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2월21일 새벽 똥물 만행으로 동일방직 민주노조의 대의원 선거를 방해한 남자 조합원들과 조직 행동대원들은 이날 낮부터 이틀간 조합 간부들마저 쫓아내고 이틀간 노조 사무실을 점거해버렸다. 사진은 퇴근반 여자 조합원들이 작업복 차림으로 노조 사무실을 에워싸고 대치 농성을 벌이고 있는 모습.
이총각-우리들의 대장, 총각 언니 48
1978년 2월21일 오후 2시 동일방직 민주노조 이총각 집행부는 대의원 선거를 재개하기로 했으나 남자 조합원들과 섬유본조 행동대원들의 노조 사무실 점거로 무산될 위기에 놓였다. 비보를 접한 500여명의 조합원들은 노조 사무실 앞에 모여 ‘큰 힘 주는 조합’, ‘노총가’ 등을 부르며 농성에 돌입했다. 따뜻한 봄을 말하기엔 아직 찬바람이 매서운 겨울이었다. 하지만 조합원들은 영하의 날씨에 얇은 작업복 하나만 걸치고 추위에 떨면서도 흔들림이 없었다. 남자들이 노조 사무실을 에워싸고 안팎을 점령하는 상황이 계속되자, 조합원 수백명이 몇 차례에 걸쳐 뚫고 들어가려고 시도를 했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그런 와중에 직포2과 배옥진이 남자들이 던진 유리병에 손등이 찔려 일곱 바늘을 꿰매는 부상을 입기도 했다.
남자 조합원들은 모두 작업을 중지한 채 노조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고, 사무실 앞에서 거들먹거리며 죽치고 있던 행동대원들에게서는 술 냄새가 진동했다. 술기운으로 완력을 행사하니 한번의 발길질에도 여자 조합원들은 나동그라지기 일쑤였다. 그 모습이 재미있기라도 하다는 듯 문명순과 박복례는 한층 신이 나서 사무실 앞을 알짱거렸다. 총각은 사람의 탈을 쓰고 살면서 어떻게 저토록 수치심이라는 게 없을 수 있는지 참으로 의아했다. 팽팽한 대치상태가 계속되자 집행부는 저녁 6시를 기해 해산을 종용하고 다음날을 기약하기로 했다.
그러나 2월22일 아침이 되어서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남자 조합원들은 여전히 사무실을 점거한 상태였고, 사무실 앞에는 “산업선교는 물러가라”, “때려잡자 조화순, 무찌르자 이총각”, “조합원은 뭉쳐서 참된 조합 만들자” 등의 플래카드가 펄럭이고 있었다. 총각과 간부들은 이날 섬유본조에서 열린 집행위원회에 참석해 항의를 하려고 했지만 행동대원들에게 저지당하고 말았다. 이날 집행위 회의에서는 17 대 1로 동일방직 노조를 사고 지부로 결정하는 안건이 통과되었다. 유일하게 반대한 1표는 방용석 지부장의 원풍모방 노조였다.
다음날 오전, 섬유본조 조직국장 우종환이 총각과 박복례 두 사람을 사무실로 호출했다. 그는 사장실에서 사장이 평상시에 입는 가운을 걸치고 두 사람을 맞았다. 그 옆에는 동부경찰서 형사 2명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고는 한다는 말이 낮 12시까지 본조의 지시에 따르겠다는 각서를 쓰지 않으면 사고 지부로 처리하겠다고 협박을 하는 것이었다. 박복례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이에 응했지만 총각은 노조를 그들에게 넘겨주라는 것밖에 안 되므로 “복종이라는 말은 결코 있을 수 없다”고 완강히 거부했다.
섬유본조는 2월23일자로 동일방직 노조를 사고 지부로 결정하고 모든 업무를 조직수습 책임위원에게 넘기라고 지시했다. 이는 지난 1월 섬유노조 임시대의원대회에서 개정한 규약을 적용한 것으로, 민주노조 파괴를 선언하는 포문을 연 셈이었다. 사고 지부 결정이 내려지자마자 남자 조합원들과 행동대들은 한층 기세등등하게 이총각 집행부의 활동을 저지하고 나섰다. 현장 안팎의 분위기가 흉흉해졌다. 출퇴근길에 여자 조합원들이 낯선 남자들한테 끌려가 따귀를 맞고 위협당하는 일도 일어났다. 그들은 욕설을 퍼부으며 노조와 관계를 끊으라고 협박을 해댔다. 어느날은 지나가는 남자가 조합원에게 괜히 시비를 걸었는데 분명 행동대원의 짓으로 보였다고 했다. 노조에서는 조합원들에게 절대로 혼자 외진 길을 다니지 말고 친구들이랑 같이 다니도록 주의를 시켰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문명순이 보이지 않았다. 2월21일 조합원들이 농성을 끝낼 때까지만 해도 앞장서 설치고 다녔는데 그 다음날부터 감쪽같이 자취를 감춰버렸다. 총각은 어쩌면 또 어딘가에서 민주노조를 깰 연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소문엔 문명순이 자기가 많은 사람들한테 수모를 당했기 때문에 기어이 이총각 집행부를 뒤엎고 박복례를 지부장에 당선시키고 나서 시집을 갈 것이라고 선언을 했다는 얘기도 들렸다. 하지만 회사 쪽에서는 오히려 노조가 문명순을 어디다 감금시키지 않았느냐고 의심을 했다. 총각은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 며칠 뒤 돌연한 소식이 날아왔다. 21일 밤 9시20분 야간 근무조였던 그가 출근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죽었다는 것이었다. 사고 당시 그가 신분증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연고자를 찾는 데 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총각은 너무 황당해서 믿어지지가 않았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악스럽게 반조직 행동을 했지만 한때는 민주노조를 함께 일궈왔던 동지가 아니었던가. 총각은 노조 간부들과 함께 빈소를 찾아 그의 명복을 빌었다.
이총각 구술
구술정리 박민나<가시철망 위의 넝쿨장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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