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년 11월호 <동지회보>로, 정보당국의 방해로 인쇄가 불가능해지자 해고자들이 직접 철필로 써서 등사한 것이다. 사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이총각-우리들의 대장, 총각 언니 69
1978년 11월1일 동일방직 해고노동자들은 정기모임을 열어 9월22일 금요기도회 폭력진압 사건으로 지칠 대로 지친 몸과 마음을 수습하며 새로운 투쟁 방법을 모색했다. 몸을 사리지 않고 해고에 저항하는 투쟁을 계속해왔지만 복직의 길은 아득해 보였다. 게다가 복직 투쟁이 민주화 투쟁과 결합하면서 앞으로 투쟁을 어떻게 진행해 나갈지에 대해 깊이 있는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이날 모임에는 20여명이 참석했다. 해고에 대해 원천적으로 부당한 것임을 주장하며 회사에서 요구하는 퇴직금 수령을 거부하기로 했으나, 이미 절반 이상이 퇴직금을 받고 떠난 상태였다. 하지만 당분간 복직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무조건 퇴직금을 받지 말아야 한다고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다른 삶을 선택해야 하는 절박함을 대안도 없이 무시할 수만은 없기 때문이었다.
해고노동자들은 임시노조의 상근 전임자로 최연봉과 석정남을 지명하고 최소한의 생계비를 지급하기로 결의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할 수 있는 한 모두 취업을 하기로 결정하고, 퇴직금 수령은 각자 자유롭게 선택하기로 했다. 또한 그룹을 만들어 팀장을 정하고 상근자와 수시로 연락해 앞으로의 활동에 해고자 전원의 의사가 반영되도록 했다. 그리고 만나지는 못해도 해고자들의 소식을 서로 잘 알 수 있도록 <동지회보>를 발간하기로 했다.
노조 전임자로 임명된 석정남은 이 무렵 수원의 아카데미하우스에서 있었던 크리스찬아카데미 교육에 참석하고 심기일전의 계기로 삼았다. 4박5일간의 이 노동교육을 받기 위해 전국에서 노동자들이 모여들었다. 그동안 동일방직의 투쟁에 함께해온 원풍모방과 와이에이치(YH)무역, 반도상사 등의 노조 간부들을 거기서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정남은 이 교육을 통해 그동안 기초지식이 없었던 사회문제와 노동운동에 대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어 참석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세상이 올 때까지 변절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밝힌 신인령 교육 강사와 열정을 다해 교육을 해준 한명숙 선생님 등을 잊을 수가 없다.
꼬리뼈를 다쳤지만 병원에 입원할 형편이 못 돼 약으로 대신하고 있던 이총각은 거동이 좀 불편하긴 했지만 동일방직 사건을 알리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다. 시국은 갈수록 살얼음판이었고 유신 철폐를 외치는 시위가 줄을 이었다. 10월17일에는 재야인사 420명이 ‘10·17 민주국민선언’을 발표하며 박정희 독재정권을 몰아붙였다. 총각의 집 앞에는 늘 담당 형사가 진을 치고 있어서 심장이 약하고 여린 올케는 늘 긴장 속에 살아야 했다. 용현동 전셋집에서도 주인이 “재수 없다”며 싫은 소리를 하는 통에 학익동으로 이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날만 되면 제복을 입은 경찰이 대문 앞에 의자를 갖다 두고 앉아 감시를 하고 있으니 좋아할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총각은 자기 할 일만 하면 되는 일이었지만 아무래도 식구들에게는 너무 미안한 일이었다.
임시노조 전임자로 활동을 시작한 최연봉과 석정남은 우선적으로 조직을 강화할 방법들을 모색했다. 먼저 모임에 참석하지 않는 해고노동자들을 직접 찾아가 소식을 전달하고 회보에 올릴 동지들의 이야기를 열심히 모았다. 드디어 12월3일 정기모임에서는 참석한 30명에게 첫 회보를 나눠줄 수 있었다. 지부장인 총각을 비롯해 최연봉, 윤춘분 등의 글이 실리고 소식란에는 지난 5월18일 부산에서 유인물을 배포하다 구속된 추송례를 비롯한 5명의 동지들이 11월12일자로 대구교도소로 이감된 사실을 알렸다. 그리고 결혼한 사람들 이야기와 모친상을 당한 동지들 이야기 등 고향에 내려가 있는 사람들의 동향을 전하며 마음을 나눴다.
300부 정도 만든 회보는 해고자들이 우선 나눠 갖고 나머지는 동일방직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배포되었다. 전임자들은 아주 멀리 떨어진 시골에 가 있는 회원의 주소까지 찾아내 해고자 한 사람이라도 회보를 받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했다. 그리고 경기도 지역에 사는 해고자들은 직접 찾아가 전달하면서 묵혔던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며 서로 소원했던 마음들을 조금씩 모아가기 시작했다. 한달 뒤인 79년 1월호도 무사히 발간되었지만 2월호는 그만 인쇄소에서 압수를 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정명자·김영순·안순애·김용자 등이 직접 철필로 긁고 등사를 해서 7월호를 찍어 기어코 배포했다.
이총각 구술
구술정리 박민나<가시철망 위의 넝쿨장미> 작가
<한겨레 인기기사>
■ ‘국정원 규탄’ 첫 시국 미사…“정의가 없는 국가는 강도 떼”
■ 탈북자 “수용소 탈출 모의한 어미니와 형 신고해 공개 처형” 증언
■ 국정원 청문회 ‘소신 발언’ 권은희 “국민 경찰” 응원 봇물
■ ‘정수장학회 비밀 회동’ 이상한 판결, 청취는 유죄-녹음은 무죄
■ [화보] 머리카락 보일라…‘댓글 김직원’ 철벽 방어
이총각 전 동일방직 노조위원장
구술정리 박민나<가시철망 위의 넝쿨장미> 작가
<한겨레 인기기사>
■ ‘국정원 규탄’ 첫 시국 미사…“정의가 없는 국가는 강도 떼”
■ 탈북자 “수용소 탈출 모의한 어미니와 형 신고해 공개 처형” 증언
■ 국정원 청문회 ‘소신 발언’ 권은희 “국민 경찰” 응원 봇물
■ ‘정수장학회 비밀 회동’ 이상한 판결, 청취는 유죄-녹음은 무죄
■ [화보] 머리카락 보일라…‘댓글 김직원’ 철벽 방어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