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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노동

5년 만에 ‘저녁이 있는 삶’ 위기…몰아치기 노동에 쉴 권리 뒷전

등록 2023-03-06 18:22수정 2023-04-04 11:14

윤석열 정부 노동시간 전면 유연화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정부가 노동시간을 유연화하는 내용을 핵심으로 한 ‘근로시간제도 개편 방안’을 6일 확정하면서, ‘저녁이 있는 삶’을 구호로 2018년부터 시행된 주 최대 52시간 노동의 틀이 5년만에 큰 폭으로 흔들릴 처지에 놓였다. 개편방안은 연장 근로 시간관리 단위를 확대하는 한편, 선택근로제와 탄력근로제 또한 유연화해 일감이 몰릴 때 주 52시간을 넘어 장시간 일하고, 대신 휴가 활성화로 휴식권을 보장하는 내용을 담았다. 정부는 개편방안이 “노동자의 선택권(시간주권), 건강권, 휴식권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노동계는 “노동권, 건강권, 휴식권이 없는 3무 야근법”(직장갑질119)이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고, 경영계는 “낡은 법과 제도를 개선하는 노동개혁의 출발점”(경영자총협회)이라고 환영했다.

시간주권: 노동자 선택권 확대했나?

정부가 내놓은 개편 방안의 핵심인 연장 근로 시간 관리 단위 확대는 현재 주 단위(12시간)에서만 쓸 수 있는 연장근로 시간을 월(52시간)·분기(140시간)·반기(250시간)·연(440시간)으로 넓혀 특정한 날·주·월·분기 등에 자유롭게 몰아줄 수 있는 내용이다. 선택지는 두가지다. △주 최대 64시간 노동을, 퇴근과 출근 사이 11시간 연속 휴식 없이 근무하거나 △주 64시간 이상 노동을 하되 11시간 연속 휴식권을 부여한다.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은 이같은 연장근로 시간 관리를 설명하며 “근로시간 선택권을 확대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이 6일 정부서울청사 브리핑실에서 근로시간 제도 개편방안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이 6일 정부서울청사 브리핑실에서 근로시간 제도 개편방안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다만 노동 현장에서 연장 근로의 유연화는 결국 사용자 뜻에 따라 노동 시간을 불규칙하게 늘리게 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직장갑질119는 개편방안에 대해 “(정부가 제안한) 11시간 연속휴식제도 없는 64시간 노동이라면 새벽 4시 퇴근 아침 9시 출근으로 주 4일 연속노동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이 단체는 “정부 주장대로 자율과 선택이라면 노사가 대등하게 노동시간을 결정할 수 있어야 하는데 한국 노동자 86%는 노조가 없고 노동시간을 결정해야 할 근로자 대표는 사장 동생, 영업 본부장”이라고 비판했다. 정부는 이같은 우려에 대해 근로자 대표의 민주성과 대표성을 강화하는 방안을 개편방안에 포함했다.

개편방안은 또 ‘업무에 상당한 재량성이 인정되는 고소득·전문직, 일정 규모 이상 지분을 가진 스타트업 근로자’의 경우 연장근로를 제한하거나 연장근로 수당을 지급하지 않는 ‘화이트칼라이그젬션’ 제도를 검토하는 방안도 연구 과제로 설정했다. 이와 함께 선택근로제의 정산 기간을 전 업종 1개월에서 3개월로 확대했는데, 애초 노동자의 시간 선택권을 강조한 이 제도는 주 40시간 안에서 연장근로 수당 없이 노동 시간을 유연화하는 등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를 낳아왔다.

건강권: 돌발·불규칙 노동 대응은?

노동시간 유연화가 ‘몰아치기 노동’으로 노동자의 건강을 헤칠 염려에 대해 정부가 마련한 ‘건강보호 장치’는 어떤 경우든 4주 평균 64시간 이내 노동 시간은 맞추도록 하고, 한 주 64시간 이상 노동 때 11시간 연속 휴식권을 부여한 것이다.

이는 평균적인 노동 시간을 제한할 수 있지만 일 단위, 주 단위로 불규칙한 노동이 불러올 위험은 여전하다. 특히 개편방안은 탄력적 근로 시간제(특정한 근로 일·주의 근로시간을 연장하는 대신 특정 기간의 근로시간 평균을 주 40시간으로 맞추는 것)를 시행할 때, 원래는 미리 정해둬야 할 노동 시간을 ‘기계 고장, 업무량 급증 등 불가피한 사유 발생시 사후에 변경할 수 있도록’하는 내용을 포함했다. 불규칙 노동에 더해 ‘돌발 노동’도 가능한 셈이다.

김형렬 서울성모병원 직업환경의학과 교수는 “장시간 노동 자체도 문제이지만 돌발 노동, 불규칙 노동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 또한 크다”며 “그동안 연구결과를 보면 일 단위, 주 단위로 불규칙하게 노동하는 사람들은 불안 장애가 심화됐고, 주당 노동 시간이 7일 전에 견줘 10시간 늘어난 경우 심혈관 질환 위험이 크게 높아졌다”고 말했다.

휴식권: 노동시간 단축될까?

2018년 7월부터 시행된 주 최대 52시간 노동은 탄력 근무제 확대나 30인 미만 사업장에 대한 사실상 적용 제외로 현재까지 완전하게 시행됐다고 보기 어렵다. 다만 ‘주 최대 52시간 일할 수 있는 사람의 시간에 맞춰 일하는 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인식은 넓어졌고, 그로 인해 실제 노동시간도 줄어왔다. 제도 시행 전인 2017년 244만7천명에 이른 주 52시간 초과 근무 노동자는 2021년 100만1천명까지 절반 이하로 감소했다. 다만 여전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1716시간)에 견줘 한국의 연간 노동시간(1916시간)은 200시간가량 길다. 실노동시간 감축의 필요성은 여전한 셈이다.

정부는 실근로시간 감축을 위해 ‘근로시간저축계좌’ 도입 등을 통해 장기 휴가를 갈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기로 했다. ‘단체휴가, 장기휴가 활성화를 위한 대국민 캠페인’ 등 눈치보지 않고 휴가가기 확산을 꾀한다는 계획이다. 다만 연차휴가 소진률은 2021년 기준 58.7%에 그칠 정도로 휴가 사용은 활발하지 않다. 이는 연장·휴일 노동에 대한 수당이 임금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왜곡된 임금 구조 탓이 큰데, 이에 대한 대책은 개편방안에 담기지 않았다. 이정식 장관은 “왜곡된 임금체계가 장시간 노동을 강화하는 면이 있는데, 이는 상생임금위원회에서 별도로 논의하겠다”고 말했다.

정흥준 서울과학기술대 교수는 “정부가 노동시장 유연화를 강조하고 있는 데다 제도 적용도 복잡해 특정 주에 과도하게 일을 하고 쉬어야 할 때는 못 쉬는 등 제도가 남용될 우려가 있다”며 “특히 일감의 변동에 따른 노동시간 유연화의 필요성이 크고 연장근로 없이는 임금이 적은 소규모 사업장에서 노동 시간이 늘어나는 반면, 대기업이나 공공기관 같은 노동조합이 있는 곳들은 큰 영향을 받지 않아 노동시간 양극화가 벌어질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방준호 기자 whorun@hani.co.kr 장현은 기자 mix@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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