면 쓴맛에 민감한 유전자 변이를 타고났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매 끼니 쓰디쓴 가루약을 뿌려 먹는다고 상상해보면 몹시 고역일 터. 어떤 어린이의 세계에선 채식이 그렇다.
그렇다고 의무감으로 똘똘 뭉친 어른이 어린이에게 “채소를 먹어야 쑥쑥 큰다”고 말하는 게 도움이 될까? 경험상으론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이런 메시지가 “몸에 좋은 것이 입에 쓰다”는 편견을 조장하는 건 아닐까 싶은데, 실제로 어린이들이 건강식품의 이점에 대해 들었을 때 그걸 먹을 가능성이 적다는 연구가 있다.
미국 경영대 연구팀이 3~5살 어린이를 대상으로 크래커나 당근 간식을 먹는 여자아이에 대한 그림책을 읽게 하는 실험을 했다. 실험에 따라 어떤 책에서는 음식이 소녀를 강하게 만들거나 숫자 세는 방법을 배우는 데 도움이 된다고 언급했고, 어떤 책에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음식을 제공하고 아이들이 얼마나 시도하는지 관찰한 결과, 음식의 이점에 대한 메시지가 없는 그림책을 읽은 아이들이 음식을 더 많이 먹는 것으로 나타났다.
음식은 단순히 살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살기 위해서만 먹을 때 삶은 얼마나 퍽퍽해지는가. 그걸 잘 아는 어른도 왜인지 양육자가 되면 음식을 단순히 어린이를 키우는 도구로 여기는 실수를 범한다.
음식이 맛있다는 가치 판단, 이걸 먹어서 행복하다는 감정은 비단 미각만의 결과물이 아니다. 인간은 음식을 시각·후각·청각·촉각으로도 먹는다. 예부터 보기 좋은 떡이 맛도 좋다고 했고, 구수한 된장 냄새는 식욕을 돋우며, 감자칩의 바사삭 소리가 맛을 증폭시키고 심지어 식당의 잘 다려진 식탁보의 촉감이 음식 맛을 더 좋게 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그뿐인가. 함께 먹는 사람, 먹으며 나누는 이야기, 공간의 분위기, 음식에 담긴 추억까지 모든 것이 먹는 경험에 영향을 준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실제로 두뇌의 미각 피질은 혀의 미각세포뿐만 아니라 모든 감각기관으로부터 정보를 받아서 처리한다.
어린이도 먹는 것이 의무가 아닌, 즐겁고 안전하고 풍요로운 경험일 때 더 잘 먹는다. 그게 채소라도 말이다. 학교에서 정원 가꾸기나 요리 수업에 참여한 학생들이 프로그램 전날에 비해 채소 반 접시를 더 많이 먹었다는 연구가 있다. 씨앗을 심어 케일을 키우고, 그걸 올리브오일에 구워 케일칩으로 만드는 과정을 어린이들이 즐긴 것이다. 또, 미국 시골에 사는 부모 1600여명을 인터뷰한 연구에서는 집에서 농산물을 길러 먹는 어린이가 그렇지 않은 어린이보다 하루 채소 권장량을 모두 먹을 가능성이 두배 이상 높다고 나왔다. 어른들이 과일과 채소를 먹는 것을 더 많이 보기 때문이었다. 연구에 참여한 양육자들은 텃밭에서 갓 난 농산물을 먹으며 자란 아이들이 다른 음식보다 과일과 채소의 맛을 더 좋아한다고 응답했다.
재미있는 연구 결과 또 하나. 먹는 자세도 맛에 영향을 준단다. 서양식 바비큐 파티처럼 서서 먹으면 신체적 스트레스가 유발돼 미뢰가 둔감해진다고. 어린이에게 채소를 서서 먹으라고 해보면 어떨까.
일본의 푸드 칼럼니스트 히라마쓰 요코가 저서 <산다는 건 잘 먹는 것>에서 말했듯 좋은 사람과 좋은 음식을 먹는 건 “밋밋하게 흘러가는 날들에 기분 좋은 쐐기를 박는 일”이다. 아이와의 식사를 매일 해치워야 하는 과제가 아니라, 천천히 정성을 들여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경험으로 바꿔야 한다. 우리 집 어린이의 스테인리스 식판부터 바꿔야겠다. 봄이니까, 벚꽃이 피어난 그릇으로. 가능하면 아이와 함께 요리도 해보려고 한다. 언젠가 짬이 나면 같이 채소를 길러보는 것도 좋겠지. 물론 ‘저녁 있는 삶’이라는 대전제가 먼저 만족돼야 한다. 그러니 노동 시간을 줄이고 정시 퇴근을 허하라.
과학칼럼니스트
육아를 하며 과학 관련 글을 쓴다. 과학 전문지에서 기자로 일했다. 저서로 <아기 말고 내 몸이 궁금해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