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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의료·건강

시민 1만명의 기부로 태어난 ‘기적의 병원’

등록 2016-05-20 20:46수정 2016-05-22 10:27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가 19일 오전 서울 마포구 상암동 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 1층 벽에 설치된 기부벽 앞에 서 있다. 여기에는 병원 설립에 참여한 1만여명의 기부자 이름이 새겨져 있다. 지상 7층, 지하 3층의 이 병원은 지난달 28일 문을 열어 매일 500명의 장애 어린이를 전문적으로 치료하게 된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가 19일 오전 서울 마포구 상암동 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 1층 벽에 설치된 기부벽 앞에 서 있다. 여기에는 병원 설립에 참여한 1만여명의 기부자 이름이 새겨져 있다. 지상 7층, 지하 3층의 이 병원은 지난달 28일 문을 열어 매일 500명의 장애 어린이를 전문적으로 치료하게 된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르포
푸르메 어린이재활병원
1층에는 어린이도서관이 가장 널찍하게 자리하고 있다. 도서관은 쾌적한 마룻바닥으로 돼 있다. 지난 16일 오후 기자가 찾았을 때 바닥에 엎드리거나 누워서 책을 읽는 아이들을 볼 수 있었다. 1층 로비 한켠에는 카페를 겸한 빵집(행복한 베이커리)도 있다. 지하 1층에는 수영장과 문화센터가 들어섰다. 복합문화시설 같은 이곳은 지난달 28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에 문을 연 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이하 푸르메 어린이재활병원)이다.

그러나 이 병원이 진짜로 특별한 이유는 따로 있다. 병원 건립이 시민 1만여명의 기부를 중심으로 이뤄졌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 때문에 ‘기적의 병원’으로 불린다. 모든 기적이 그렇겠지만, 기적은 저절로 일어나지 않는다. 푸르메 어린이재활병원의 탄생은 푸르메재단(명예이사장 김성수, 이사장 강지원)의 백경학(53) 상임이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2005년 재단 창립 때부터 상임이사를 맡은 그는 마침내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

기자로 활약했던 그의 인생 행로가 바뀐 것은 1998년 6월에 일어난 교통사고 때문이었다. 2년간 독일 뮌헨대학에서의 연수가 끝나갈 무렵 그는 부인 황혜경(51)씨와 4살배기 딸을 데리고 영국으로 가족여행을 떠났다.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와 글래스고를 둘러본 뒤 런던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작은 도시 칼라일 부근을 지날 때 딸이 잠시 볼일을 보겠다고 해서 차를 시야가 확 트인 직선 오르막의 갓길에 세웠다. 부인이 딸의 옷을 찾기 위해 트렁크 속 짐을 뒤지는 순간 승용차 한 대가 갑자기 뒤에서 꽝 하고 덮쳤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운전자는 두통약을 너무 많이 복용한 상태였다. 이 사고로 황씨는 칼라일 병원에서 세 달 넘게 혼수상태로 있었다. 출혈로 절단한 왼쪽 다리가 감염되는 바람에 두 번 더 자르는 등 말 그대로 생사를 넘나들었다. 황씨는 기적적으로 깨어난 뒤 뮌헨으로 돌아가서 1년반 동안 고통스러운 재활치료를 받았다. 처음에는 손가락조차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으나, 1999년 말 귀국 때는 자기 힘으로 휠체어를 굴릴 수 있을 정도가 됐다.

독일 의료진의 권유대로 백 이사와 황씨는 귀국 직후 재활치료를 위해 당시 시설이 가장 좋다는 유명 대학병원을 찾았다. 그러나 대기자가 많아 입원조차 쉽지 않았다. 겨우 병실을 구하고 치료를 받았지만, 철저하게 환자 중심으로 운영되던 영국과 독일 병원과 비교해 모든 게 너무 열악했다. 그때 경험이 재활병원 건설의 꿈으로 이어졌다. 지난 16일 푸르메 어린이재활병원 사무실에서 백 이사를 만났다.

종잣돈 마련 위해 사표 내고 맥줏집 오픈

-푸르메재단을 만든 지 11년 만에 재활병원 건립이라는 목표를 이뤘다. 소감은?

“재활치료를 받던 어느 날 아내에게 ‘환자의 부름에 늘 응답하고, 환자를 인격체로 대하는 작고 아름다운 재활병원을 우리가 하나 만들자’고 했더니 아내도 그러자고 좋아했다. 그 말이 씨가 돼서 여기까지 왔다.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가능했다. 세상이 어렵고 힘들지만, 1만명이나 되는 기부자들이 마음을 열어준 덕분이다. 그런 면에서 한국은 아직 가능성이 있는 사회라고 생각한다. 선한 의지를 알리고 한눈팔지 않고 한길로 가면 길이 보이고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 것 같다.”

-아내와의 약속을 막상 실행에 옮기려고 했을 때는 막막했을 것 같은데?

