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7월30일 동일방직 해고노동자 11명은 부산 부전예식장에서 열린 섬유산업노동조합 임시대의원대회에서 민주노조 탄압에 앞장선 김영태 위원장의 재선을 막고자 유인물을 돌리며 시위를 했다. 사진은 당시 해고 노동자들(오른쪽)이 경찰들에게 막혀 대회장 입장조차 못한 채 부전예식장 앞에 모여 있는 모습. <동일방직 노동조합 운동사> 중에서
이총각-우리들의 대장, 총각 언니 63
1978년 7월30일 새벽 6시40분 최연봉·안순애·석정남·김용자·문형순 등 동일방직 해고노동자 11명은 부산역에 도착했다. 섬유노동조합(섬유본조) 전국대의원대회가 열리는 부전예식장으로 가는 길이었다. 이날은 임시대회여서 다시 위원장에 출마한 김영태의 재선 여부에 모두의 관심이 쏠려 있었다. 동일 해고자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김영태의 재선은 막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부산행을 단행한 것이었다.
위원장 선거에서는 김영태 세력과 그로부터 갈라져 나와 출마한 한일합섬 지부장 이유복 세력이 맞붙었다. 이유복 쪽에서는 김영태에 반대하는 민주노조들을 자신의 세력으로 끌어들이려고 김영태가 박탈한 대의원 자격을 다시 부여해주려고 노력을 기울였다. 결국 대회 이틀 전에 열린 본조 집행위원회에서 3개 노조의 대의원 자격을 인정한다는 결론을 끌어냈다. 하지만 김영태는 자신이 불리해질 것을 예상하고 온갖 수단방법을 다 동원해 민주노조의 참석을 저지하고 나섰다. 이는 김영태가 혼자 벌인 일이 아니라 중앙정보부·경찰·노동청 등 이른바 관계기관 대책회의에서 결정한 것이었다. 결국 전국대의원대회에 참석하러 온 원풍모방의 방용석 지부장과 와이에이치(YH)무역의 사무국장 박태연 그리고 반도상사 장현자 지부장 등 대의원들은 대회장 입구에 포진하고 있던 정복 경찰들과 신원을 알 수 없는 불량배 수백명에게 입장을 저지당했다.
동일 해고자들은 대회 시작 시간인 오전 10시 전부터 부전예식장 앞에서 입장하는 대의원들에게 동일방직의 상황을 알리기 시작했다. “대의원 여러분, 우리는 동일방직에서 해고된 조합원입니다. 김영태 위원장은 똥물을 뒤집어쓰고 쫓겨난 우리들을 다른 공장에마저도 취업하지 못하도록 전국에 명단을 돌리는, 노조 간부로서 차마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질렀습니다. 이것이 바로 섬유노조 위원장 김영태가 전국에 뿌린 ‘블랙리스트’입니다. 이는 김영태가 노동자의 대표자가 될 수 없다는 증거입니다.”
미리 준비해 간 공문을 흔들며 소리치자 조직행동대원들과 경찰들이 몰려와 동일 해고자들의 앞을 가로막고 나섰다. 그때 입장하는 대의원 무리 속에 박복례·김인태·정봉용 등 똥물을 뿌릴 때 앞장섰던 동일의 어용노조 사람들이 보였다.
“박복례다!” “똥 뿌린 놈들이닷!” 해고자들은 고함을 지르며 그들에게 달려들었지만 이내 저지당했고, 그들은 유유히 대회장으로 들어가 버렸다. 대회장 입장조차 불가능했던 해고자들은 너무 억울하고 분해 대회장 앞에 주저앉아 버렸다.
결국 이날 대회에서 김영태는 참석 대의원 152명 가운데 80표를 얻어 재선되었다. 모두의 바람을 뒤로하고 권력과 결탁해 부귀영화를 탐한 악질 노조간부가 또다시 3년간 권좌를 누리게 된 것이다. 이에 원풍모방·와이에이치·반도상사 등 민주노조들은 유신체제에 안주하고 협조하면서 노동조합을 탄압하는 비민주적인 섬유본조와는 관계를 단절하기로 결의했다. 당장 본조에 납입하는 의무금을 동결하고 본조의 어떤 지시나 감독도 거부하기로 했다.
참담한 결과에 할 말을 잃은 동일의 해고자들과 3개 민주노조 간부들은 지칠 대로 지친 몸을 이끌고 지오세(가톨릭노동청년회) 부산연합회 사무실로 향했다. 동일 해고자들은 힘들었지만 섬유노조 산하에서 지부로 함께 활동하며 민주노조를 지키고 강화해 나간 훌륭한 지도자들과 함께 있는 것이 그나마 큰 위로가 되었다. 그들은 동일방직이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힘을 보태준 동지들이었다. 권력과 야합해 사리사욕만 채우는 김영태 같은 비열한 인간이 아니라, 이들이야말로 섬유본조를 이끌어야 할 훌륭한 지도자였다.
그날 밤 해고자들은 이들과 둘러앉아 마신 서툰 술이 목을 타고 자꾸 넘어갔다. 술의 힘을 빌리고서야 참았던 울분과 설움이 한꺼번에 터져나왔다. 서로 부둥켜안고 울기 시작하자 곧 통곡이 되어 부산의 밤하늘을 뜯어놓고도 멈출 줄을 몰랐다. 그들을 일으켜 세운 사람은 방용석 지부장이었다. “초상났어? 울긴 왜 이렇게들 울어? 기회는 이번만이 아니니까 힘들 내자구. 동일 식구들은 그동안 고생도 많이 했고, 기왕에 내려온 부산이니 내일 하루 관광이나 하다가 모레쯤 올라오라고!”
난생처음 마신 술에 만취한 안순애는 욕조에 주저앉아 넋두리를 늘어놓다가 방용석의 부축을 받고 몸을 일으키며 ‘그래도 세상엔 우리 편이 많으니 희망이 있는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이총각 구술
구술정리 박민나<가시철망 위의 넝쿨장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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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총각 전 동일방직 노조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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