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세종시 정부세종청사 고용노동부에서 열린 ‘중대재해처벌법 시행령 의견수렴을 위한 토론회'에서 권기섭 고용노동부 산업안전보건본부장(오른쪽 두번째)이 인사말하고 있다. 연합뉴스
고용노동부가 지난달 중대재해처벌법 시행령 입법예고안을 내놓기에 앞서 정부의 정책 연구용역을 수행한 의학자들이 중대 산업재해로 볼 수 있는 직업성 질병에 뇌·심혈관질환과 직업성암 등을 포함하는 의견을 제출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가 이런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에 대해 노동계의 반발은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보건의료와 노동·법률 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중대재해네트워크’는 19일 온라인 기자회견을 열어 최근 노동부가 시행령 제정을 위해 대한직업환경의학회에 발주한 ‘중대재해처벌법상 직업성 질병의 범위’ 연구용역 보고서를 일부 요약해 공개했다. 중대재해네트워크는 인도주의실천의사협회와 노동환경건강연구소,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노동위원회 등으로 구성돼 있다. 앞서 중대재해처벌법은 중대재해로 볼 수 있는 직업성 질병의 종류를 시행령에 위임했는데, 노동부는 이 범위를 구체화하기 위해 전문가들에게 연구용역을 맡겼다.
연구용역 보고서 요약본을 보면 연구진은 중대재해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재해자 질병의 중대성 △사업주의 예방 가능성 △사업주 책임과의 인과관계 명확성 등을 제시한 뒤 기존의 직업성 질병 목록(산업재해보상법 시행령 별표 3) 가운데 이런 요건을 충족하는 질환들을 구체적으로 소개했다. 예를 들어 과로 질병으로 알려져 있는 뇌·심혈관계 질환 중엔 뇌경색, 심근경색증, 지주막하출혈 등이 중대재해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또 직업성 암 가운덴 폐암과 석면으로 인한 난소암, 피부암, 골수성백혈병 등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노동부는 급성중독을 제외하고 연구진이 제안한 대부분의 질환을 중대재해에서 제외했다.
노동부의 연구용역에 참여한 이진우 직업환경전문의는 이날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뇌·심혈관계 질환 등을 포함한 여러 직업성 질환은 사업주 책임에 따른 중대재해로 볼 수 있는 경우가 있어 그 판단 기준을 제시하고 예시도 구체적으로 제공했지만 노동부는 이 가운데 급성중독과 일부 피부질환 등만 수용했다”며 “정부가 중대재해에 해당하는 직업성 질병을 협소하게 발표한 것은 유감”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정부는 사업주 과실과 직접적 인과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질병을 추린 결과라고 설명했다. 김규석 산재예방보상정책국장은 “연구용역을 그대로 따르지는 않았지만 이를 토대로 전문가와 이해관계자, 수사를 한 경험이 있는 검사 출신 전문가 등의 의견을 충분히 듣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노동부가 연구용역을 발주했더라도 그 내용을 반드시 따를 의무는 없고 다른 이들의 의견을 함께 수렴해 이런 결정을 내렸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노동계는 중대재해처벌법상 중대재해로 규정되는 직업성 질환자가 발생해도 사업주가 예방을 소홀히 했다거나 사업주 과실이 있는 등 관련 요건을 충족해야 사업주 처벌이 가능한데, 아예 직업성 질환 범위를 좁게 설정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반발한다.
물론 정부가 뇌심혈관계 질환 등을 중대재해로 볼 수 있는 직업성 질환에 포함하지 않더라도 중대재해처벌법 적용에서 완전히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해당 질환의 발생만으론 중대재해로 분류되지 않지만 그로 인해 사망할 경우엔 중대재해로 분류되며, 사업주 책임이 있느냐에 따라 처벌도 가능하다. 하지만 ‘질병이면 중대재해가 아니고 사망이면 맞느냐’는 지적은 노동계와 경영계 모두에서 나온다.
중대재해법 시행령에 대한 의견 수렴은 오는 23일까지지만 정부는 앞서 발표한 직업성 질병 중대재해 목록을 크게 바꾸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김 국장은 “정부 안이 완벽한 것은 아닐 것이고 아쉬움이 있을 수 있는데 시행령은 언제든 바꿀 수 있으니 현재 정도에서 출발하고 (추후에) 여러 입장을 보완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신다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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