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윤석열 정부와 언론은 ‘새로고침 노동자협의회’를 ‘엠제트(MZ)노조’로 부르며 이들을 중심으로 노동 현안에 대한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우리 스스로를 엠제트노조라고 칭한 적 없고, 노조 대표와 조합원 모두가 엠제트세대인 것도 아니다. 우리가 엠제트세대를 대변한다고 할 수도 없다”며 정부와 언론이 붙인 명칭을 일축했다. 새로고침 협의회 위원 10명 중 2명은 50대, 1명은 40대, 나머지 7명은 30대다. 연령 범위가 너무 넓어 세대로 묶기 어색하다. 이들 연령대는 한국에서 노동하는 전체 인구 구성과 큰 차이가 없다. <한겨레>가 이들 10명을 3월23~24일 인터뷰했다. <편집자주>
“네가 그렇게까지 흥분해 노조를 세울 정도라면, 회사가 정말 잘못한 게 맞을 거다.”
유준환 엘지(LG)전자 사람중심사무직노조(이하 사무직노조) 위원장의 대학 생활을 기억하는 친구들은 2021년 2월 노조 설립 이후 그의 행보에 놀라며 이렇게 입을 모은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유 위원장은 사람들 앞에 나서는 성격이 아니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 2018년 소프트웨어 개발자로 엘지전자에 입사하면서 유 위원장의 삶의 궤적이 조금씩 선로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매년 임금협상을 하는 노동자 대표가 누군지 알 수 없었고, 노사협의회 활동 정보는 베일에 가려져 공유되지 않았다. 노동권을 존중받지 못한 동료들은 무력감을 이기지 못하고 속속 회사를 떠났다.
“뛰어난 인재들을 불합리하게 대하는 회사를 보면서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결국 시간이 지나 내 권리도 침해될 거라고 생각했다.” 유 위원장은 회사에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이유를 설명했다.
유 위원장은 주로 직장인들을 위한 소셜 플랫폼인 ‘블라인드’에서 익명으로 동료들과 의견을 주고받았다. 밤늦게까지 토론이 이어지는 날이 많았지만 블라인드에서 나눈 이야기들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회사엔 노조원 수가 8천명이 넘는 거대 노조가 있지만, 유 위원장은 ‘사무직’이란 이유로 가입할 수 없었다. 유 위원장은 “생산직 노동자 9천명 대부분이 노조에 가입했으나, 2만5천명 사무직 노동자 중에 노조에 가입한 사람은 (2019년까지) 한명도 없었다”며 “한 동료는 ‘사무직’이란 이유로 가입을 거절당했다”고 말했다. 그가 노조 활동을 하려면 ‘조합원’이 아니라 ‘위원장’이 돼야 했던 배경이다.
지난 2월 21일 오후 서울 용산구 동자아트홀에서 새로고침 노동자협의회 발대식이 열리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백재하 위원장의 엘에스(LS)일렉트릭도 비슷했다. 엘에스일렉트릭엔 현장기술직 노동자가 800명이고, 연구사무직 노동자는 2200명에 이르지만 현장기술직으로만 구성된 노조는 연구사무직을 조합원으로 받지 않았다. “현장기술직 조합원이 사무직으로 직종이 전환되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러면 강제로 노동조합에서 탈퇴시켰다.” 백 위원장이 말했다.
<한겨레>가 인터뷰한 사무직 노동자들의 불만은 생산직(호봉제)과 사무직(성과에 기반한 연봉제)의 서로 다른 임금 체계로 모아졌다. 백 위원장은 “지난해 임금협상 때, 현장 노동자들은 일률적으로 임금을 인상하면서 사무직 노동자는 성과지표(KPI) 평가에서 디(D)등급을 받으면 3%를 깎도록 했다”며 “불만을 전달하려 해도 기존 노조는 사무직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고 말했다. 김한엽 금호타이어 사무직노조 위원장은 “회사가 2020년 기본급을 동결하면서 격려금으로 100만원을 지급했는데 사무직은 주지 않았다. 하지만 불만을 얘기할 통로가 없었다”고 했다.
왜 제조·대기업 사무직 노동자가 노조에서 배제됐는지 이해하려면 국내 제조업 발달사를 살펴야 한다. 1980년대 이후 국내 제조·대기업에서 노동조합은 주로 현장·생산직 노동자 위주로 조직됐다. 상대적으로 학력이 높고 많은 임금을 받는 사무·연구직 노동자는 중간 관리자 성격을 갖고 있어 노조 활동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사무직 노동자들은 별도의 임금 교섭을 하지 않아도 많은 성과급으로 보상을 받았고, 집단적 요구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2010년 이후 제조업 성장 속도가 둔화되면서 사무직 처우도 나빠졌다. 더 나은 임금과 복지를 제공하는 정보통신(IT)기업이 속속 등장하면서 상대적 박탈감도 커졌다. ‘제조업체 근무하는 사무직’이라는 이중성을 가진 노동자가 빠르게 늘어난 것도 조직화에 영향을 미쳤다. 지난해 박종식 한국노동연구원 부연구위원이 쓴 ‘제조업 위기와 사무직/엠제트(MZ)세대 노동조합의 등장’ 보고서를 보면 1995년 제조업계 화이트칼라 노동자(26.9%)는 블루칼라 노동자(73.1%)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는데 2019년 비중은 38.2%로 1.5배 가까이 늘었다.
