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7월 동일방직 민주노조 지부장 이총각을 비롯한 해고노동자 9명은 결심공판에서 모두 유죄 판결을 받았고, 이에 항의하던 다른 조합원 7명은 경찰에 연행돼 구류처분을 받았다. 사진은 그 무렵 해고조합원들의 복직과 구속자 석방을 위한 도시산업선교회의 기도 모임으로, 인명진(오른쪽부터) 목사, 서경원 전 의원, 허병섭(작고)·조화순 목사 등이 보인다.
이총각-우리들의 대장, 총각 언니 62
1978년 7월18일, 앞서 4월26일 동일방직 작업 현장에 들어가 농성을 시도했다가 구속된 노조 지부장 이총각과 총무부장 김인숙, 불구속 기소된 7명의 결심공판이 열렸다. 심기일전해 교육까지 받고 출근투쟁과 노동청·섬유본조·신문사 등을 돌며 방문투쟁을 가열차게 진행해가던 해고 조합원들은 일찌감치 법정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날 재판에 대한 높은 관심을 반영하듯 방청석은 꽉꽉 들어차 있었다. 재판 시간인 오후 2시가 돼가자 수인복을 입은 이총각과 김인숙이 법정으로 들어왔다. 두 사람을 본 조합원들이 여기저기서 훌쩍거리기 시작했고 끝내는 정숙하라는 경비의 호통을 들어야 했다.
그날은 회사 쪽 증인으로 최종율 과장과 우종환 섬유산업노조(섬유본조) 조직국장이 나와 변호사의 질문에 답변을 했다. 그런데 그들은 예상대로 줄곧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이총각 집행부가 조합원의 불신을 받고 있었다”, “원만한 수습을 위해 회사 쪽에서 여러차례 협상을 벌이는 등 최대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결국 해고시키게 되었다” 등등 전혀 사실과 다른 위증을 했다. 해고자들은 방청석에서 들고일어나 분노의 항의를 했다. 하지만 검사는 이총각·김인숙에게 1년6개월의 실형을, 불구속 7명에게는 집행유예 1년을 구형했다.
증언을 마친 우종환과 최종율이 증인석 뒤쪽 문으로 빠져나가자 해고자들은 재빨리 뒤따라 나갔다. 그들의 가증스러운 거짓말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나와 보니 최종율은 이미 차를 타고 떠났고 우종환과 박복례가 탄 자동차가 막 출발하려 하고 있었다. 그 순간 해고자 안순옥이 달려오는 자동차 밑으로 들어가 배를 깔고 누워버렸다. 자동차가 ‘끼익’ 소리를 내며 급정거를 했다. 뒤이어 김용자와 구예금도 드러누웠고 삽시간에 해고자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어 자동차 문을 두드리며 “왜 거짓증언을 했냐? 나와라!”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그들은 문을 안으로 잠그고는 비웃듯이 빙글거리더니 창문을 조금 열고 그 틈으로 침을 뱉는 것이었다.
분통이 터진 해고자들은 통곡을 하며 자동차를 두들겼고 이를 말리는 형사들과 몸싸움을 벌였다. 그러는 와중에 기동대 버스와 함께 기동경찰 30여명이 출동해서는 해고자 1명에 4명씩 달려들어서는 버스 안으로 내동댕이쳤다. 악에 받친 해고자들은 유리창을 깨고 경찰 방망이를 빼앗아 때리기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기동대 버스 안은 순식간에 유리 가루와 피로 범벅이 되었고 해고자들은 옷을 찢기고 피투성이가 된 채 인천 동부경찰서로 연행되었다. 특히 해고 전에 있었던 단식농성 때 15일간 병원에 입원해 있었을 정도로 몸이 상했던 김용자는 아직 회복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손을 다쳐, 하얀색 블라우스와 분홍색 스커트가 피범벅이 돼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경찰은 연행한 해고자들에게 한명씩 목욕탕에 들어가서 속옷을 벗고 오라고 했다. 이에 구예금이 훌쩍거리며 울기 시작하자 경찰은 욕설을 퍼부으며 엎드려뻗쳐를 시키더니 몽둥이로 엉덩이를 때렸다. 그때 석정남은 누구보다 손에서 계속 피를 흘리고 있는 용자가 걱정이 되었다. “제발 김용자 대신 제가 맞을 테니 용자는 때리지 마세요.” 경찰에게 애원을 해봤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결국 그날 즉결재판으로 석정남 7일, 안순옥·안순애·문형순·구예금·김영순·김용자가 각각 20일의 구류처분을 받고 동부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었다.
그런데 다음날 면회를 온 해고자들로부터 김영순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비보가 전해졌다. 유치장으로 돌아온 영순은 대성통곡을 했다. 모두들 너무 가슴 아프고 속상해 유치장은 눈물바다가 되었다. “경찰 아저씨, 영순이 좀 내보내줘요. 영순이 대신 우리가 며칠씩 더 살게요.” “사정은 딱하지만 안 돼.” “그럼 집에 가서 장례 끝내고 다시 와서 살면 되잖아요.” “안 돼!”
그 무슨 말로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영순은 구류 20일을 사는 동안 내내 먹는 것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울기만 했다. 그렇게 20일이 지나서야 영순은 집으로 갈 수 있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곧장 부산에서 열리는 전국섬유노조 대의원대회장으로 가기 위해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이총각 구술
구술정리 박민나<가시철망 위의 넝쿨장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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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총각 전 동일방직 노조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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