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3월 이총각은 동일방직 노조 지부장으로서 반도상사 부평공장 노동조합의 정기대의원대회에 참석해 전임 한순임과 경합한 장현자 지부장의 당선을 응원했다. 이후 섬유본조 간부로 변신한 한순임은 동일방직 노조 공격에 앞장섰다. 사진은 반도상사 노조의 소식지 <한마음>. 사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이총각-우리들의 대장, 총각 언니 41
1977년 3월27일, 이총각은 동일방직 민주노조를 대표해 반도상사 부평공장 노동조합의 정기대의원대회에 참석했다. 그날은 한순임 반도상사 지부장의 3년 임기가 끝나고 2대 지부장을 선출하는 날이었다. 재선출을 확신했던 한 지부장과 부지부장인 장현자가 후보로 나왔다. 총각은 모두의 바람대로 장현자가 새 지부장에 선출되기를 바라며 조마조마하는 마음으로 두 사람의 정견 발표를 지켜보고 있었다. 똑똑하고 말솜씨가 좋은 한 지부장은 청산유수로 그동안의 자기 업적을 늘어놓았고 술술 막힘이 없었다. 하지만 결과는 장현자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한순임에 대한 조합원들의 불신은 3년 전 절대적인 신임으로 지부장에 당선될 때부터 불씨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노조가 결성되기 전 그는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엄청난 구타를 당했다. 인천산업선교회(산선)의 조화순 목사와 실무자인 최영희가 빨갱이인데 그들 손에 놀아났다는 게 이유였다. 그때 풀려난 뒤 그는 “은인을 배신해야 할지, 조국을 배반해야 할지 미치겠다”며 펑펑 울었다고 한다. 이는 중정이 그를 구타하고 구슬리면서 산선과 거리를 두도록 협박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대목이었다. 중정의 목적은 우선 반도상사 노조를 산선과 최영희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데 있었다.
한 지부장은 어느 날 노조 집행부 회의에서 더 이상 산선에 가지 말자는 말을 꺼냈다. 산선 문제로 회사와 날카롭게 대립하는 상황에 있었기 때문에 다른 간부들 역시 이에 동의했다. 이후 그는 섬유본조 쪽과 가깝게 소통하며 많은 부분을 상의해 일을 처리해 나갔다.
노조가 결성되었지만 회사의 부당노동행위는 여전했고, 부산에서 차출된 비조합원 출신의 ‘봉선회’라는 조직을 만들어 노조 사무실에서 행패를 부리고 비품들을 깨부수는 등 노조 활동을 방해하는 일을 서슴없이 저질렀다. 이에 중정 경기지부는 회사에 압력을 넣어 봉선회 활동을 지원하지 말 것과 ‘노조 상근 인원을 늘릴 것’, ‘노조의 사무실과 비품을 지원할 것’, ‘기숙사 인원 감축을 보류할 것’ 등을 지시해 노조 활동을 지원했다. 이는 중정의 문건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중정에서 한 지부장을 협박만 한 것이 아니라 그가 지부장으로서 능력을 발휘해 노조를 원활히 운영할 수 있도록 보장해준 셈이었다. 만약 중정에서 협박만 했다면 아마도 그의 변절은 없었을 것이다.
반도상사 노조는 똑똑하고 지도력 있는 한 지부장의 지도 아래 민주노조의 기틀을 확고히 다져갔다. 노조 결성 첫해에 임금인상 30%를 관철하고 잔업 강요를 폐지했으며 기숙사 환경을 개선하는 등 많은 성과가 있었다. 그러나 75년 중반부터 그의 변절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는 노조 간부들과는 거리를 두고 회사 경영진, 전국 규모의 노조 간부 등과 함께 있는 게 자주 목격되었다. 그러더니 5월 정기대의원대회에서 박정희 정권의 정책을 대변하는 식의 연설을 하여 모두를 경악하게 했다. 그동안 자체 교육과 크리스찬아카데미 교육 등으로 의식이 성장하고, <한마음>이라는 노조 소식지를 통해 다양한 정보를 접하며 노조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온 노조원들이 그의 변화를 모를 리가 없었다.
결정적으로 조합원들이 한 지부장에게 등을 돌리게 된 것은 회사가 폐결핵 진단을 받은 조합원들을 아무런 보상도 없이 해고했을 때 그가 저항 없이 받아들인 것이었다.
그는 동료 노조 간부들과 전혀 상의하지 않았고 독단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방식으로 일을 처리했다. 그리고 이듬해 7월 회사의 요구에 따라 장 부지부장을 포함한 해고자 명단을 넘기려다가 발각되었다. 이로써 집행부 간부들과 한 지부장 사이의 갈등이 고조되었고 조합원들의 지부장에 대한 불신도 증폭되었다.
그런 까닭에 결국 그날 정기대의원대회에서 장 부지부장이 압도적인 표차로 제2대 지부장에 선출되었던 것이다. 총각은 장 지부장의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감격했다. 역시 불의는 정의를 이길 수 없었다.
한순임은 77년 8월 섬유본조의 상근직 간부로 여성분과에서 교육을 담당하는 강사 활동을 시작했다. 권력에 대항해 민주노조를 결성했던 노동자가 이제 민주노조를 파괴하는 앞잡이로 본색을 드러내며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의 임무는 섬유노조 소속 노동자들의 의식을 바꿔놓는 데 있었고, 첫 대상은 동일방직 민주노조였다. 이총각과 한순임의 악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총각 구술
구술정리 박민나 <가시철망 위의 넝쿨장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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