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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노동

ILO 가입 31년 지났지만, ‘노동 후진국’ 오명 여전 [역사 속 오늘]

등록 2022-12-09 15:47수정 2022-12-09 18:49

31년 전 오늘 1991년 12월9일
한국, 국제노동기구 정식 가입
단결권·남녀고용평등권 등 협약
국제 기준에 맞지 않아 비난 사
국제노동기구 아시아지역 노조담당이 1991년 10월17일 전노협 사무실을 방문해 단병호 의장 등으로부터 당국의 노동운동 탄압사례 등을 청취하는 모습. <한겨레> 자료 사진
국제노동기구 아시아지역 노조담당이 1991년 10월17일 전노협 사무실을 방문해 단병호 의장 등으로부터 당국의 노동운동 탄압사례 등을 청취하는 모습. <한겨레> 자료 사진

“(중략) 체약 당사국들은 정의 및 인도주의와 세계의 항구적 평화를 확보하고자 하는 염원에서 이 전문에 규정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다음의 국제노동기구헌장에 동의한다.”

오늘로부터 31년 전, 1991년 12월9일은 우리나라가 국제노동기구(ILO)에 정식 가입한 날입니다. 한국은 당시 이상옥 외무부 장관 명의의 헌장 수락 서한을 국제노동기구 사무국장에게 전달함으로써 152번째 회원국이 되었습니다. 이날 가입은 국제노동기구의 규약에 따라 회원국으로써의 책임과 의무를 갖게 된다는 점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노동자의 최소한의 권리 보장에 대한 기대에도 불구하고 국제노동기구 협약은 3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제대로 이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위법성 여부를 두고 당사자인 노사와 정부 사이에 해석이 엇갈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는 사이 한국은 국제사회로부터 ‘노동 후진국’이라는 오명을 살 수 있다는 우려가 여러 차례 나오기도 했습니다. 국제노동기구 핵심협약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던 결정적 장면을 당시 보도를 통해 다시 짚었습니다.

&lt;한겨레&gt; 1991년 12월10일 자.
<한겨레> 1991년 12월10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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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핵심조약인 단결권 등 유보

한국은 국제노동기구 가입부터 논란의 중심에 섰습니다. 정부가 당시 172개 조약 가운데 쟁점이 돼온 △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의 보호에 관한 조약(87호) △단결권 및 단체교섭권 원칙의 적용에 관한 조약(98호) △공익사업의 고용조건 결정절차와 단결권 보호에 관한 조약(151호) 등 핵심조약에 관해서는 비준을 유보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단결권 관련 조항은 국제노동기구의 기본정신과 직결된 것으로 당시 국내 노동단체들은 국제적 수준에 맞는 노동법 개정 및 단결권 관련 조약 비준 등을 촉구했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현행 노동법의 범위 안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1호(근로시간)와 19호(내외국근로자의 평등 대우) 등 30여 개 조약에 대해서만 비준한다는 방침을 고수했습니다.

&lt;한겨레&gt; 1992년 9월23일 자.
<한겨레> 1992년 9월23일 자.

정부의 이 같은 결정은 국내외 노동계로부터 비판을 받았습니다. 당시 국제공공부문노조연맹(PSI)의 모니카 마티스 위원장은 한국의 노동상황을 살펴보기 위해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마티스 위원장은 “한국 정부가 노총 이외의 독립노조 결정을 법으로 규제하고 있는 것은 국제노동기구 협약에 규정된 결사의 자유를 정면으로 위배하는 것”이라며 “한국 정부의 태도는 국제적으로 비판받아야 마땅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lt;한겨레&gt; 1991년 6월30일 자.
<한겨레> 1991년 6월30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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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미국, ‘한국 노동자 탄압국’ 지정 움직임

