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규섭 국립서울병원장은 “자살하는 사람들은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유서를 남긴다.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에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자살 예방에 큰 도움이 된다. 우리 사회에 ‘터놓고 이야기합시다’라는 제목의 캠페인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한겨레가 만난 사람] 하규섭 국립서울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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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교수 자리 놔두고 병원장 맡아 -최근 중고생의 잇따른 자살 사건이 있었다. 노인 자살률 1위에서 이제는 청소년 사망률까지 높아지는 것인가? “다른 나라에 견줘 청소년 자살률이 아주 높은 편은 아니다. 문제는 증가폭이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 빠른 속도로 늘고 있다. 이유는 많겠지만 단순하게 말하면 청소년에게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경쟁을 강요당하는 청소년들이 쌓인 스트레스를 풀지 못하고 주변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1970~80년대에는 못살았지만 그래도 청소년에게는 미래가 있었다. 대학만 가면 연애도 하고 자유를 갖는다는 꿈이 있었다. 그리고 공부도 지금처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청소년은 대학을 가면 뭐하나? 대학을 졸업하면 취직이 되나, 결혼이나 출산을 할 수 있나? 어른들만 이런 사실을 아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자기 아이들만 챙기도록 강요받은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편가르고 지내도록 가르친다. ‘왕따’는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가르친 것이다.” -학교폭력, 왕따 문화에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처벌 강화로 풀릴 문제가 아니다. 원인을 제대로 알고 대처해야지 처벌한다고 해서 예방이 되는 것은 아니다. 부모가 책임져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는데 이것도 쉽지 않다. 요즘 우리 사회는 맞벌이 아니면 한 가정이 제대로 살기 어렵다. 부모가 새벽에 나가서 밤늦게 들어오는데 가정교육이 제대로 될 리 없다. 학교도 예전과 달리 인성을 배우는 곳이 아니다. 부모도 교사도 성적에만 관심을 갖는다. 학교는 매일 가야만 하는 곳이고 공부만 해야 하는 곳이다. 마음이 아파도 고민이 있어도 터놓을 사람이 없다. 예전에는 친구들이 어울려 다닐 시간이 있었고 그 공동체 안에서 서로 고민을 해결해 가기도 했는데, 이제는 학교와 학원을 쳇바퀴 돌듯 다닐 뿐이다. 우리 사회는 문제가 안 생기면 이상할 만큼 학생을 가둬놓고 있다. 학교에 전문 상담인력을 한명씩이라도 배정하는 노력이 절실하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경쟁은 필수적이지 않나? “국민소득이 지금보다 2배쯤 됐는데, 자살하는 사람이 많은 사회가 행복한가? 그리고 국민소득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도 경쟁에서 뒤처진 사람, 늦게 혹은 덜 적응한 사람을 보듬어 안고 가야 한다. 학생들 성적으로 설명해 보자. 여러 과목이 있는데 100점 맞은 과목이 두 개고, 90점 맞은 과목이 한 개, 나머지는 70~80점이라고 하자. 90~100점은 이미 궤도에 올라와 있어 그리 신경쓰지 않아도 유지된다. 전체 평균을 올리려면 70~80점짜리 과목에 역점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경쟁에서 뒤처진 사람이 2000만명쯤 된다고 치자. 이들을 놔두고 국민소득이 지금보다 2배로 올라가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보면 된다. 또 하나, 한 사람이 대학을 졸업해 성인으로 자라나는 데 2억원가량이 든다고 한다. 그런데 한 해 1만5000명이 죽는다. 단순 계산으로도 해마다 3조원을 손해본다.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면 한 템포 늦춰 간다고 굶어죽는 사회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규섭 국립서울병원장
