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여 회장이 놀라울 정도로 젊음을 유지하는 건강 비결은 걷기였다. 매일 하루 1시간씩은 걷기 운동에 쓴다고 한다. 음식은 개고기 말고는 가리는 것 없이 잘 먹는다. 밤 11시쯤 잠자리에 들어 아침 6시 반에 일어난다. 옛날에는 학생들에게 4시간 이상 자고 성공할 생각 말라는 소리를 자주 했는데, 언젠가 방송에서 8시간 수면이 장수 비결이란 소리를 들은 뒤부터는 안 한다고 한다. 각종 결재 서류는 주로 집에 가져가서 읽고 아침 7시에 비서가 오면 그날 할 일을 지시하고 출근한다고 한다. 여기저기 직함이 많은 탓에 이동이 잦아 사무실보다 차 안이 집무실일 경우가 더 많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한겨레가 만난 사람] 의료·교육 헌신하는 이길여 가천길재단 회장
가천의과대와 경원대가 통합(2012년 예정)을 추진하는 것을 계기로 가천길재단 이길여 회장을 만났다. 두 대학이 합치면 입학정원 기준으로 전국 3위권 규모의 큰 사학이 등장한다. 가천의대 설립자이자 경원대 총장인 이 회장은 그런 통합의 의의를 강조하고 싶어 했고, 기자는 그가 걸어온 ‘역사’가 듣고 싶었다.
의사로서, 사업가로서 이길여 회장의 성공 스토리는 수십년에 걸쳐 계획을 실천한 사업보고서 같다. 1950~60년대만 해도 희귀하던 여의사가 독신의 몸으로 병원사업에 성공해 대형 종합병원을 비롯한 6개의 병원을 세웠다. 병원사업으로 쌓은 부를 바탕으로 의대를 세우고 종합대를 인수했다. 신문사를 사들여 언론사주가 되는가 하면, 2000억원을 투자해 세계적인 뇌과학연구소와 암·당뇨연구소를 세워 나라로부터 과학분야 최고 훈장을 받기도 했다. 문화재단을 만들어 나눔활동에도 열심이다. 반세기에 걸쳐 그가 혼자 힘으로 이룬 부와 명예는 놀랄 만하다. 공자는 ‘부자가 노력해서 되는 것이라면 마부 노릇이라도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겠다’(논어 술이편)고 했다. 공자는 부자가 되는 것은 하늘의 뜻이라고 본 것이다. 길할 길(吉), 계집 녀(女)를 쓰는 이름에 하늘의 뜻이 있었다고 한다면 허황할 뿐이다. 격동기의 자수성가에는 논란이 따르기 마련이지만, 자기 업을 사랑하고, 자기 일에 몰두하여 이만한 규모의 성취를 이뤘다면 그 또한 하늘의 뜻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첫눈으로는 도저히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그를 지난 5일 경원대 총장실에서 만났다. 테이블 한쪽에 쌓인 여러 신문 중에 한겨레신문을 맨 위에 올려놓은 것이 눈에 띄었다. 사업가다운 노련함이라 여기면서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인터뷰/이인우 기획위원 iwlee21@hani.co.kr
전북 옥구(현 군산시 편입)가 고향이더군요. 당시엔 정말 시골인데 거기서 여자아이가 의사가 될 꿈을 꾼 게 놀랍군요.
“의사가 되기로 결심한 계기는 세 가지 정도로 기억합니다. 장티푸스에 걸린 친구 죽음의 충격, 초등학교 시절 군산에 내려와 결핵퇴치 운동을 하던 이영춘 박사에 대한 존경심이 있었구요, 중2 때는 아버지가 폐렴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 뒤로 제 꿈은 단 한번도 의사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꿈만으로 서울의대를 갈 수 있는 건 아닐 텐데요.
