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2월21일 새벽 터진 ‘동일방직 똥물투척 사건’은 독재정권의 보도통제에도 불구하고 가톨릭노동청년회 이철순에 의해 극비 제작된 유인물(왼쪽 사진)을 통해 3월들어 전국에 알려질 수 있었다. 77년 3월 수습 대의원대회를 비롯해 내내 이총각 집행부를 반대해 똥물 만행에 앞장섰던 문명순(오른쪽 사진)은 사건 직후 교통사고로 돌연 사망해 또다른 충격을 줬다.
이총각-우리들의 대장, 총각 언니 49
1978년 3월6일 섬유노동조합 중앙위원회는 동일방직 민주노조 지부장 이총각, 부지부장 정의숙·이병국, 총무 김인숙 등 4명의 임원진 전원을 ‘반노동조합적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제명해 버렸다. 이날 회의에서 김영태 위원장은 “도시산업선교회는 국제 빨갱이 단체이며 동일방직 현 집행부는 그 새끼다”, “세계교회협의회(WCC)는 세계적인 공산당 조직이다”라고 맹비난하고 조화순 목사에 대해 인신모독에 가까운 욕설을 퍼부었다. 섬유노조본부(섬유본조)는 노동자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정권을 비호하고 자본가의 이익을 대변하는 조직임이 분명했다.
부지부장 이병국은 전날 섬유본조 행동대장 맹원구의 호출을 받았다. “여자애들이 판치는 데서 창피스럽게 남자 놈이 끼어서 뭐 하는 거야? 내일 본조에서 동일방직 집행부 임원을 징계할 예정인데 마지막 기회니까 잘 생각해봐. 지금이라도 집행부에서 손을 떼고 이총각 일당을 타도하는 데 협조하면 위원장한테 말해서 징계에서 구제해주도록 하지. 부양가족을 생각해서 잘 결정해!”
이병국은 처자식을 떠올리며 잠시 흔들렸지만 모두들 사생결단의 심정으로 싸우고 있는 마당에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곧은 사람이었다. 아무리 상황이 어렵게 돌아간다 하더라도 양심을 팔고 자신의 안위만을 걱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해고를 당해서 회사를 못 다니더라도 산 입에 거미줄 칠까 싶은 생각이 들었고, 무슨 일을 해서든 가족들 굶기지는 않을 거라는 다짐을 했다. 하지만 이런저런 생각들이 뒤엉켜 착잡한 마음이 없지 않았다.
섬유본조에서 끝내 지부장을 비롯한 조합 간부 4명을 제명하자 남자 조합원들은 더욱 기세가 등등해져 이총각 집행부의 모든 활동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은 회사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이총각은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를 두고 여러 사람과 머리를 맞대고 연구를 했다. 이때 곧 다가오는 3월10일 노동절 행사에 주목했다. 노동 현장에서 노조 활동을 열심히 한 죄로 똥물을 뒤집어쓰고 갖은 폭력을 다 당해도 신문에 기사 한 줄 실리지 않는 시절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선 사람들에게 동일방직 사태를 알리는 일이 중요하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신문도 방송도 모두 군사독재정권에 아양을 떨며 자신들의 목숨을 보전하는 데만 급급한 상태라 보도를 기대할 수도 없었지만, 당장 유인물을 만드는 것조차도 쉽지가 않았다. 인쇄소마다 내용을 보고 손사래를 치거나 혹은 정보당국에 신고를 해서 잡혀가는 일도 없지 않았기 때문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총각은 최영희의 도움을 받아 유인물을 작성한 다음 인쇄를 할 수 있는 곳을 수소문했다. 하지만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 인쇄를 해줄 곳을 찾는 건 쉽지 않았다. 그때 가톨릭노동청년회(지오세) 간사로 있던 이철순이 경북에 있는 한 출판사를 통해서 겨우 유인물을 만들 수 있었다. 유인물에는 똥물 세례를 받은 동일방직 여자 조합원의 사진까지 들어가 있어서 파급력이 클 것으로 예상되었다. 철순은 10만부 가운데 2만~3만부는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대전 가톨릭농민회관에 들러 지역 발송용으로 떨어뜨린 뒤 만일의 검문에 대비해 신부 한 분도 동승해 밤새 트럭을 타고 달렸다. 새벽녘 무사히 서울에 도착한 그는 함세웅 신부의 한강성당 지하에 유인물을 모두 내려놓은 뒤 신속하고 조심스럽게 전달에 나섰다.
3월10일 장충체육관에서 치러질 노동절 행사에는 최규하 국무총리가 참석할 예정이었다. 참석자들은 미리 나눠준 입장권을 제시해야만 들어갈 수 있었다. 이총각은 노조원들에게 필요한 입장권 70여장을 방용석에게 부탁해 비밀리에 전달받았다. 행사 전날, 장충체육관으로 들어갈 조합원 76명은 노량진에 있는 지오세 전국본부에 모여 구체적인 계획을 공유하며 필사즉생의 결의를 다졌다. 엽서 크기만한 유인물 수백장을 나누어 가진 조합원들은 저마다 가슴이나 주머니 혹은 소맷부리에 숨겼다. 집행 간부들은 “동일방직 문제 해결하라”, “똥을 먹고 살 수는 없다”, “김영태는 물러가라”고 쓰인 펼침막을 몸에 둘둘 감고 옷으로 가렸다. 모든 준비는 완벽하게 끝났고 그 누구도 주저하거나 두려워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최종적으로 몇 가지 주의사항을 들은 뒤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마침내 날이 밝자 76명의 조합원들은 팀별로 나눠 장충체육관에 도착해 입구에서 빵과 우유까지 받아들고 행사장으로 무사히 들어갔다. 총각을 비롯해 얼굴이 많이 알려진 간부들은 사전에 발각될 것을 우려해 현장에 가지 않았다. 정확히 오전 10시 기념식이 시작되었고 30분쯤 지나자 한국노총 위원장 정동호가 기념사를 낭독하기 시작했다. 순간 76명 조합원들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이총각 구술
구술정리 박민나<가시철망 위의 넝쿨장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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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총각 전 동일방직 노조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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