성장세가 둔화된 업계에서 사무직 노동자들은 불만을 느끼는데, 기존 노동조합은 이들의 불만을 포용하지 못했다. 양대 노총은 노조 설립에 도움을 받으려 문을 두드린 사무직 노동자들을 외면하기도 했다. 백 위원장은 “경기 지역의 노총 사무실을 찾아갔는데 ‘그 정도 의지로 안 된다. 인원을 더 모으라’며 미지근한 반응을 보였다”고 말했다. 블라인드나 카카오톡 대화방에서 불만의 목소리를 높이던 사무직 노동자들은 노동 환경을 바꾸기 위해선 결국 스스로 사무직 노동자를 위한 노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제조·대기업에서 사무직 노동자들이 처우에 대한 불만을 토로할 길이 없어 새로운 노조를 결성하고 나섰다면, 공공기관에선 기존에 조합원이던 사무직 노동자들이 ‘기성 노조의 정치 활동’에 불만을 품고 새 노조를 설립한 경우가 많았다.
이동훈 한국가스공사 더코가스노조 2대 위원장은 “근로자의 날(5월1일) 서울 광화문 상급단체(민주노총) 집회에 매년 동원됐는데, 참석하지 않으면 조합원 자격을 중지하겠다는 식이었다”며 “선배 조합원들이 연말정산 때 세액공제로 돌려받을 수 있으니 더불어민주당·정의당 국회의원에게 정치후원금 10만원을 내라고 한 것 등에도 불만이 많았다”고 말했다. 송시영 서울교통공사 올바른노조 위원장은 “노조 선배들이 정치적 중립을 지키지 않고 정의당 특정 정치인에게 후원금을 내도록 요구하거나, 지난 총선과 서울시장 선거 때 정의당과 민주당 소속 후보를 찍을 것을 종용했다”고 했다. 한국가스공사와 서울교통공사는 모두 기존 노조가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를 상급단체로 두고 있었다.
공공기관 사무직 노동자들의 불만은 문재인 정부의 비정규직 노동자 ‘정규직화’ 과정에서 터져 나왔다. 다만 맹목적 반발이라기보단 인건비 등 전체 재원이 한정된 상태에서 이뤄진 무리한 정규직화가 원인의 하나라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서울교통공사는 2018년 3월 무기 계약직 노동자 1285명을 정규직으로 신규 채용했는데, 2015년 이후 공채를 통해 입사한 젊은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강하게 반발했다. “우리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처우 개선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채용 절차를 무시하고 ‘정치적으로’ 채용한 것이란 우려를 제기한 것이다. 인건비와 예산에 대한 검토 없이 무리하게 정규직 전환 채용을 한 탓에 지난해 11월에는 회사가 1539명 인원을 감축하는 구조조정안을 내놨고, 현장 업무는 엉망진창이 됐다.” 송 위원장의 주장이다.
한국가스공사에선 2020년 2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정규직 전환과 직접고용을 촉구하며 대구 동구에 위치한 공사 사장실을 점거했는데, 많은 조합원이 1노조를 떠나는 계기가 됐다. 이 위원장은 “공기업은 인건비가 총액제로 정해져 있는데 비정규직 노동자 2천명을 일시에 전환하면 기존 직원들의 임금과 권리가 침해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고 설명했다.
공공기관과 대기업에서 새롭게 조직된 사무직 노조는 대부분 상급단체의 도움을 고려하지 않았는데, 양대 노총에 소속된 회사 기존 노조에 대한 반감이 컸다. 유하람 삼성디스플레이 열린노조 위원장은 “1노조가 한국노총 소속인데 그들이 회사를 상대로 교섭을 잘한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외부 세력의 도움 없이 자주적으로 목소리를 내보자는 얘기들이 많았다”고 했다. 김우용 부산관광공사 열린노조 위원장은 “노동법 자문 등 설립 과정에 양대 노총의 도움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상급단체의 정치 프레임에 끌려가 자주성을 침해당할 수 있다고 봤다”고 말했다.
양대 노총은 ‘새로고침 노동자협의회’ 활동으로 노조에 대한 관심이 환기되길 기대한다는 입장이다. 이지현 한국노총 대변인은 <한겨레>에 “우리가 대표하지 못한 목소리가 있었던 게 사실이고, 소통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들이 새 노조를 결성하고 협의체를 세웠던 것으로 본다”고 했다. 한상진 민주노총 대변인은 “정부가 노동권을 향상시키기 위한 새로고침의 노력을 정치적으로 해석하고 이용해선 안 된다”고 했다.
이재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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