국제노동기구에 ‘겉치레로 가입했다’는 여론에 앞서 같은 해 6월, 미국의 정부 기관인 해외민간투자재단(OPIC)은 한국을 “국제적으로 인정되는 노동자 권리가 지켜지지 않는” 노동자 권리 탄압국으로 지목하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이를 공식화하기 위해 관계 부처와 협의 중인 것으로 보도되었습니다. 이 재단은 그동안 연구·조사·청문회 등을 통해 한국 노동자의 인권상황을 검토한 결과 노조결성, 단체교섭, 복수노조, 노조의 자주성, 제3자 개입권 등 다섯 부문의 기본적인 노동자 권리에서 국제노동기구의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또 한국 정부의 적대적 태도, 파업분쇄를 위한 경찰력 동원, 동조파업 불허, 노조 운동가들의 투옥 등 노동자의 권리가 심각하게 침해당해 왔다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재단은 ‘한국 노동자 권리 보고서’를 만들어 의회에 제출하고 한국 투자 보호 중단 결정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1989년 12월27일 청와대, 총리실, 안기부, 노동부, 외무부 등이 진행한 관계부처 회의 문서. &lt;한겨레&gt; 자료 사진
1989년 12월27일 청와대, 총리실, 안기부, 노동부, 외무부 등이 진행한 관계부처 회의 문서. <한겨레> 자료 사진

이후 30여 년이 지난 2020년 3월, 과거 노태우 정부가 노동탄압을 했던 실상이 국제사회에서 쟁점화될 것을 우려해 1990년 국제노동기구 가입을 보류했다는 내용이 담긴 문서가 공개됐습니다. 외교부가 공개한 1989년 외교 문서를 보면 “전교조, 공무원노조, 전노협을 인정할 수 없는데 국제노동기구가 이를 문제 삼을 경우 곤욕을 치르게 될 것”이라며 “최근 정부의 노동운동에 대한 강경 대응 방침에 비춰 국내 노동운동에 대한 국제노동기구 간여는 국내 정치·경제에 큰 부담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우려가 담겨있습니다. 당시 정부는 국제노동기구 가입 보류의 진짜 이유가 알려지는 것이 부담스러웠던지 ‘대외 설명 요지’를 따로 만드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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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1996년 4월14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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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노동협약 안 지키는 한국…국제기구들의 압박

한국은 1996년 10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에 가입하며 세계 경제 질서 체제 변화에 능동적으로 나서게 됩니다. 그런데 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을 앞두고 뜻밖의 노동 문제가 도마 위에 올랐습니다. 일부 유럽지역 회원국들이 한국의 복수노조 불인정과 3자 개입 금지 등 일부 노동법 조항에 대해 거세게 개정을 요구해온 것입니다. 이들 국가는 한국 노동법 가운데 노조설립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는 부분을 들어 한국을 ‘노동 후진국’으로 몰아붙였습니다.

<한겨레> 2017년 3월18일 자.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쪽은 한국이 가입할 당시 87조 단결권과 98조 단체교섭권 비준을 촉구했고, 한국 정부는 이를 이행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이 약속은 20여년간 지켜지지 않았고, 국제노동기구는 계속해서 시정 권고와 핵심협약 비준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2017년 3월, 한국은 노동권 관련 국제 협약을 이행하지 않고 있다는 이유로 유럽연합(EU)의 압박에 몰리기도 했습니다. 이에 따라 최악의 경우 전 세계적으로 노동 후진국이라는 오명을 쓰게 되며, 양국 간 무역 협상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한겨레> 2017년 6월13일 자.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한겨레> 2017년 10월11일 자.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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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한국 법·제도, 남녀고용 평등 기준에 미흡”

한국은 2021년 국제노동기준 적용에 따라 협약 위배를 또다시 지적받게 됩니다. 국제노동기구의 ‘협약 및 권고 적용 전문가위원회’ <2021년 국제노동기준 적용> 보고서에는 해당 내용이 상세히 담겼습니다. 보고서를 보면 한국에서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남녀고용평등법)과 관련 시행령 등이 남녀 동등 보수를 규정한 100호에 충분하게 부합하지 않는다고 꼬집었습니다. 그 결과 남녀 임금 격차가 지속하고 있으며, 금액의 차이도 크다고 비판했습니다.