“재단 만들 종잣돈을 마련하기 위해 수제맥주 가게인 옥토버훼스트를 시작할 때는 걱정이 많았다. 살아오면서 사업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기에 아내도 말렸다. 그러나 도전하지 않으면 뜻을 이룰 수 없다는 생각에서 아내한테 알리지도 않고 2001년 말에 사표를 냈다. 다행히 옥토버훼스트는 운좋게 빨리 자리를 잡았고, 2년 뒤 비영리재단 설립 준비를 할 수 있었다.”

-병원이 완공됐을 때 부인 반응은 어땠나?

“만들지 못할 줄 알았는데 됐다면서 이제 자기 꿈을 이뤘다고 하더라. 개원식 전날 집에서 둘이 맥주 한잔을 했는데 ‘살다 보니 이런 날도 맞는구나’고 감회에 젖었다. 그동안은 내가 불안하고 못 미더웠는데 이제부터는 뭘 하든 믿겠다고 하더라.(웃음)”

병원 설립의 모태인 푸르메재단의 출범은 황씨의 도움과 결단이 결정적이었다. 백씨의 옥토버훼스트 지분(2억원)과 황씨가 영국의 가해자 쪽 보험회사로부터 전동 휠체어 등 보조장비 구입비로 받은 1억원 등 총 3억원을 재원으로 2005년 3월 재단 설립증을 겨우 받았다. 하지만 기본재산을 최소 10억원 이상으로 채운다는 조건부 승인이었다. 이에 황씨는 영국 보험회사와의 8년에 걸친 지루한 줄다리기 끝에 이듬해 받은 약 20억원의 보상금에서 세금 등 비용을 제한 뒤 절반에 해당하는 9억원을 재단에 내놓았다. 이로써 재단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황씨는 당시 <동아일보>와 한 인터뷰(2006년 6월7일치)에서 “(보상금을) 단 한번도 내 돈이라고 여긴 적이 없어요. 어차피 가해 차량이 보험에 안 들었으면 못 받는 돈이잖아요. 저 같은 장애인들을 위해 쓰라고 하느님이 주신 돈이라고 생각해요”라고 밝혔다. 하지만 황씨는 지난달 28일 열린 병원 개원식에 나타나지 않았다. 평소처럼 경기도 일산 자택에서 걷기 운동과 독서로 시간을 보냈다. 왜 그랬냐고 19일 물었더니 “병원 짓느라 애쓰신 분들과 귀한 손님들이 많이 오시는데 휠체어 탄 제가 가면 오히려 여러 사람을 번거롭게 할 것 같아서 그랬다”고 답했다.

-그동안 가장 큰 어려움은 뭐였나?

“재단 설립이 가장 힘들었다. 복지부의 담당 공무원은 골치 아프니까 웬만하면 안 내주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병원을 지으려면 수백억원의 돈과 땅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가 가진 현금은 1억원에 불과했다. 앞으로 기금을 모으겠다고 했더니 그건 당신의 희망사항일 뿐이라고 반박하더라. 그런 사례가 없으니 믿기 힘들었을 것이다. 서른 번 정도 찾아가서 애원하고 설득하고 화도 냈다. 인허가권을 가진 공무원의 힘이 얼마나 센지 그때 피부로 느꼈다.”

-모금도 쉽지 않았을 텐데.

“장애인에 관심없다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국가가 할 일을 왜 당신이 하느냐면서 외면하기도 했다. 그러나 푸르메재단의 설립 동기와 취지가 알려지고, 2007년 문을 연 장애인 전용 치과에서 치료받은 사람들이 감동적인 기부를 하면서부터 많은 분들이 호응했다.”

98년 영국 여행 중 부인 교통사고
환자 중심의 재활병원 설립 꿈
보상금 10억원 등으로 재단 설립
가수 션 ‘1만원의 기적’ 캠페인
넥슨 회장 등 기업인도 기부 동참

91개 병상에 매일 500명 치료
어린이치료 일손 많고 수가 낮아
연간 37억원 정도 적자 예상돼
“국가 대신 시민이 만든 병원
이제 정부가 화답할 차례”

성예삐(가명·3) 어린이가 19일 오전 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에서 작업치료사로부터 작업치료를 받고 있다. 성 어린이의 아버지는 “새로 지어진 병원이다 보니 시설이 좋은 것 같고, 실력 있는 치료사 선생님들이 계신다고 해서 기대되는 부분도 많다”고 말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성예삐(가명·3) 어린이가 19일 오전 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에서 작업치료사로부터 작업치료를 받고 있다. 성 어린이의 아버지는 “새로 지어진 병원이다 보니 시설이 좋은 것 같고, 실력 있는 치료사 선생님들이 계신다고 해서 기대되는 부분도 많다”고 말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마포구청 지원으로 땅 확보

벤처기업가인 이철재(47)씨와 김정주(48) 넥슨컴퍼니 회장의 도움이 컸다. 미국 유학 중 교통사고로 척수 장애인이 된 이씨는 우연히 푸르메재단을 알게 된 뒤 매달 50만원씩 기부를 시작했다. 2012년 백 이사를 만나서 자세한 사연을 들은 그는 자신이 창업한 회사(쿼드디멘션스)를 대기업에 판 자금 가운데 10억원을 선뜻 내놓았다. 이 돈으로 푸르메재단은 서울 종로구 신교동의 ‘푸르메재활센터’를 성공리에 완공할 수 있었다. 이씨의 뜻깊은 기부는 또다른 선행을 불러왔다. 이씨 회사를 인수한 김정주 넥슨 회장은 우연히 이씨의 기부 소식을 신문에서 읽었다. 전후 사정을 알게 된 김 회장은 푸르메 어린이재활병원 건립 자금 400억원 가운데 부족한 200억원을 흔쾌히 기부했다.

