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5월 ‘김영태 낙선 유인물 사건’을 비롯해 동일방직 해고노동자들은 크고 작은 복직 투쟁을 할 때마다 면회조차 금지된 상태에서 상대적으로 무거운 처벌을 받았지만 지치지 않고 싸움과 교육훈련을 해나갔다. 사진은 그해 7월 부산에서 구속된 추송례·김옥섭 등 해고자 5명에 대한 면회를 촉구하는 1인시위 모습. <동일방직 노동조합 운동사> 중에서
이총각-우리들의 대장, 총각 언니 61
1978년 5월18일 동일방직 해고노동자들이 희생한 보람도 없이 김영태는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당선됐다. 오히려 선거법 위반으로 구속된 추송례를 포함한 5명은 서울도 아닌 부산교도소에 수감되어 동료들의 면회조차 쉽지 않았다. 추송례는 쇠창살에 갇혀 고통스럽고 외로웠지만 그럴수록 마음을 다지며 그때의 심정을 절절히 시로 표현하기도 했다.
‘짓밟히고 채이고/ 이젠/ 차돌맹이가 된 일백이십사개의 돌/ 피맺힌 날들이 알알이 영글어/ 일년하고도 일백육십일/ 눈물에 씻기워 지워진 날들이었기에/ 잊을 수 없고/ 가슴이 터져라 절규했던 외침이었기에/ 영원히 풀릴 수 없는 멍들은 가슴은/ 오늘도 내일도 목이 터져라 외치련다/ 노동자의 생존권 보장하라!/ 아프고 쓰린 이 가슴이 터지도록 외치련다/ 동일방직 문제 해결하라!/ 천하역적 날강도 김영태는 물러가라!/ 노동3권 보장하라!/ 생명을 쪼개는 이 외침이/ 하늘에 닿는 그날까지/ 나는 외치고/ 또 외치련다’(‘나의 외침’ <동지회보> 1979년 8월호)
동일방직 해고노동자들의 투쟁은 크건 작건 일단 경찰에 연행이 되면 구속이거나 구류 최고형인 29일·25일씩을 받고 유치장에 갇히는 것으로 끝이 났다. 나중엔 어디 가서 뭘 하든 구류를 전제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게 지긋지긋할 정도였다. 이는 방송에 제대로 보도도 안 된 동일방직 사건이 민주노조운동의 대표적인 사례가 되어 국내외에 파장이 크다는 증거였고, 그만큼 해고자들이 많은 곳에서 사건을 알린 결과였다.
이 모든 활동에는 돈이 필요했다. 해고노동자들은 도시산업선교회(산선)에서 집단생활에 들어가는 기본 생계비는 물론 호소 유인물 인쇄비, 구치소 면회 등등 적잖은 활동비가 필요했다. 다행히 교단과 단체에서 들어오는 모금으로 겨우 충당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냥 모금에만 의존할 수 없는 상황이라 6월20일 강원용 목사의 서울 경동교회에서 기금 마련 바자회를 열기도 했는데, 성공리에 끝난 덕분에 큰 보탬이 됐다.
복직 투쟁이 장기화하자 해고자들마다 갖가지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곧 될 것 같았던 복직은 멀어지고 투쟁에 앞장섰던 사람들이 구속되거나 구류를 살면서 빈자리가 많아지자 복직을 포기하고 일자리를 찾아 떠나는 노동자들이 하나둘 늘기 시작했다. 산선을 지키고 있던 해고자들이 간절히 설득을 해보기도 했지만 워낙 남동생 학비 때문에 어린 나이에 일을 시작한 ‘여공’들도 많아서 속수무책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고 있는 동지들이 나왔을 때 남아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더 단단해졌는지 자랑스럽게 보여줘야 하지 않겠는가.
산선 실무자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해고자들은 다시 모여 지금까지의 투쟁을 점검하고 앞으로 상황에 대비할 수 있도록 교육을 받기로 결의했다. 이총각은 면회 온 해고노동자들로부터 ‘집단교육’ 얘기를 듣고 아주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도 지오세와 산선, 크리스찬아카데미 등의 교육을 통해서 노동자의 권리를 알게 되었고, 올바른 삶을 살아가려면 늙어 죽을 때까지 공부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6월29일, 2박3일에 걸친 교육이 시작되었다. 그동안 산선에 다소 뜸했던 해고자들은 집으로 찾아온 임시 노조간부들로부터 교육에 참가하라는 권유를 받고 “이제사 교육은 무슨 교육이야?” “이제 모든 게 다 지겨워”라며 시큰둥한 반응이었지만 나중엔 끝내 의리를 저버리지 않고 자리를 채웠다. 교육은 ‘어떻게 할 것인가’를 주제로 초청 강연과 분반 토의, 토의 내용 발표 등으로 진행되었다. 강사로는 백기완·김창식·김창국·김근태·황영환 등이 나섰다. 특히 황영환은 같은 노동자 출신으로 해고자들이 알아듣기 쉬운 말로 가슴에 와닿는 설명을 해주어 감동스러웠다. 그리고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의장으로 나서기 직전까지 인천산선에서 일했던 김근태는 누구보다도 해고자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좋은 오빠’였다. 그때 김근태가 들려준 이야기를 지금껏 잊지 않고 있는 해고자들도 있다. “이제는 너희들이 인천지역에서 노동자 출신으로 지도자 구실을 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목적의식적으로 사회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공부가 필요하다.”
교육은 ‘동일방직 사건이 미치는 영향과 의미’, ‘여성운동사와 노동’, ‘한국 노동운동의 현황’ 등이었고 이후 토론과 발표가 이어졌다. 그리고 마지막날은 ‘복직을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를 두고 전체토론을 벌인 뒤, 촛불의식으로 마무리하며 결단의 시간을 가졌다. 교육은 그동안 약해지고 흐트러졌던 해고자들의 마음을 모두 드러내놓고 충분히 이야기하며 투쟁의 의지를 다지는 의미있는 시간이 되었다.
이총각 구술
구술정리 박민나<가시철망 위의 넝쿨장미> 작가
이총각 전 동일방직 노조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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