“어머니가 훌륭하셨습니다. 집안의 반대가 많았는데, 어머니가 다 막아주셨습니다. 어머니는 평등사상이 강한 분이셨습니다. 일찍이 덕행의 의미를 가르쳐주신 분도 어머니입니다. 우리 집이 그래도 인심을 잃지 않아 거지들이 자주 들렀는데 그때마다 ‘덕을 쌓으면 후세에 받는다. 지금 이게 덕을 쌓는 거다’시며 거지 밥상을 언니와 저에게 들고 가도록 했습니다. 할머니도 대단한 분이셨습니다. 그때 저희 집이 천석까지는 아니더라도 부농 소리를 들었는데 그 재산을 일군 게 할머니입니다. 할머니는 내 자식만큼은 고생시키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와 추진력을 가지신 분이었어요. 억척스레 돈을 모아 여기저기 농토를 사들이는 걸 보고 자랐으니까요. 정말 근면한 분들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생각과 할머니의 이재를 물려받으셨군요. 1958년에 인천에서 첫 병원을 개업했는데 인천을 택한 이유가 있습니까?
“57년 의대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가고 싶었는데 돈이 부족했어요. 어머니가 저 공부시키느라 농토를 많이 팔았거든요. 그래서 당시 논 한필지쯤 했던 비행기 삯을 제 손으로 벌겠다는 생각에 마침 인천에서 개업한 친구한테 간 거지요. 그런데 얼마 후 그 친구가 결혼을 해 대구로 내려가는 바람에 병원을 혼자 맡게 되었습니다. 그게 인천 자성의원이었는데, 10평 남짓한 2층 목조건물이었습니다.”
병원사업 성공…사재 출연해 의료법인 설립
도쿄여자의대 세운 요시오카 ‘롤 모델’ 삼아
“다시 태어나도 여자로, 의사로, 독신으로 살것” 선진의학 공부에 목말랐던 여의사 이길여가 미국 유학을 떠난 것은 그로부터 8년 뒤인 1964년이었다. 미국에서 체험한 선진국의 의료 수준은 정말 하늘과 땅 차이였다. “일회용 주사기 등 의료소모품을 마음껏 사용하는 걸 보니 가난한 우리나라가 생각나 참 가슴이 아팠고, 의사로서 반성도 많이 했습니다.” 유학 시절 결혼의 기회가 찾아오기도 했다. “뉴욕의 교포 청년이 청혼을 했어요. 센트럴파크에서 새벽이슬에 젖도록 춤도 추곤 했는데 막상 청혼을 받고 나니, 왠지 결혼은 내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의사로서 성공하고 싶은 의욕이 여자로서 결혼에 대한 미련을 훨씬 앞질러 가고 있었던 것인지 모른다. 결혼 이야기가 나오니 오히려 유학을 떠나올 때 치맛자락 붙잡고 아쉬워하던 환자들이 생각나 견딜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제 그만 돌아가자. 내가 어떻게 의사가 되었는데, 남자애들 전쟁통에 다 죽을 때 나는 여자라서, 운이 좋아서 의사가 됐으니, 이제 돌아가 그 빚을 갚자….” 그는 1968년 가을, 유학 4년 만에 귀국 비행기에 올랐다. 이길여 산부인과 개원
1969년 37살의 이길여는 자성의원 자리에 지하 1층, 지상 9층의 병원을 짓고 이길여산부인과라고 이름을 붙였다. 인천에서는 처음으로 병원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했다. 계단 오르내리기 힘든 임신부들이 몰려들었다. 얼마 뒤에는 국내 처음으로 초음파 기기를 도입했다. 산모와 가족들에게 아이의 심장 박동 소리를 들려주면 기절할 듯이 좋아했다. 입원비가 없는 환자들에게는 보증금을 받지 않았다. 당시 병원은 진료비를 떼이는 경우가 많아 선불금을 받는 게 관행이었는데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이 관행을 따르지 않았다. ‘보증금 없는 병원’으로 소문이 나자 더욱 환자들이 몰려들었다.
돈 많이 벌었을 것 같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저를 질시해서 그랬는지, 아니, 이길여가 돈 안 받고 진료한다는데 그럼 무슨 돈으로 병원을 짓고 사업을 하냐고. 사실 그때 제가 돈을 많이 벌긴 했어요. 같이 개업했던 친구가 야, 자식도 없는데 뭣하려구 그렇게 악착같이 돈 버느냐고 했을 정도니까요. 그럼 어떻게 벌었느냐? 환자들이 엄청나게 몰려왔어요. 예를 들어 다른 의사가 하루 30명을 본다 치면 저는 그 몇배를 봤으니까요. 치료비 못 내는 환자를 반만 쳐도 다른 의사의 배 이상이었어요. 제가 덕을 쌓은 덕분입니다. 환자에게 정성을 다하고 어려운 사람을 돌봐주니 좋은 소문이 났죠. 병원에 못 와서 그렇지 오기만 하면 다 나아서 돌아가요. 그때는 항생제만 쓰면 백프로 낫던 시절이니 명의가 따로 없어요. 게다가 미국 유학파죠, 여자죠, 친절하죠, 환자들이 제 발로 안 올 수 없어요. 그때 인천의 환자는 제가 다 휩쓸었어요. 진짜예요. 이런 얘긴 나도 처음 하네. 호호.”
