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1월 인천 동일방직에 입사한 이총각(오른쪽 둘째)은 3개월 만에 일 잘하는 ‘양성공’으로 소문나면서 4~5년 경력의 품질관리분임조 교육생으로 선발됐다. 사진은 교육을 마친 뒤 수료자에게만 주는 ‘하얀 모자’를 쓴 모습.
이총각-우리들의 대장, 총각 언니 7
1966년 선망하던 동일방직의 노동자가 된 이총각의 일당은 70원이었다. 잔업까지 모두 합쳐도 월 3000원을 넘지 못하는 임금이었다. 67년 5월 한국은행이 발표한 임금 기본조사 보고를 보면, 제조업 노동자의 평균임금은 8100원이었으니 거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한 것이었다. 총각은 며칠이 지나서야 돈으로 환산된 자신의 노동 가치를 귀동냥하듯 들을 수 있었다. 입사와 동시에 노동조합에 가입이 됐지만 어용노조는 신입 조합원에게 아무런 교육도 하지 않았고 총각은 사실 노조가 있는 줄도 몰랐다. 그러니 그 일당 70원에 대해서는 어떤 의문도 품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 돈이 적다는 생각도 안 들었다. 다만, 내 손으로 돈을 번다는 자부심만 가득했다. 그리도 귀한 첫 월급을 어떻게 썼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으로 봐서 아마도 봉투째 어머니께 갖다 드린 듯싶다.
총각은 공장에 다니는 동안 내내 월급을 몽땅 살림에 보탰다. 자신이 어떤 식으로든 어머니께 도움이 되는 게 좋았고, 남동생이 누나들처럼 공장에 취직하지 않고 계속 학교에 다닐 수 있어서 좋았다. 그것으로 족할 뿐 어머니께 뭘 사고 싶다, 갖고 싶다고 원해본 적이 없었다. 화장도 안 하고 다녔으니 치장을 하느라 돈 쓸 일도 없었다. 다만, 일년에 딱 한번 11월19일 총각의 생일엔 어머니께서 쌀밥에 미역국과 동태찌개를 해주었다. 그즈음 인천 항구엔 명태잡이배들이 만선이었다. 싸고 맛난 동태에 무를 넣고 끓인 동태찌개가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고, 늘 생일을 떠올리면 입안에 군침이 돌았다.
총각은 입사하자마자 일 잘하는 ‘양성공’으로 이름을 날렸다. 1분에 140걸음씩 연습했던 그 힘든 작업을 그는 160걸음이 될 정도로 억척스럽게 해냈다. ‘정방’이라는 공정에서는 솜을 빨리 넣어주지 않거나 혹은 다양한 이유로 끊어지는 실을 이어주지 않으면 관사(실꾸리)의 굵기가 얇아지기 때문에 작업자들이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그는 남들보다 기계를 두세 개 더 담당했고, 고급실을 빼는 작업을 맡았다. 생산부장은 일이 더딘 노동자들을 데려와 그를 보고 배우라며 견학까지 시킬 정도였다.
열심히 일을 하는 것만이 부자가 되는 길이고, 인간답게 사는 길이라고 믿었던 총각은 일 잘한다는 칭찬에 기분이 좋았다. 더 신이 나 일을 했다. 회사에서 주는 상은 거의 독차지하다시피 했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상은 모범생이라고 받은 조그만 양은냄비였다. 부엌살림이라고는 솥 하나, 그릇 하나, 냄비 하나가 전부였던 시절에 눈물 나게 고마운 상품이었다.
입사 석달 만에 총각은 4~5년 된 모범생만 받을 수 있는 품질관리분임조(큐시 서클) 교육생으로 선발됐다. 원래 일본에서 시작된 이 교육은 생산성과 품질 향상을 목표로 직장에서 자주적인 품질관리 활동을 하면서, 조직원의 잠재능력까지 키운다는 내용이었다. 공장 내 교육관 같은 곳에서 4박5일간의 교육을 받고 나면 파란색 챙이 달린 하얀 모자를 쓰게 해줬다. 교육을 받는 동안은 작업을 하지 않아도 됐고 나름 능력을 인정해주는 특별한 혜택이어서 신참 총각은 무척 신나고 뿌듯했다.
이제 막 양성공을 끝낸 총각이 하얀 모자를 쓰고 다니자 다들 수군거리며 쳐다봤다. 하지만 그는 못 본 척 당당했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무조건 열심히 하는 것은 자기와의 싸움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남들과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었다. 그렇게 모두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동료들과 경쟁하면서, 이기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한 단계씩 올라가는 중이었다.
총각은 12시간 동안 화장실도 제대로 못 가고 내내 서서 일할 때가 많았다. 한 벌밖에 없는 작업복은 늘 땀에 절어 있었고 땀이 나 축축한 운동화를 신고 계속 뛰어다니다 보면 무좀이 안 걸릴 수가 없었다. 24시간 꺼지지 않는 불빛 아래서 일해야 했기에 동일방직 노동자 모두가 같은 처지였다.
눈·코·입으로 파고드는 솜먼지를 털어내기 위해 스펀지는 필수 소지품이었다. 1년에 한번 찍는 엑스레이 검진은 결국 이 솜먼지로 인해 폐병을 얻은 노동자를 가려내 휴직이나 퇴직을 권고하는 절차였다. 고급실 공정에서는 그나마 먼지가 덜 났지만 총각 역시 늘 목이 칼칼한 게 괴로웠다. 솜먼지를 걸러내려면 돼지고기를 먹거나 공복에 들기름을 먹어야 한다고들 했지만 그 시절엔 구경조차 힘들었기에, 집에서 만들어서 파는 엿을 사먹는 것으로 대신했다.
이총각 구술
구술정리 박민나<가시철망 위의 넝쿨장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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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총각 전 동일방직 노조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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