땅 문제도 때마침 풀렸다. 백 이사는 에스에이치(SH)공사가 서울 상암동의 땅 1000평을 팔려고 내놓았다는 얘기를 듣고, 우선 매입권을 가지고 있는 마포구청을 찾아갔다. 박홍섭 구청장에게 우리나라에 없는 어린이 재활병원과 지역 주민이 이용할 수 있는 문화시설을 함께 짓자고 간곡하게 설득해 승낙을 얻었다. 이후부터는 모든 게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서울시는 건축비 일부와 의료 장비를 지원했고 보건복지부도 기자재 일부를 보탰다.

-모금 과정에는 가수 션(본명 노승환)씨가 큰 기여를 했다는데.

“초대 홍보대사로 일했던 이지선씨가 유학을 가면서 가수 션씨를 추천했다. 바쁜 일정 속에도 어렵게 홍보대사를 맡은 션씨는 누구보다도 더 헌신적으로 일했다. 그는 2012년부터 매일 1만원씩 기부하는 ‘1만원의 기적’ 캠페인을 시작해서 3700명을 참가시켰다. 매일 1000원씩 연간 36만원을 모으는 ‘1천원의 기적’ 운동에는 1200명의 동참을 끌어냈다. 또 기부금을 모으기 위해 지금까지 60개 이상의 마라톤과 철인3종 경기에 출전했다. 이 때문에 발톱이 세 개나 빠졌다. 그런데도 부인 정혜영씨는 ‘당신 뒤에는 장애 어린이 30만명이 기다리고 있으니 계속 뛰어라’고 독려했다. 이렇게 해서 션씨가 개인 돈 6억원을 포함해 그동안 모두 30억원을 모았다.”

-처음부터 어린이 재활병원을 준비했었나?

“원래는 성인 재활병원을 구상했다. 그런데 노무현 정부 들어 5군데의 권역별 재활병원이 만들어져서 성인은 어느 정도 수용이 가능해졌다. 하지만 어린이재활병원은 오히려 축소됐다. 전국에 두 개가 있다가 적자를 감당 못해 한 곳은 문 닫고 한 곳은 규모를 줄였다. 만 18살 이하의 어린이 및 청소년 장애인은 등록된 숫자만 해도 9만명이고, 실제로는 30만명 정도로 추정된다. 제일 급한 게 어린이를 위한 재활병원이어서 방향을 틀었다.”

푸르메 어린이재활병원은 지상 7층, 지하 3층 건물에 입원 병실이 91개이다. 재활의학과를 비롯한 정신건강의학과, 치과, 소아청소년과 등 4개 진료과를 갖췄다. 하루 500여명, 연간 15만명의 장애 어린이들이 물리치료를 비롯해 음악, 언어, 놀이 등 각종 맞춤 치료를 받게 된다. 가난한 사람들도 치료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독일, 예산으로 어린이병원 140개 운영

-병원 운영은 꽤 어려울 것 같은데.

“재활치료는 사람 손이 많이 가는 데 비해 의료보험 수가가 낮아 어느 병원이든 적자가 난다. 성인에 비해 어린이는 일대일로 치료해야 하기에 더 심하다. 우리 병원은 연간 30억원에서 37억원 정도의 적자가 예상된다.”

-어떻게 해결하려고 하는가?

“아이디어를 얻으려고 독일의 어린이 전문병원인 회엔리트병원장을 만났을 때 적자를 어떻게 메우느냐고 물었더니 나라가 할 일인데 그걸 왜 당신이 걱정하느냐고 의아해하더라. 독일은 어린이병원이 140개 있지만, 병원은 환자 치료에만 집중하면 된다. 부족한 운영비는 나라에서 지원한다. 우리나라는 너희는 민간병원이니까 알아서 하라는 식이다. 서울시에서 연간 9억원의 운영자금을 지원하기로 했지만, 정부는 전례가 없다면서 안 된다는 말만 하고 있다. 민간이어서 지원을 못한다면 국가가 직접 이런 병원을 진즉에 만들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앞으로 계획이나 바람이 있다면?

“시민들의 힘으로 병원이 만들어졌으니 앞으로 잘 운영하는 것이다. 그러자면 이제 단체장이나 중앙정부에서 화답할 차례다. 우리가 좋은 모델이 돼서 다른 지역에도 최소한 두세 개 이런 병원이 생겼으면 좋겠다. 그러면 지방에서 서울로 치료받으러 오는 불편을 없앨 수 있다. 실제로 대전 지역에서는 장애아 부모들을 중심으로 이런 병원을 짓자는 움직임이 있다.”

인터뷰를 마치고 퇴근길 버스를 타려는 그의 어깨가 단단해 보였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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