그러나 병원사업이 지금처럼 커질 줄은 그때는 몰랐다고 한다. 하다 보니 병원이 커지더라고 했다. “미국에서 보고 온 게 있어선지, 최신 약, 최신 설비가 들어오면 아낌없이 투자하니 병원이 커질 수밖에. 제가 병원사업에 성공한 것은 미국 병원에서 일하며 배운 게 컸다고 생각합니다. 그 경험이 제 안목을 키워주고 스케일을 넓혀주고 선진적인 병원 운영에 일찍 눈을 뜨게 해줬습니다.”
우울증 겪고 간 일본 유학, 세 가지 결심을 하다
의사 이길여가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건 종합병원을 세우면서부터이지요?
“제게도 위기가 없었던 건 아닙니다. 26살 이후 하루 4시간 이상 자본 일 없이 환자들 속에서 살았습니다. 미쳐 살았다는 표현이 맞을 겁니다. 다들 자기 직업에 자부심을 갖겠지만, 저는 누구보다 제가 의사라는 게 너무 만족스러웠습니다. 그런데 74년인가요? 어느 날 고속으로 질주하던 자동차가 바위 앞에 딱 마주선 것 같은 느낌이 왔습니다. 갑자기. 그때가 42살인데, 돌아보니 환자 핑계를 대고 책 한 권 제대로 읽은 게 없었고, 독신을 고집한 적도 없는데 결혼도 못했고… 잠이 안 오더라구요. 나는 뭐냐 싶은 게 허허벌판에 혼자 서 있는 막막함에 휩싸였어요. 나중에 생각하니 그게 우울증이 온 거더라구요. 이대론 안 되겠다 싶은 마음에 일본으로 떠났습니다.”
일본은 참 배울 것이 많았다. 발전된 의료 수준, 친절한 서비스, 전국민의료보험과 무의촌을 없애기 위한 의료정책 등등… 특히 1900년 도쿄여자의과대학을 세운 선각자 요시오카 야요이를 롤 모델로 삼았다. 그리고 세 가지 결심을 한다. 돌아가면 종합병원을 세우자, 무의촌에 병원을 짓자, 좋은 의사를 배출하는 전문교육기관을 세우자…. 그는 그렇게 자기 인생을 중간결산했다.
가천의대와 경원대 통합 ‘10대 사학’ 야심
길병원과 시너지 기대…의학발전 도움될 것
“자선·봉사활동 열심인 건 사회환원의 일환” 여의사 최초의 의료법인 인천길병원 건립 “1977년 귀국하자마자 바로 종합병원 건립 계획에 착수했어요. 그런데 당시 새로 생긴 의료법은 개인이 종합병원급의 의료기관을 운영할 수 없게 했어요. 그래서 많은 병원들이 오히려 의원으로 급을 낮추기도 했지요. 저도 망설였어요. 종합병원을 하려면 법인을 세워야 하고 법인을 세우면 개인 재산을 모두 내놔야 하잖아요? 그때 어머니가 반대를 많이 하셨어요. 넌 남편도 자식도 없는데 재산마저 없으면 나중에 어쩔 거냐고. 하지만 종합병원을 해야겠다는 제 꿈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개인 재산을 모두 출연해 의료법인 인천길병원을 그때 세웠지요. 그게 여의사로서는 최초의 의료법인 설립이었다고 당시 보건사회부 차관이 개원식에 와서 그랬어요.” 인천길병원이 의료법인으로 성공을 거두자 당시 의료취약지 병원 설립을 정책적으로 지원하던 정부는 그에게 부도가 난 양평병원을 맡아주길 바랐다. 막대한 적자가 예상되는 양평병원을 운영해 주는 대가로 원하는 지역에 병원 설립을 허가해주겠다는 조건이었다. 이길여는 정부의 권유를 받아들여 1982년 양평병원을 인수했고 1987년 인천 구월동에 대형 종합병원인 중앙길병원을 설립했다. 병원은 뛰어난 입지조건과 첨단 의료설비 도입, 국내 첫 병원 전산화 등으로 대성공을 거둬 개원 불과 1년 만에 병상을 500개에서 1000개로 늘리게 됐다. 병원 수익도 수익이지만, 인천 지역 4개 공단 모두에서 접근이 쉬운데다 향후 도시발전 가능성이 큰 곳에 병원 부지를 받아낸 ‘사업 감각’이 큰 몫을 했음은 물론이다. 