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상혁 녹색병원 원장이 지난 8일 녹색병원 원장실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전태일 병원’으로 거듭나겠다는 녹색병원의 중심엔 임상혁(58) 병원장이 있다. 양길승(초대), 김봉구(2대) 원장에 이어, 2019년부터 3대 원장으로 재직 중이다. 설립 20주년을 맞는 오는 20일, 녹색병원은 서울 중구 명동 커뮤니티하우스 마실에서 전태일의료센터 건립위원회 출범식을 연다. ‘한겨레’는 지난 8일 서울 중랑구 면목동에 있는 녹색병원 원장실에서 그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원장실은 건물의 맨 아래, 지하2층에 있다. 올해 초 지하층 장례식장 리모델링 공사 때 소음이 심해 7층으로 한때 옮겼던 시기를 빼곤 줄곧 그 자리 그대로다. “지하층에 있다가 전망 좋은 7층으로 가니까 그렇게 좋더라고요. 내려오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생길 만큼요, 하하. 그런데 사람들이 자꾸 물어보는 겁니다. 원장실을 왜 7층으로 옮겼느냐고. (장례식장) 공사가 끝나자마자 다시 내려왔습니다”라며 웃었다.
―전태일의료센터의 설립 배경과 의미는?
“두 가지다. 하나는 노동자와 사회적 약자에게 필요한 공익 의료 서비스를 더 확장하기 위해서다. 한국에서 산업재해 노동자가 일터에 복귀하는 비율이 약 35%다. 나머지는 직장을 그만두거나, 옛날보다 못한 직장으로 밀려난다. 일하다가 병들고 다쳤는데 직장까지 잃어버리는 거다. 그런 노동자들을 치료에 그치지 않고 다시 건강한 몸으로 일터에 복귀할 수 있도록 하려는 거다. 마루 시공 노동자들이 무릎 수술을 하고 일을 더는 못 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폐지 줍는 할머니들께서 끄는 유모차 끌개가 도로에 조금만 턱이 있어도 넘어져서 다치는데, 검진과 치료에서 더 나아가 안정적인 운반 도구를 고안해 보급할 수도 있다.다른 하나는, 전태일의료센터를 진정한 공공병원으로 만들어보자는 사회적 연대의 실험이자 실현이다. 정부가 운영하는 공공병원이 아니라 노동자와 국민이 설립 기금을 내고 기부도 하고 실제 운영에도 참여하는 거다. 이게 성공하면 제2, 제3, 제4의 전태일병원이 나올 수 있다. ‘전태일 정신’은 노동자뿐 아니라 우리 사회 모든 사람이 약자를 배려하고 서로 나누고 연대하는 정신이잖나.”
―녹색병원은 ‘공익형 민간병원’을 자임한다. 어떤 의미인가?
“병원은 크게 중앙 또는 지방정부가 설립·운영하는 공공병원과 개인 또는 법인이 운영 주체인 민간병원으로 나뉜다. 우리나라는 공공병원이 워낙 적어서 지자체나 공공기관이 운영하는 병원도 공공병원이라고 한다. 그것까지 합쳐도 전체 병원의 약 8%에 그친다. 유럽 선진국은 한국 기준으로 따지면 공공병원이 90% 수준이다. 일본이 40% 정도, 시장원리가 지배하는 미국도 공공병원 협회(NAPH) 소속 병원이 20%는 된다. 녹색병원은 중앙정부의 출연과 지원이 전혀 없는 민간병원이지만, 병원 운영의 목적과 가치가 사실상 공공병원이나 마찬가지다.”
―한국에서 공익형 민간병원의 지속가능한 경영이 가능할까?
“기업이 공익활동을 하면 적자일 수밖에 없다는 건 편견이다. 국민건강보험은 사회보험·공공보험이다. 민간병원의 영리 활동은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비보험 수가를 많이 청구하거나 과잉진료가 많다. 우리는 그런 게 없다. 그 대신 병원이 환자를 열심히 돌보면 충분히 운영할 수 있다. 우선 사회보험에서 커버된다. 정부가 운영하는 취약층 의료비 지원 사업이나 여러 공익재단의 복지사업 재원도 많다. 또 하나는, 공익활동을 열심히 하면 지원해주는 단체와 기부자들이 있다. 예를 들어, 녹색병원이 중랑구의 홀몸 어르신과 장애인 방문 진료를 하는데 보험수가가 전혀 없다. 그런데 중랑구에서 연간 3000만원을 지원해준다. 그 자체로 사회연대의 의미가 있다. 우리는 중앙정부의 지원을 한 푼도 받지 않는다. 받고 싶은데 주질 않는다.(웃음)”
―한국은 여전히 산업재해 사망률이 다른 선진국들보다 현저히 높다.
“사고 산재는 줄어드는 추세다. 그런데 선진국에선 찾아보기 힘든 후진국형 산업재해 사망이 아직도 너무 많다. 떨어져 죽고, 끼여 죽고, 공사장 구조물이 무너져 깔려 죽고…. 이런 건 정말 있어서는 안 되는 거다. 노동환경이 열악한 소규모 사업장이나 하청 사업장의 비정규직 산재 사망이 많은 것도 문제다. 정규직 노동자가 산재로 사망하는 경우는 드물다.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되면서 좀 빠르게 개선이 될 거라고 봤는데 기대에 많이 못 미친다. 법이 있어도 실효성이 부족하다는 거다. 그렇지만 중대재해처벌법이 노동계와 시민사회의 힘으로 입법됐고, 그 과정에서 사회적으로 굉장히 각성한 것은 의미가 아주 크다.”
―요즘 뉴스 보기가 겁난다는 사람들이 많다. 한국 사회가 많이 아픈 것 같다.
“사회가 아프면 의사도 아프다. 사회가 도대체 왜 이렇게 아픈지 돌아보는 것도 의사의 책무다. 두 가지가 정말 가슴 아프다. 하나는 재난 참사가 너무 많고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는 무기력과 좌절감이 깊다. 두번째는 최근 도드라지는 ‘묻지 마’ 폭력과 살인. 이른바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의 범죄가 많은데, 사회가 갈수록 개별화·파편화하고 격차가 벌어지면서 사람들이 고립되고 무력감을 느끼니까. 사람들이 공동체에서 서로 돕고 의지하며 사는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 녹색병원이 추진하는 전태일의료센터도 그런 개념에서 접근할 수 있다고 본다. 사람들이 공동의 가치에 참여하고, 아픈 곳을 서로 위로하고, 이런 게 반드시 있어야 한다.”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