살아서 하고픈 말 하도록 기회 줘야 -우리 사회에서 자살이 심각한 문제가 된 역사가 그리 길지는 않은 것 같다. “1995년만 해도 인구 10만명당 자살률은 10명가량이었다. 그 이전에는 자살에 사회적 관심조차 없었다. 문제는 외환위기다. 외환위기 뒤 18명가량으로 늘었고 그 이후 계속 늘어나 2000년대 후반에 30명을 돌파했다. 자살이 사회적 문제로 떠오른 역사가 15년가량이다. 한국자살예방협회가 2003년에 생겼다. 자살의 중요한 원인은 스트레스다. 스트레스는 안정되지 못하고 변화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생긴다. 그런데 외환위기 뒤 얼마나 많은 변화가 있었나? 한창 일해야 하고 가족 부양도 힘든 40~50대가 직장에서 쫓겨났다. 남은 사람은 소득은 늘어났을지 모르지만 쫓겨나간 사람 몫까지 일을 해야 했다. 성공한 사람도 실패한 사람도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린 것이다. 그 상처가 10년 이상 지속된 것이다.” -‘격차 사회’나 ‘불평등 사회’를 바꿔야겠지만 당장 해결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래도 자살을 방치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 자살 예방을 위해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자살하는 사람들의 상당수는 유서를 쓴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왜 살아생전에 이를 다른 사람과 나누지 않고 죽은 다음에 다른 사람들이 보게 하느냐? 쉽게 말해 소통의 문제다. 예전처럼 가족 구성원이 많아서 부모가 바쁘더라도 형이나 누나, 할아버지나 할머니, 삼촌이나 고모가 고민과 아픔을 들어주는 것도 아니고 마을 공동체도 사라졌다. 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사람이 없다는 말이다. 지금 당장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것은 소통, 즉 ‘터놓고 삽시다’ 캠페인이다. 학교폭력이나 왕따 그리고 청소년 자살, 더 이상 쉬쉬해서는 안 된다. 가정이나 학교, 보건당국도 솔직하게 터놓고 이야기해야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고 서로 대책을 고민한다.” -자살도 전염되나? 언론 보도 때문에 자살이 늘어난다는 비판도 많다. “유명 연예인이 자살할 때 압박붕대를 써서 목을 맸다고 쓰면 같은 방법으로 자살하는 사람이 크게 늘어난다. 당시 20~30대 여성의 자살이 큰 폭으로 늘어났는데, 대부분 그 방법을 썼다. 학생들의 경우에도 ‘대구에서 성적 비관 자살’ 이렇게 쓰면, ‘성적이 나쁘면 자살해야 하는구나’ 이렇게 생각한다. 학생들은 특히나 배우는 시기라 자살 방법도 언론에서 그리고 인터넷에서 배운다. 자살 유가족이 자살을 시도하는 이유는 ‘나도 그때 죽었어야 했는데’라는 생각을 항상 하고 있는데, 언론에서 이유를 만들어 준다. 핀란드 언론은 유명인이 자살하면 그냥 ‘유명인 사망’이라고 기사를 쓴다. 이유도 쓰지 않고 그 사람이 죽었다는 것만 쓴다. 그렇게 (보도 태도가) 바뀐 뒤 자살률이 줄었다.” 학교폭력·왕따 등 문제 감추면 안돼
가정·학교·보건당국 함께 대책 내야 -자살예방협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성과를 꼽는다면? “자살 유가족, 자살 시도자 등 자살 고위험군에 대한 예방 관리 사업을 시작했다. 또 한국형 자살예방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 보급했다. 아울러 농가에서 가장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자살 도구인 농약 관리 사업을 했는데, 2011년 맹독성 농약의 생산 및 판매 중지가 결정됐다. 경기·충청·강원 지역 700여곳의 농가에는 농약안전보관함을 보급해 농약 자살 예방에 효과적이라는 평가를 들었다.” -서울대 교수 자리를 놔두고 굳이 국립서울병원장을 맡은 이유는? “정신병원이라고 하면 다 싫어한다. 주민들의 반대, 이해한다. 다행히 이 병원은 주민들과의 사회적 합의를 거쳐 환자도 진료하지만 늦어도 2015년에는 정신건강연구원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우리나라는 1980년대까지 정신질환자를 산 좋고 물 좋은 데에 두고 격리하기에 바빴다. 90년대에 병원이 아닌 지역사회에서 같이 생활하도록 돕자는 말이 나왔다. 그런데 이제는 온 국민이 치유의 대상이 됐다. 남들이 100~200년씩 걸려서 하던 성장을 우리는 50년 만에 해냈다. 너무 빠른 변화에 온 국민이 스트레스를 받은 것이다. 이들을 모두 병원에서 치료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자살 가능성이 높은 많은 우울증 환자들은 아예 병원을 찾지도 않는다. 내가 아무리 뛰어난 우울증 및 조울병 전문가라도 한계가 너무 많다. 이제는 국민들이 행복할 수 있는 정신건강 치료가 필요하다. 의사만 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정신건강연구원은 자살 위기에 처한 사람부터 가벼운 우울증을 앓는 모든 사람들의 정신건강을 향상시키는 프로그램과 정책을 만드는 구실을 한다. 국민의 정신건강과 행복을 위해 작은 디딤돌이라도 놓았으면 좋겠다.”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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