교육사업 진출, 가천의대 건립, 경원대 인수 “병원 운영을 하면서도 교육사업에 대한 구상도 늘 했어요. 대학을 지을 생각으로 영종도에 땅을 사기도 했는데, 그만 그린벨트에 묶여 쓰지 못하게 된 적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1994년에 경영난에 허덕이던 경기간호전문대와 신명여고를 인수하면서 본격적으로 교육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정부가 수도권 지역에 의대 설립을 허가해 줄 때 저도 어렵사리 인가를 받아 1998년 가천의대 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그해 당시 경원대 최원영 이사장으로부터 학교 부채를 떠안는 조건으로 학교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게 되었습니다.”가천의대와 경원대가 통합하면 외형은 아주 큰 대학이 될 텐데요.
“입학 정원 규모로 세번째 큰 학교가 된다고 합디다. 두 대학이 합치면 엄청난 시너지를 낼 것입니다. 특히 의과학 분야는 길병원의 의료시설과 세계적인 수준의 연구소인 뇌과학연구소와 암·당뇨연구소 등이 연계돼 대학의 성장은 물론 우리나라 의학 발전에 큰 역할을 할 것입니다. 최단시일 안에 국내 ‘10대 사학’으로 도약한다는 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다시 태어나도 여자, 의사, 독신으로
가천학원의 교육이념에 박애, 봉사와 함께 애국이 들어 있더군요.
“제가 교훈에 애국을 넣자, 처음엔 이길여가 정치하려고 그런다고 수군댔어요. 학생들은 학생들대로 촌스럽다고 하고. 그러면 제가 설명해요. 제가 겪은 우리 현대사를. 그러면 왜 제가 의사 교육에 애국심이 필요하다고 하는지를 수긍합니다.”
결혼 안 한 거 후회해 본 적은 없나요?
“우리 병원 간호사가 1200명 정도 되는데 싱글들이 저처럼 결혼 안 한다고 할 때 제가 그래요. 무슨 소리냐, 결혼해서 애 낳고 기르는 게 애국이고 사람의 도리다, 결혼은 꼭 해야 한다 그럽니다. 그렇지만 저는 다시 태어나도 여자로 태어나고 싶고, 다시 태어나도 의사가 될 것이고, 다시 태어나도 결혼 안할 것이야, 제 속으로는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전 재산은 가천 가족과 사회의 것
나눔운동에도 열심이신데.
“그동안 제가 이룩한 재산은 모두 법인화했으니 사실상 다 사회에 환원한 겁니다. 앞으로 또 재산이 생긴다면 그 또한 다 재단의 것이 될 겁니다. 저는 물려줄 자식도, 남편도 없잖아요? 재산이란 게 다 가천 가족들과 이웃들, 환자들에게 나온 것이니, 그들에게 다시 돌아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자선이나 봉사활동도 다 그런 환원의 일환이지요.”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지금 우리 가천길재단은 산봉우리를 향해 올라가고 있습니다. 어떤 지점을 향해 가면 완성이다, 이런 거 없이 영원히 가는 겁니다. 지금 굉장히 가파른 산을 올라가고 있어요. 제가 가다 못 가면, 제 뒤를 이어 누군가 가고. 그렇게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늘 이야기합니다.”