전문위는 또 한국 정부가 초·중·고 교사들의 정당 가입과 선거운동 참여 같은 정치활동을 금지하는 것이 고용과 직업에 따른 차별을 금지한 111호 협약에 위배된다고 봤습니다. 그러면서 정치활동 제한은 공공부문 전체가 아니라 특정한 공무에 한정돼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lt;한겨레&gt; 2017년 11월21일 자.
<한겨레> 2017년 11월21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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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국제노동기구 핵심협약과 한국의 비준 상황

국제노동기구는 2022년 기준 총 190개 협약과 206개 권고를 채택했습니다. 이 가운데 △결사의 자유 △강제노동금지 △차별금지 △아동노동금지 등 4개 분야 8개 협약은 핵심협약으로 분류돼 있습니다. 한국은 1991년 국제노동기구 가입 이후 △아동 노동 금지를 다룬 138호·182호 △고용상 차별을 금지한 100호·111호 등 4개의 핵심협약만을 비준해 국제사회로부터 꾸준히 핵심협약을 모두 이행할 것을 압박받았습니다. 그런데도 한국은 20여년 가까이 추가 비준을 하지 않다가 2021년 4월이 되어서야 29호(강제노동 금지), 87호(결사의 자유), 98호(단결권 및 단체교섭권 장려) 등 3개 협약을 추가해 총 7개 핵심협약을 비준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8개의 국제노동기구 핵심협약 중 “정치적 견해표명, 파업 참가 등에 대한 강제노동을 부과하는 것을 금지”하는 105호의 경우, 우리나라 형법 체계나 국가보안법 등 국내 실정과 어긋난다는 이유로 비준하지 않았습니다.

현재 국제노동기구 회원인 187개국 중 약 76%가 8개 핵심협약을 모두 비준했습니다. 또한 190개 협약 가운데 평균 47개를 비준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회원국의 평균에도 미치지 못하는 총 32개 협약만을 비준하고 있습니다.

국제노동기구 개입절차 개시 서한 영문 원본. 공공운수노조 제공
국제노동기구 개입절차 개시 서한 영문 원본. 공공운수노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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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한국 정부에 보낸 국제노동기구의 공문

핵심협약 추가 이후 ‘노동 후진국’으로 다시 분위기가 반전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2022년 12월2일 국제노동기구는 한국 정부에 ‘긴급 개입’ 공문을 보냈습니다. 앞선 11월24일 민주노총 전국공공운수사회서비스노동조합 화물연대본부(화물연대)가 처우 개선 등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갔고, 정부는 업무개시명령으로 대응한 데 따른 것입니다. 국제노동기구는 공문을 통해 한국 정부의 이 같은 결정이 국제 노동기준(‘결사의 자유 침해’)을 위반한 것이라는 점을 명확히 했습니다.

<한겨레> 2022년 12월7일 자.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공문 내용이 알려지자 정부는 “의견조회 요청에 불과하다”고 의미를 축소하며 “업무개시명령은 정당하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이를 두고 국제노동기구 노동자그룹 쪽에선 “(한국 정부가) 기본협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 같다(not well versed)”는 비판을 했습니다.

12월7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제17차 국제노동기구 아시아·태평양 총회 본회의에서 박종필 고용노동부 기획조정실장이 한국 정부를 대표해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고용노동부 제공
12월7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제17차 국제노동기구 아시아·태평양 총회 본회의에서 박종필 고용노동부 기획조정실장이 한국 정부를 대표해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고용노동부 제공

한국은 1991년 국제노동기구 회원국이 된 이후에도 국제적 수준의 노동권을 보장하지 못해 국제기구 등으로부터 여러 차례 시정 권고를 받아왔습니다. 이제는 ‘노동 후진국’이라는 오명과 낙인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고, 31년 전 시작된 약속을 지켜야 할 때입니다.

참고 자료
<한겨레> 2022년 12월6일, 12월7일 치, 2017년 3월28일, 10월11일, 11월21일 치, 2013년 6월13일 치, 1996년 4월14일 치, 1992년 9월23일 치, 1991년 6월30일, 12월10일 치
<매일노동뉴스> 2021년 2월18일 치
중소기업중앙회·노사발전재단. 「2018. 국제노동기구 핵심협약과 사회통합 토론회」
고용노동부. 2021. 「‘노동권 보호’ 국제노동기구 핵심협약 비준 절차 완료…내년 4월 발효」

사진
한겨레, 고용노동부, 공공운수노조

강민진 기자 mjk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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