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4월26일 해고노동자들과 공장 현장에 들어가 기습농성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체포된 동일방직 노조 지부장 이총각은 실형을 받고 5월2일 인천시 학익동 당시 인천소년교도소에 수감됐다. 사진은 1990년 인천구치소로 바뀐 소년교도소의 전경.
이총각-우리들의 대장, 총각 언니 57
이총각은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조합원 1300명의 동일방직 노조 지부장이 되었을 때 어쩌면 엄청난 유혹이 자신을 괴롭힐 것이고, 더 많은 고통이 따를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시련은 상상했던 것보다 더 자주, 더 크게 쉴 새 없이 쫓아왔다. 총각은 그럴 때마다 자신이 더 강해지고 더 커진다고 생각했지만 늘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어떤 때는 작은 시련에도 휘청거리고 그냥 주저앉고 싶을 때도 많았다. 그럼에도 몸도 마음도 연약한 자신이 그처럼 크나큰 시대의 과제를 떠안고 흔들림 없이 걸어갈 수 있었던 힘은 ‘하느님이 하는 일’이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신앙은 믿고 실천하는 것이지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는 믿음이 확고했다. 그래서 그 행동의 끝에 ‘구속’이 있을 것이란 사실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뜻밖에 구속이 되고 보니 마음이 복잡하고 억울했다. 정당한 일을 하고도 오히려 자유를 구속당하는 현실에 분노가 치솟았다.
1978년 4월26일 유치장에서 갇힌 뒤 6일 만인 5월2일, 소식을 듣고 몰려온 조합원들의 울부짖음 속에서 이총각과 김인숙은 검찰로 송치되었다. 온갖 시련을 함께한 조합원들과 헤어져야 하는 현실이 원통해 총각은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처음 가본 검찰청 유치장은 들어가면 누구나 스스로 죄인임을 통감하게 하려고 한 듯 열악하기 짝이 없는 곳이었다. 2명 정도가 들어갈 수 있는 공간에서 당장 악취가 코를 찔렀다. 바닥은 쥐가 다닐 만큼 지저분했다. 점심으로는 라면땅 봉지 같은 데다가 꽁보리밥을 꾹 눌러 그 위에 짠지 다섯 조각을 올려서 줬다. 그들은 일단 죄인으로 판단되는 인간은 동물 취급을 한다는 걸 깨달았다.
이어 그날 밤 김인숙과 함께 도착한 학익동 인천소년교도소(현 인천구치소)는 마치 거대한 무덤 같았다. 총각은 잘못한 게 없으니 두려움도 없었지만 저 문을 지나가면 당분간 자유가 구속당할 거라는 생각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푸른 죄수복을 입히더니 번호 하나를 줬다. 31번. 그 안에 있는 한 그는 이총각이 아니라 31번이었다.
처음 들어간 독방은 나쁘지 않았다. 창문도 있고 서넛이 잘 수 있는 제법 큰 방이었다. 그런데 보름 정도가 지난 어느날 식구통 하나만 덜렁 있는 징벌방으로 옮기라고 했다. 사상범을 수용하는 곳이라고 했다. 밖으로부터 바람이 들어올 수 있는 곳은, 뚜껑도 없는 변기통 옆에 난 작은 구멍이 전부였다. 징벌방은 일제강점기에 만든 것이어서 마루가 다 삭아 있었고 그 밑으로 쥐들이 다니는 소리도 들렸다. 무엇보다 뚜껑이 없는 변기통이 견디기 힘들었다. 거기서 구더기가 올라오기도 해서 나프탈렌을 방 구석구석에 뿌려놓아 그 냄새 때문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한번은 밥그릇에 물을 좀 떠놓고 나중에 먹으려고 하니 구더기 두 마리가 가라앉아 있어서 소름이 돋았다.
첫날 밤, 총각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뭔가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의를 가지고 쳐들어간 공장 현장에서 쫓겨나지 않으려고 얼마나 안간힘을 썼던가. 몸은 천근만근인데 머리가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했다. 하긴 내 의지로는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는 방에 갇혀 낯선 옷에 낯선 이불을 덮고 낯선 냄새를 맡아가며 청하는 잠이 아무렇지도 않을 리가 없었다. 24시간 꺼지지 않는다는 전등을 바라보며 총각은 오만 가지 회한에 휩싸였다. ‘나 없이도 잘할 수 있을까’ 싶은 걱정은 없었다. 모두 일당백의 능력을 가진 막강 동일방직 전사들이 아닌가. 오히려 같이 싸우지 못하고 갇혀 있어서 한없이 미안했다. 이영숙이 그 칼날처럼 긴장이 계속되던 시기에 결혼을 하겠다고 사라졌을 때 총각은 입술을 깨물며 다짐했다. “두고 봐라. 나 혼자라도 끝까지 남아서 투쟁할 거다!” 그렇게 큰소리를 쳤는데 결국 투쟁의 결과가 124명의 해고로 끝나다니, 총각은 자신이 잘못했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왔다는 죄책감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4월27일 반조직파들이 대의원 선거를 치러 박복례를 새 지부장으로 뽑았다는 소식을 경찰서에서 들었을 때는 인간에 대한 배신감과 허망함에 온몸에서 피가 다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날의 분노를 떠올리며 허열에 들떠 지푸라기 같은 몸뚱이를 뒤척이는데 어디선가 기상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이총각 구술
구술정리 박민나<가시철망 위의 넝쿨장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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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총각 전 동일방직 노조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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