도쿄여자의대 세운 요시오카 ‘롤 모델’ 삼아
“다시 태어나도 여자로, 의사로, 독신으로 살것” 선진의학 공부에 목말랐던 여의사 이길여가 미국 유학을 떠난 것은 그로부터 8년 뒤인 1964년이었다. 미국에서 체험한 선진국의 의료 수준은 정말 하늘과 땅 차이였다. “일회용 주사기 등 의료소모품을 마음껏 사용하는 걸 보니 가난한 우리나라가 생각나 참 가슴이 아팠고, 의사로서 반성도 많이 했습니다.” 유학 시절 결혼의 기회가 찾아오기도 했다. “뉴욕의 교포 청년이 청혼을 했어요. 센트럴파크에서 새벽이슬에 젖도록 춤도 추곤 했는데 막상 청혼을 받고 나니, 왠지 결혼은 내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의사로서 성공하고 싶은 의욕이 여자로서 결혼에 대한 미련을 훨씬 앞질러 가고 있었던 것인지 모른다. 결혼 이야기가 나오니 오히려 유학을 떠나올 때 치맛자락 붙잡고 아쉬워하던 환자들이 생각나 견딜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제 그만 돌아가자. 내가 어떻게 의사가 되었는데, 남자애들 전쟁통에 다 죽을 때 나는 여자라서, 운이 좋아서 의사가 됐으니, 이제 돌아가 그 빚을 갚자….” 그는 1968년 가을, 유학 4년 만에 귀국 비행기에 올랐다. 이길여 산부인과 개원
이길여 총장이 오는 15일 문을 여는 경원대 신축교사인 ‘비전타워’ 앞에서 학생들과 자세를 취했다. 경원대 제공
길병원과 시너지 기대…의학발전 도움될 것
“자선·봉사활동 열심인 건 사회환원의 일환” 여의사 최초의 의료법인 인천길병원 건립 “1977년 귀국하자마자 바로 종합병원 건립 계획에 착수했어요. 그런데 당시 새로 생긴 의료법은 개인이 종합병원급의 의료기관을 운영할 수 없게 했어요. 그래서 많은 병원들이 오히려 의원으로 급을 낮추기도 했지요. 저도 망설였어요. 종합병원을 하려면 법인을 세워야 하고 법인을 세우면 개인 재산을 모두 내놔야 하잖아요? 그때 어머니가 반대를 많이 하셨어요. 넌 남편도 자식도 없는데 재산마저 없으면 나중에 어쩔 거냐고. 하지만 종합병원을 해야겠다는 제 꿈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개인 재산을 모두 출연해 의료법인 인천길병원을 그때 세웠지요. 그게 여의사로서는 최초의 의료법인 설립이었다고 당시 보건사회부 차관이 개원식에 와서 그랬어요.” 인천길병원이 의료법인으로 성공을 거두자 당시 의료취약지 병원 설립을 정책적으로 지원하던 정부는 그에게 부도가 난 양평병원을 맡아주길 바랐다. 막대한 적자가 예상되는 양평병원을 운영해 주는 대가로 원하는 지역에 병원 설립을 허가해주겠다는 조건이었다. 이길여는 정부의 권유를 받아들여 1982년 양평병원을 인수했고 1987년 인천 구월동에 대형 종합병원인 중앙길병원을 설립했다. 병원은 뛰어난 입지조건과 첨단 의료설비 도입, 국내 첫 병원 전산화 등으로 대성공을 거둬 개원 불과 1년 만에 병상을 500개에서 1000개로 늘리게 됐다. 병원 수익도 수익이지만, 인천 지역 4개 공단 모두에서 접근이 쉬운데다 향후 도시발전 가능성이 큰 곳에 병원 부지를 받아낸 ‘사업 감각’이 큰 몫을 했음은 물론이다. 교육사업 진출, 가천의대 건립, 경원대 인수 “병원 운영을 하면서도 교육사업에 대한 구상도 늘 했어요. 대학을 지을 생각으로 영종도에 땅을 사기도 했는데, 그만 그린벨트에 묶여 쓰지 못하게 된 적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1994년에 경영난에 허덕이던 경기간호전문대와 신명여고를 인수하면서 본격적으로 교육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정부가 수도권 지역에 의대 설립을 허가해 줄 때 저도 어렵사리 인가를 받아 1998년 가천의대 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그해 당시 경원대 최원영 이사장으로부터 학교 부채를 떠안는 조건으로 학교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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